[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돌아오지 않은 황제의 여인

  • 입력 2009년 1월 10일 03시 04분


중국 역사를 통틀어 절세가인 중 하나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후궁이었다. 원제는 궁녀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면 총애하였다. 후궁들은 그림을 그리는 화공(畵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뇌물을 썼다. 실물보다 그림을 더 잘 그려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요즘으로 치면 본래의 모습과 다르게 성형을 시도한 셈이다.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한 후궁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을까 생각하면 요즘이나 그때나 미모에 대한 경쟁의식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황제에게 본래의 모습을 고하지 않고 그림으로 성형한 모습을 올릴 생각을 했다니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 아닌가.

후궁 중 가장 아름다웠던 왕소군은 원제에게 한 번도 발탁되지 않았다. 돈이 없어 화공에게 뇌물을 쓰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녀를 오만하고 괘씸하게 여긴 화공은 왕소군을 본래의 모습보다 더 못생기게 그려 왕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왕은 그녀가 후궁 중 가장 못생긴 줄 알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 그녀를 흉노의 왕에게 출가토록 하였다. 뒤늦게 그녀의 실물을 보고 황제는 놀라고 안타까워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흉노와의 약조를 어길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절세가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왕소군이 출가한 뒤 왕은 후궁의 그림을 그려 올린 화공 모연수(毛延壽) 등을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한번 떠난 절세가인은 끝내 중국 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흉노의 왕에게 출가한 그녀는 흉노의 왕이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과 다시 결혼하여 평생을 흉노의 땅에서 살았다. 이를 불행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왕소군이 타국에서 살게 된 건 불행한 일이지만 평생 후궁과 성형 경쟁이나 하며 살기보다 훨씬 나은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얼마나 절세가인이었으면 왕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 다시 왕비로 삼았겠는가.

성형미인이 넘쳐나는 세상, 절세가인의 사연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그림 성형을 하지 않아 오히려 팔자가 바뀐 여자. 한 미인을 잃은 게 아니라 대륙의 절세가인을 잃은 걸 후대의 많은 시인은 애석해하였다. 그중의 하나, 이백(李白)의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가 너무 절절하다.

한나라 시절 진나라 땅에 떠 있던 달은/그림자를 내려 명비를 비추네./한번 옥관도에 올라/하늘가로 떠나간 후 다시 못 오네./한나라 달은 돌아와 동해에 떠오르건만/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고 돌아올 날이 기약 없네./연나라 땅의 긴 겨울에 눈이 꽃을 만들었으니/고운 얼굴 초췌하여 오랑캐 모래에 사라지도다./살았을 때 돈이 없어 화공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죽어 푸른 무덤만 남겨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네.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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