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창밖엔 함박눈, 거실엔 웃음꽃

  • 입력 2008년 12월 26일 02시 57분


시끌벅적 사교모임 “NO”… 오순도순 가족모임 “YES”

《최근 한 인터넷 설문조사에서 새해 소원을 묻는 질문에 10명 중 3명이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또 소비 트렌드 분석센터가 전망한 내년의 10대 트렌드에 따르면 불황의 여파로 주로 집에 머물며 가족과 함께 재미와 위안을 찾는 ‘신 코쿤(cocoon·누에고치)족’이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다시 집으로’ ‘소박한 행복 찾기’ ‘엄마 같은 아빠’ 등의 트렌드 전망들은 가족과 함께 찾는 행복이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유독 어렵고 힘들었던 올 한 해를 숨 가쁘게 달려온 당신. 연말연시 가족과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소박하지만 풍성하게 가족의 행복을 찾는 세 가정을 소개한다.》

● 가족을 위한 따뜻한 ‘홈 메이드’ 요리

17일 저녁 서울 강동구 둔촌동 이주희(33·신라호텔 대리) 씨 가족의 집에선 이색 이벤트가 열렸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딸은 부모를 위해, 아내는 시부모를 위해, 시동생은 여자친구를 위해 손수 음식을 만들었다.

집에 들어선 순간 따뜻한 음식 기운이 확 풍겼다. 남편 홍장선(32·고려대 사회학과 강사) 씨는 앞치마를 두른 채 토마토소스 해물 스파게티를, 큰딸 서영(4) 양은 부모에게 줄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만들고 있었다. 시동생 홍경선(29·국순당 대리) 씨는 일본인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만들며 그리움을 달랬다.

이 씨의 가정은 굳이 표현하자면 ‘확대된 대가족’이다. 어린 두 딸을 둔 이 씨는 시댁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시어머니로부터 육아 도움을 받는다. 낮 시간에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지만 부부가 퇴근하기까지 저녁시간의 육아는 시어머니가 맡는다.

남편 홍 씨는 아내가 ‘내년에도 가늘고 길게 직장에 오래오래 잘 다니라’는 뜻에서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홍합, 오징어, 버섯, 브로콜리를 넣고 맛을 낸 스파게티는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직장에 다니다 공부하기 위해 회사를 관둔다고 했을 때 아내가 이해해준 게 너무 고마워요. 지금 밟고 있는 박사과정을 잘 끝내 아내를 편하게 해주고 싶어요.”

시어머니 정기화(56) 씨는 “귀하게 키운 아들이 집에서 요리를 한다는 게 은근히 속상하지만 요즘 맞벌이 부부의 생활방식을 이해한다”며 “손녀들을 봐주기가 힘에 부치지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이 씨는 시부모를 위한 집 모양의 케이크를 만드느라 바빴다. 요즘 집값이 많이 떨어져 달랑 집 한 채로 노후를 보내야 하는 시부모를 위로하고 싶단다.

집 모양 케이크를 만드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니 잔잔한 행복의 물결이 밀려왔다. 이 씨는 스펀지 케이크를 삼각형으로 잘라 접시에 세운 뒤 흰 생크림을 발랐다. 녹인 초콜릿을 삼각형의 두 변에 바르고 빼빼로 과자를 얹으니 금세 지붕처럼 보인다. 딸은 비스킷으로는 문, 형형색색 사탕으론 벽돌을 표현했다. 하트 모양 초를 굴뚝삼아 꽂으니 정말로 예쁜 집이 완성!

가족이 도란도란 음식을 나누던 중 시아버지 홍사광(61) 씨가 말했다.

“가족끼린 단점을 보면 안 될 것 같아요. 가족이란 구성원끼리 하모니를 이루는 예술이 아니겠습니까.”

● 함께 아프고 함께 웃는 ‘거울 같은’ 가족

17일 낮 서울 종로구 청운동 사진작가 이승하(35·홍보사진 전문 포토스튜디오 ‘36.5℃’ 대표) 씨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 씨가 촬영한 제주의 풍경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 출신인 아버지 이의택(68) 씨의 뒤를 이어 ‘사진의 길’을 걷고 있는 딸…. 과거 아버지는 딸이 사진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극구 말렸지만, 최근 이사한 새집 곳곳엔 딸이 찍은 사진들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등 굵직한 행사 사진을 찍는 딸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지원자다.

이날 이 씨의 집에선 크리스마스를 앞둔 가족들의 점심 성찬이 준비돼 있었다. 이 씨, 함께 사는 부모, 40여 년의 미국 이민생활을 마치고 이달 초 역(逆)이민한 이모와 이모부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예쁘게 포장한 선물 꾸러미들을 준비해 왔다. 연말에 가족이 한곳에 모여 선물을 교환하는 이 가족의 이벤트는 20여 년 동안 계속됐다. ‘1만 원 이내’란 기준에 맞춰 각자 준비한 선물을 제비뽑기해 나눠 가졌는데, 노년의 부모와 이모 가족의 표정은 아이들처럼 연방 싱글벙글이었다. 선물은 촛대, 보디로션, 사케(일본 술) 병, 찬합 등….

“1만 원 넘지 않는 선물 고르느라 힘들었어. 포장도 꽤 신경쓴 거라고.”(이 씨의 이모부)

“어머, 샤워 젤이구나. 향이 너무 좋네. 고마워요. 잘 쓸게요.”(이 씨의 어머니)

이 씨는 이모 가족의 역이민을 환영하는 뜻에서 따로 준비한 선물도 내밀었다. 서울역사의 야경을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은 것이었다.

“여생을 모국에서 보내시려는 이모 가족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선물해드리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간만에 칭찬해준 사진이기도 했고요.”

나이가 들고 각자의 생활이 바빠지면서 가족 연말모임의 성격도 조금씩 달라진다. 예전에 어른들이 준비하던 음식은 이제 이 씨와 사촌들이 맡는다. 올해엔 일본에 사는 이 씨의 언니 가족이 처음으로 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 가족들의 아쉬움이 컸다. 이 씨는 “내게 있어 가족은 ‘거울’ 같다”고 했다. 같이 아프고 같이 웃는 존재란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택한 이 씨는 18년 동안 ‘여성의 전화’에서 자원봉사 상담을 해온 어머니를 따라 상담심리사 자격증도 땄다.

아버지 이의택 씨에게 물었다. 그에게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지.

“과거엔 가장인 내 의견이 우선이었죠. 하지만 요즘엔 뭐든 자식들에게 의존하게 돼요. 그게 가족 아닐까요.”

● ‘엄마 같은 아빠’가 만드는 가족의 행복

양경욱(41·현대백화점 차장) 씨는 23개월 된 쌍둥이 남매를 둔 ‘엄마 같은 아빠’다. 당초 아내 최현경(38·듀폰코리아 차장) 씨는 회사를 관두고 육아에 전념할 생각도 해 봤지만 힘들여 딴 미국공인회계사(AICPA) 자격증과 그동안 쌓아온 경력을 포기하는 게 아까워 맞벌이를 택했다. 아파트 대출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들 가족의 삶을 양 씨가 늦은 밤에 보내온 e메일을 통해 소개한다. 그의 진솔한 말을 그대로 전하고 싶어서다.

‘저희 부부는 매일 오후 6시 서로에게 전화를 합니다. ‘8년차 부부의 애정 확인’이 아니라 ‘퇴근시간 확인’ 때문입니다. 아이를 봐주는 입주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긴 하지만 퇴근이 늦어질수록 아이들 정서에 안 좋을 것 같아 스케줄을 바꿔서라도 한 사람은 꼭 오후 8시까지 집에 도착하도록 합니다.

퇴근 후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주로 책 읽어주기, 같이 노래하기와 만화 보기, 블록놀이 등입니다. 육아에 남편 아내를 가릴 게 없죠. 아이들이 모두 잠든 오후 11시부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습니다.

주말엔 집 근처로 가족과 함께 산책을 나가요. 유모차를 끌고 20분이면 닿는 교보문고, 청계천, 세종문화회관, 경복궁 앞마당 등이 단골 코스죠. 이따금 삼청동까지 걸어가 예쁜 가게들을 구경합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들이 코스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이에요. 1979년 세계 어린이의 해를 기념해 설립된 우리나라 유일의 어린이 전용 공립도서관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책은 물론이고 부모와 아이가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키 낮은 책상과 의자도 많습니다. 저희 부부는 매주 4, 5권씩 새로운 책을 대출받아 1주일 동안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주말에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그림책을 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어린이도서관에 가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다른 아빠도 많습니다. 솔직히 주말이면 편히 쉬고 싶지만 아이들이 밝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부모가 함께 노력하려 합니다.

저는 주말마다 화분에 물을 주고 청소기를 돌리고 화장실 청소도 합니다. 아내는 세탁기를 돌리고 요리를 합니다. 설거지는 그때그때 나눠서 하고요. 결혼도 출산도 늦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아요. 오늘에 충실하다 보면 반드시 더 좋은 내일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건 희망을 키우는 것이겠죠.’

일요일인 21일 낮 어린이도서관에서 만난 양 씨 가족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양 씨의 말대로 시끌벅적한 연말 모임 대신 아이들과 책을 보러 나온 ‘엄마 같은 아빠’가 참 많았다. 가족의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은 듯했다.

독일 저널리스트 슈테판 클라인은 저서 ‘행복의 공식’에서 “행복은 자동차 운전이나 외국어 공부처럼 반복해서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과연 우리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사는 게 바쁘고 힘겹다는 핑계로 소중한 가족과의 시간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 다들 가족과 따뜻한 연말을 보낼 계획을 세워보지 않으실래요?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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