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한평생, 행복했노라”

  • 입력 2008년 11월 18일 03시 01분


원로시인 10명이 말하는 ‘노년의 삶’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상이 대체로 보람됩니다. 시 쓰고 시 읽으며 시인들과 주로 교우하는 사이에 시의 양분을 복되게 분배받아 시적 풍요에 이른 점이 늘 고맙고 귀중합니다. (하지만) 시를 쓸 때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한평생을 ‘재주 없는 사람’으로 자처하며 지냅니다.”(김남조 시인)

한국 시선에 이름을 아로새긴 원로 시인 10명이 시와 함께한 인생을 돌아보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는 20일 발행할 겨울호(26호)의 특집 ‘시인들의 노년, 노년의 시와 삶’에서 원로시인들이 전하는 노년과 시에 대한 단상을 모았다. 참여 시인은 김광림 김규동 김남조 김윤성 김종길 문덕수 박희진 성찬경 허만하 황금찬 시인 등 10명. 황금찬 시인이 1918년생으로 최고령이며, 1932년생인 허만하 시인이 이 중 가장 아래다.

이번 설문에서 등단 50년이 넘은 시인들은 시인으로 살아온 보람과 후회를 함께 털어놓았다. 황 시인은 6·25전쟁 때 종군시인 시절을 떠올리며 “시를 써 벽에 걸어놓으면 피란민들이 그 시를 읽고 울고 박수칠 때 슬프도록 기뻤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한 편의 시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결국 보잘것없는 낙서 조각으로 남을 때 후회의 정이 강물이 됐다”고 술회했다.

김광림 시인은 “감동과 명성도 일 없이 종교마저 지니지 않은 채 ‘포에지(poesie·시)’에 빠져 있을 때” 보람 있었고, “시작(詩作)에 보수가 없을 때” 안타까웠다고 전했다. 허만하 시인은 보람은 “정년퇴직 후 시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이즈음”, 후회는 “시를 핑계로 술에 젖었던 젊은 시절”이라 말했다. 박희진 시인은 “(후회스러운) 순간이나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말했다.

현 시단이나 후배 시인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잊지 않았다. 성찬경 시인은 “시의 길을 가는 만큼 수도하는 자세로 좀 더 깊이 추구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종길 시인은 “시작도 가치를 창출하는 일임을 명심하라”고, 김윤성 시인은 “시 쓰는 일은 결코 생활수단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규동 시인은 “세종로 근처에 큼직한 다방이라도 생겨서 시인들끼리 자주 만나 친교를 쌓았으면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시인과 시의 위상과 관련해 국가에 바라는 점’이란 질문에는 눈에 보이는 보상에는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김규동 시인은 “국가는 시에 최고의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문덕수 시인은 “장미란이 186kg을 말없이 들어올리듯, 시를 쓰는 일 자체도 나라를 사랑하는 일임을 알아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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