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대일본제국은 누가 죽였나…‘천황과 도쿄대’

  • 입력 2008년 9월 6일 02시 58분


AFP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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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과 도쿄대/다치바나 다카시 지음·이규원 옮김/1160쪽(1권), 1128쪽(2권)·각 4만3000원·청어람미디어

《“일본은 저 ‘제국의 시대’에 나라의

운영을 그르쳐서 한때 엄청난 파국을

겪고 마침내는 대일본제국 자체를

소멸시켜버렸다. 그 결과 일본국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고난의 세월을

겪었다. 그런데 그 시절 일본국의

운영에서 나타난 커다란 과오는

애초에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일본은 어렵다. 잘 아는 듯

친숙하지만 까다롭기 그지없다.

그들 사회가 단순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한국이 일본을 보는 잣대가

이중 삼중인 이유도 있다.

가깝고도 먼, 그래서 일본은

영원히 우리에게 숙제다.

일본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저자는

자문한다. “대일본제국은 왜,

어떻게 죽었는가? 그것을 모르면

일본의 미래도 볼 수 없다.”

참된 의미의 역사 재학습을

위해 저자는 메이지유신부터

1945년 종전(終戰)까지

들여다본다.》

이 책은 1998년 2월부터 2005년 8월까지 70회에 걸쳐 계간 ‘문예춘추’에 실린 연재물이다. 연재 초 총론에 해당하는 1∼4회는 책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로 묶여 2002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머나먼 여정을 살피는 데는 두 개의 핵심 축이 필요하다. 그것은 제목이기도 한 ‘천황’과 ‘도쿄대학교’다. 천황이 일본의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그였다면, 도쿄대는 그에 인적 물적 정신적 재원을 마련하는―때로는 저항한―생산 기지였다. 그리고 그 둘은 제국주의가 패망한 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 사회를 이끄는 근간이 된다.

도쿄대는 태생부터 독립성을 갖춘 상아탑이 되긴 어려웠다. 설립 자체가 메이지유신 시절 근대국가의 인적 인프라 마련이라는 목표에 따른 것이었다. 초대 학장인 가토 히로유키는 천황도 인간이며 하나의 국가 기관으로 보는 진보적 사상가였다. 하지만 뒷날 그가 자신의 사상 자체를 부정한 것도 이러한 국가적 요구에 몸을 사린 탓이다. 제국주의 시절 내내 교수 대다수가 정부 요직을 겸업하는 근대판 ‘폴리페서’로 활동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움직임이 국가 우선주의로 귀결되는 데는 ‘천황’의 역할이 있었다. 천황도 막부 시절엔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으나 개국 이후 서양제국을 따라잡기 위해 일본은 ‘국가총동원체제’를 구축할 강력한 동인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천황이었던 것이다. 지배 계층은 신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자긍심을 쥐여 주고,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종교적 퍼포먼스의 대상으로 천황을 변모시킨다. 이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는 데는 도쿄대가 앞장선다.

저자가 도쿄대에 주목한 것이 이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제국이 의도하지 않았던 ‘근대성의 발전’도 여기서 이뤄졌다. 정부 정책에 반발한 도쿄대 학자들이 뛰쳐나가 게이오대와 와세다대 등을 세워 독립적 학문 기풍을 마련했다. 초기 법과와 의과에 치중했던 도쿄대가 1908년경 경제학부를 만들자 이를 통해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도 유입됐다. 천황주의를 배격하는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 이론가들을 양산한 것도 도쿄대였다.

제국주의의 패망 이후 공허함에 빠진 국민을 일깨운 역할도 도쿄대의 몫이었다. 종전 직후 총장에 오른 난바루 시게루 교수는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방향을 제시한다. 유명한 연설 ‘전후 대학의 사명-복원 학도에게 고한다’였다.

“군인이 칼을 버릴 때 우리 학도의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 희망을 가져라. 이상을 잃지 말라. 이러한 고난의 시대와 싸워낸 선조는 일찍이 없었거니와 이러한 영광된 임무를 부여받은 시대도 일찍이 없었다.”

이 책은 웬만한 사전을 넘는 두께도 그렇지만 글을 풀어내는 솜씨가 놀랍다. 지루할 법한 과거사를 다양한 사료를 토대로 인물과 사건을 긴장감 있게 조립해낸다. 일본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 없어도 빠져들 수 있다. 사실과 평가의 안배를 적절하게 해놓은 구성, 애정과 비판이 고루 섞인 문체도 이해를 돕는다.

아울러 일본 근대사를 다룬 책인데도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한반도가 겹쳐지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일본의 변화에 대한 저자의 책이 기다려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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