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 입력 2008년 8월 18일 02시 55분


‘미루나무 꼭대기에/조각구름이 걸려 있네/솔바람이 몰고 와서/걸쳐 놓고 도망갔어요.’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춰 즐겨 불렀던 동요다.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큰 미루나무 아래는 아이들이 따가운 한여름 햇볕을 피해 매미 소리를 들으며 옹기종기 모여 노는 곳이었다.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춰 불렀던 노래 미루나무는 그러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벌어진 잔혹한 사건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날 오전 10시 45분경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죽여라”는 북한군 장교의 고함 소리와 함께 북한 경비병 30여 명이 도끼와 곡괭이를 휘두르며 유엔군을 기습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는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는 남측 노동자들을 감독하고 있던 유엔군 소속 경비병들에게 북한군이 기습 테러를 자행했다.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릿 중위 등 미군 장교 2명이 현장에서 피살됐다. 또 카투사 5명과 미군 병사 4명 등 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유엔군 소속 차량 3대도 파손됐다.

대낮에 도끼와 곡괭이로 미군 장교를 쳐 죽인 이른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다.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이날 오전 3명의 유엔군 측 장교와 경비병들이 5명의 한국노무단(KSC) 소속 노동자들을 데리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에 있는 유엔군 측 사령부 제3경비초소 근처로 갔다. 이곳에 있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기 위해서였다. 한여름 무성한 미루나무 잎 때문에 유엔군 측 전망대에서 북한군 동향을 제대로 관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25년생 미루나무의 높이는 15m나 됐다.

작업반원 3명이 미루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대여섯 개 치고 있을 때 북한군 장교 2명이 느닷없이 다가와 ‘더는 가지를 치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 작업을 감독하던 남측 장교인 김문환 대위가 미군 인솔 장교인 보니파스 대위에게 통역하는 사이에 북한군 장교들은 “더 치면 죽여버린다”는 평안도 사투리로 고함치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북한군 장교 2명과 사병 30여 명이 달려들어 주먹질과 함께 구둣발로 찼다. 북한군은 나무 밑에 놓여 있던 도끼와 삽, 곡괭이 등을 집어 들고 벌 떼처럼 유엔군을 습격했다. 유엔군 수는 북한군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일대는 삽시간에 피바다가 됐다. 미군 장교 2명은 도끼와 몽둥이, 삽 등으로 온몸을 얻어맞아 무참하게 숨졌다.

북한군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도망쳤다. 숨진 미군은 현장 개펄에서 피투성이로 버려진 채 발견됐다. 남측 유엔군 제3초소는 완전히 망가졌다.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가 피살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북한의 비협조로 현장 검증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 32년이 지난 공동경비구역의 미루나무와 박 씨가 피격당한 금강산 해변이 자꾸만 교차된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