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시민강좌’ 역사 속 한국인의 해외견문록 10選

  • 입력 2008년 3월 3일 03시 00분


15세기 조선 초 문신 신숙주의 눈에 비친 일본인은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을 좋아하는데, 잘 어루만져 주면 예의를 차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노략질을 일삼는’ 사람들이었다. 19세기 말 조선의 개항 이후 일본을 방문한 학자 어윤중은 문물이 앞섰고 국민국가가 이미 형성되고 있는 일본을 보며 조선의 근대화를 고민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세계화’를 앞서 경험하고 실천한 선조들의 생각과 행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구 성과가 나왔다. 반년간 역사학 대중잡지 ‘한국사시민강좌’(일조각)가 올해 상반기 특집으로 펴낸 ‘역사상 한국인의 해외 견문록’.

10개 견문록을 선정하고 각각에 대해 학자들이 평을 쓴 이 특집은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처럼 잘 알려진 기행문뿐 아니라 이승휴의 ‘빈왕록(賓王錄)’, 어윤중의 ‘수문록(隨聞錄)’ 등 다소 생소한 저술까지 포함됐다.

역사 속의 대표적 견문록을 한데 모은 것은 이례적인 기획이다. 이번 호 편집을 맡은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화두인 세계화의 역사적 뿌리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세계화의 미래를 전망해 보기 위해서”라고 기획 취지를 밝혔다.

○ 세계사에 길이 남은 견문록

우리의 해외 견문록 가운데는 세계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이 들어 있다. 신라시대 승려 혜초(704∼787)가 인도의 다섯 천축국뿐 아니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이란에 해당하는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둘러본 뒤 기록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세계적 견문록으로 꼽힌다. 곽승훈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객원연구원은 “8세기 인도의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가치가 높은 저술”로 평가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文臣) 최부(1454∼1504)는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한 끝에 중국 남쪽의 어느 바닷가에 도착했다. 본국으로 송환되기까지 그는 중국의 남북을 육로와 대운하로 종단하면서 기나긴 여행을 했다. 140여 일간 중국에 머물며 경험한 중국의 선진 문물에 대해 성종에게 보고하려고 작성한 게 ‘표해록(漂海錄)’. 중국 베이징대 거전자(葛振家) 교수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중국 여행기로 꼽았다.

○ 국제 정세 파악에 앞장섰던 그들

‘빈왕록(賓王錄)’은 고려시대 이승휴(1224∼1300)가 중국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쓴 시문집. 그는 단군신화가 실린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한 역사가다. 변동명 전남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부교수는 “원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동아시아 질서에 적극 가담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게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15세기 최고의 일본 전문가였던 신숙주(1417∼1475)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 그가 관찰한 일본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견문록을 넘어 일본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 실무용 지침서 수준이라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강항(1567∼1618)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2년 8개월 만에 귀국한 인물. 그는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후사를 위해 일본의 정세를 탐색했고 귀국 후 일본의 지리와 정치 제도 등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조정에 보고했다. ‘간양록(看羊錄)’은 그런 목적으로 쓴 저술 가운데 하나다.

○ 세계에서 조국 근대화 방법을 찾다

어윤중(1848∼1896)은 1881년 고종의 파견으로 일본에 간 ‘신사유람단’의 일원.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시찰단 대다수가 유교라는 사상 체계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어윤중은 군계일학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개화사상에 일찍 눈뜬 그는 일본을 시찰하는 동안 조선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면서 참고가 되는 글을 틈틈이 메모했다. 그 메모첩이 ‘수문록’이다.

민영환(1861∼1905)은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러 가고 오는 길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을 둘러봤다. 그때 보고 들은 것을 담은 책이 ‘해천추범(海天秋帆)’으로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세계 일주기일 뿐 아니라 조선 근대화를 위해 서양 문물을 면밀히 살핀 민영환의 고민이 잘 담겨 있는 기록이다.

편집자인 유 교수는 “우리 선조들은 기회만 있으면 한반도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외국을 탐방하고 우리보다 우수한 문물을 골라 섭취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들 해외 견문록에 미래를 향한 길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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