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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5월 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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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 날이면 별 뜻 없이 교정에 내걸리는 만국기. 하지만 4일 전남 곡성군 석곡(石谷)면 석곡초등학교에 걸린 만국기는 의미가 다르게 와 닿는다.
이날 이 학교에서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앞두고 학교 측이 마련한 한마당 축제가 열렸다. 축제 이름은 ‘돌실가족 봄철 대운동회’.
인구가 3000명이 조금 넘는 석곡면에는 외국에서 시집와 결혼이민자 가정을 꾸린 여성이 14명 있다. 이들 중 석곡초등학교 학부모는 6명. 전교생이 214명인 이 학교에는 이들 자녀 10명이 다니고 있다.
○ 마음을 연 필리핀 엄마
바쁜 농사일을 제쳐놓고 나온 학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달렸다. 교정은 아이들의 함성과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넘쳐났다.
이날 운동회는 선경(8) 양에게 최고 어린이날 선물이 됐다.
9년 전 필리핀에서 시집온 엄마 리아 리오리시오(30) 씨. 1남 2녀를 둔 리아 씨는 이 학교 1학년 1반 학부모. 선경 양은 이날 처음으로 엄마가 다른 학부모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봤다.
리아 씨는 선경 양이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학교를 오갔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탓에 다른 학부모들과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최선동(53) 담임교사가 리아 씨의 손을 끌었다.
리아 씨는 선경 양과 함께 50m 경주를 한 뒤 콩주머니를 던져 바구니에 집어넣는 ‘배가 고파요’ 게임에도 나섰다.
1학년 학부모만 참가하는 줄다리기에선 난생 처음 줄을 잡고 자모들과 ‘영차 영차’ 소리를 질렀다. 학부모와 교직원이 조를 이뤄 공을 굴리는 경기에서는 상으로 바구니를 탔다.
리아 씨는 “처음 와 보는 운동회라 낯설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며 “그동안 국제결혼 주부로 소외감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학부모들과 웃고 떠들면서 한마음이 된 것 같다”고 웃었다.
선경 양은 “엄마와 함께 달리는 경기에서 3등밖에 못해 아쉽지만 하루 종일 엄마와 함께 뛰어놀아 너무 즐거웠다”고 말했다. 선경 양은 이날 엄마가 자랑스러운 듯 하루 종일 엄마의 손을 놓지 않고 함께 다녔다. 어깨도 저절로 펴졌다.
결혼 12년째인 일본인 주부 아이타 야요이(41) 씨는 몸이 불편한 시어머니 손을 잡고 왔다.
2, 3학년 자매를 둔 그는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을 디지털카메라에 담느라 바빴다.
○ 국어사전을 선물로 준 까닭
점심시간에 결혼이민자 가정 아이들과 엄마들은 나무그늘에 돗자리를 펼쳐 놓고 다른 학부모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농협판매장에서 일하는 1학년 학부모인 필리핀인 에밀린다 차우(46) 씨는 “조합장님이 특별히 배려해 줘 근무시간인데도 운동회에 나왔다”며 좋아했다.
에밀린다 씨는 지난해까지 이 학교에서 방과 후 특기적성 영어보조교사로 활동해 운동회 풍경이 낯설지 않다.
그는 “동네사람들이 내가 만든 김밥이 예쁘지 않다며 ‘아직도 한국사람 되려면 멀었다’고 핀잔을 줬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 줘서 기분이 좋다”며 웃었다.
에밀린다 씨는 이제 한국인 이웃들의 어떤 농담이든 척척 받아넘길 정도로 넉살이 좋다. 폐회식에서 학교 측은 결혼이민자 가정 학부모들을 위한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김관중(62) 교장은 이들 학부모에게 ‘온누리에 빛나는 다문화’라고 씌어진 선물을 전달했다.
김 교장은 “이국땅에서 건너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하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 주신 분들”이라고 소개한 뒤 “그 고마움의 표시로 우리말을 사랑하고 더 잘할 수 있도록 국어사전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선물을 받아든 에밀린다 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들과 마음껏 뛰놀았던 운동회가 좋은 추억거리로 남을 것 같다”며 “우리 아이들을 잘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곡성=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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