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나의 점심시간은 소중하다”

  • 입력 2007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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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청정원 마케팅팀 직원들은 각종 국물을 연구하면서 요리와 시식, 팀워크 다지기 등 1석 3조의 알찬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에게 점심은 즐겁고 맛있는 시간이다. 원대연 기자
대상 청정원 마케팅팀 직원들은 각종 국물을 연구하면서 요리와 시식, 팀워크 다지기 등 1석 3조의 알찬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에게 점심은 즐겁고 맛있는 시간이다. 원대연 기자
뿌듯한 여유 VS 풋풋한 활력

“‘나의 점심’은 바이올린 소리다. 점심, 그 짧은 시간에 바이올린을 켜면서 문화적 포만감과 다이어트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고 있다.”

YBM 시사닷컴의 정연주(30) 대리는 지난해 5월부터 점심시간을 이용해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 사무실 근처에서 개인 레슨을 받는다. 점심은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해결한다. 업무 성격상 야근이 많기 때문에 점심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 바이올린을 배우기 전에는 헬스와 요가 프로그램을 수강했다. 그는 “7월 어머니 생신에 맞춰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연주한 곡을 연습하고 있다”며 “남자 친구에게 ‘둘만의 연주회’를 갖자고 해 쉴 틈이 없다”고 말했다.

“점심은 나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는 시간이다. 맛있는 음식과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지인들 사이에서 미식가로 통하는 서울무비웍스 주종휘 상무(46)의 말이다. 그는 한식, 양식, 일식 등 다양한 메뉴를 갖춘 맛집 30여 곳의 리스트를 갖고 있다. 점심은 출근을 서두르느라, 또는 전날 밤의 술자리 여파로 아침식사를 제대로 못 챙기는 자신의 몸을 위해 타협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강조한다.

‘점심시간의 재발견’의 저자인 미트라스 컨설팅 정해윤 대표는 “아침형 인간은 사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므로 블루 오션보다는 레드 오션에 가깝다”며 “그동안 하찮게 흘려보낸 점심이야말로 새로운 블루 오션”이라고 주장한다.

1시간 남짓 되는 짧은 점심시간을 쪼개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이른바 ‘점심형’ 인간이 늘고 있다.

온라인 취업사이트 ‘사람인’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은 2명 중 1명 꼴(53.4%)로 “점심형 인간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이유는 △자기만족(33.3%)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22.7%)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18.6%) △건강을 위해(12.1%)의 순이었다.

하지만 점심형 인간에 대한 꿈과 현실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다. 실제로 ‘어떻게 점심시간을 활용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인터넷 서핑’ ‘동료와의 대화’ ‘낮잠’ ‘은행 등 미뤄졌던 볼일 보기’가 다수를 차지했다. 운동(5.6%)과 공부(2%) 등 적극적인 형태는 소수에 불과했다.

당신은 아침형인가, 점심형인가, 아니면 둘 다 아닌가. 최근 직장인 사이에 불고 있는 점심형 인간 열풍과 그 허실을 짚어본다.

○ 점심, 일상의 블루 오션?

백화점의 낮 강좌와 스포츠센터, 학원 등에서 점심의 자투리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직장인은 의외로 많다.

JW메리어트호텔 김지은 홍보실장(37)도 식사와 휴식이라는 고전적인 점심 활용법에 만족하지 못하는 유형에 속한다. 요즘은 1주일에 3회 정도 점심시간마다 일본과 인도네시아, 한국 등 다양한 국적의 직원들이 모여 일본어를 공부한다. 김 실장은 대개 5, 6개월을 주기로 외국어, 헬스, 요가, 피부 마사지 등 관심 분야를 바꿨다.

“오전에 힘든 일을 끝낸 뒤 오후에도 복잡한 비즈니스가 예정돼 있으면 1시간짜리 퀵 마사지나 네일 케어를 받는다. 배는 약간 고프지만 머릿속은 더 맑아진다. 새로운 것을 체험하거나 자신에게 100% 투자한다는 즐거움이 크다. 누가 뭐래도 나의 점심은 화려하다.”

‘올빼미 형’이었던 YBM 시사닷컴의 이충주(28) 씨는 점심형 인간의 즐거움을 배워 가고 있다. 이전에는 음반사 소속으로 ‘신승훈 밴드’의 녹음과 믹싱을 담당하면서 오전 2시가 넘어서야 일을 끝냈다. 다른 사람의 점심시간에 첫 끼니를 대하기 일쑤였다.

9개월 전 YBM으로 옮긴 그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점심시간이 갖는 가치에 새롭게 눈을 뜨고 있다. 점심을 간단하게 때운 뒤 여러 음악을 섞어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디제잉’ 작업을 한다. 업무와 약간의 관련성은 있지만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만족감이다.

하루가 즐겁다! 점심형 인간 업무도 즐겁다!

○ 점심족(族)의 진화

요즘 점심족의 라이프스타일은 다양하다.

외국어 배우기나 운동은 초보적인 형태다. 진화된 점심족들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취미를 살리고 즐긴다.

Fnc코오롱 쿠아의 허원석 대리는 지난해 4월 할리데이비슨을 구입했다. 주말이면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오토바이를 모는 그는 점심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매주 두 차례 ‘애마’를 끌고 출근한다. 회사 근처 서울랜드 산책로를 시속 80km로 달리면 그걸로 스트레스는 끝이다.

그는 “20∼30분 코스를 정해 꽃들 사이를 질주하며 에너지를 충전한다”며 “할리의 엔진 소리는 말발굽 소리다. 오토바이를 모는 게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점심형 인간의 등장을 사회적 배경에서 찾고 있다. 건국대 의대 하지현(신경정신과) 교수는 “아침형 또는 저녁형 인간이 수면주기 같은 의학적 근거에 뒷받침되고 있는 반면 점심형은 과학적 개념은 아니다”며 “경쟁에 시달리는 탓에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한 요즘 직장인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모레퍼시픽의 브랜드매니저인 박정민 과장이 선택한 ‘점심 메뉴’는 권투다.

“회사 일이라는 게 사이클이 있잖아요. 오전에 ‘겁나게’ 스트레스 받고, 점심 먹고 나면 또 오후 스트레스…. 점심에 권투를 하면 오전 스트레스가 다 풀리고 오후를 견뎌낼 힘을 얻어요.”

그는 1년째 매일 점심시간을 회사 근처 서울 용산의 풍산체육관에서 보낸다. 박 과장은 “스트레스를 술로 풀다 보니 입사 후 4년 동안 10kg이나 쪘다”며 “권투를 시작한 뒤로는 몸이 가뿐해지고 자연스러운 근육도 생겼다”고 소개했다.

이 회사의 점심시간은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박 과장은 12시 50분까지 권투를 하고 10분 동안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당연히 혼자 먹는 날이 많다.

“두 가지를 다 가질 순 없죠. 동료들과는 매일 사무실에서 보니까 점심시간은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겁니다.”

○ 칼로리를 줄이는 점심 모임 유행

17일 오전 11시 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한국과학기술원(KAIST). 30여 명의 교수가 샌드위치나 간단한 도시락을 지참하고 계단식 강의실에 모였다. 이 학교의 경영대는 매월 셋째 화요일 점심마다 ‘브라운 백 런치 미팅’을 갖는다. 갈색 종이봉투에 든 샌드위치 등 가벼운 점심을 들며 토론이나 세미나를 하는 모임이다.

점심형 인간의 열풍에서 흥미로운 것은 집단적 움직임이다. 식사 열량을 줄이는 대신 문화와 일을 자연스럽게 접목시키는 모임이 늘고 있는 것. 이재규 학장은 “딱딱한 회의나 공식적인 자리보다 브라운 백 모임을 가질 때 아이디어도 많고 토론도 잘된다”며 “아무래도 캐주얼한 분위기가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상 청정원 마케팅팀도 2월부터 점심시간마다 요리와 연구를 함께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주 3회 이상 점심시간에 제품 개발을 위해 다양한 소스로 음식을 만들면서 아이디어를 교환한다.

“팀원이 함께 요리하고 나중에 식사를 같이하면서 훨씬 친밀해졌다.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누구랑은 밥숟가락도 함께 들기 싫다는 말은 상상할 수도 없다.”(김경미 대리)

○ 점심형 인간의 허와 실

점심형 인간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어떨까.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최석호(여가경영) 교수는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여가의 트렌드는 ‘더 느리게’와 ‘더 빠르게’로 나뉜다”며 “아침과 저녁은 물론 과거 버려진다고 생각했던 점심의 짧은 시간조차 활용해야 한다는 것은 최근 세태의 반영”이라고 말했다. 휴식을 위해 적당하게 버려지는 시간이 있어야 여가생활의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육체적인 면에서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이노클리닉 정재우 원장은 “정상인의 경우 한끼 평균 30분 이상의 식사 시간이 필요하다”며 “지나치게 식사 시간이 짧으면 위와 장에 부담을 주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점심 프로그램으로 운동을 선택했다면 식사는 나중에 하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하지현 교수는 “점심형 인간이 되려고 하는 욕구의 출발점은 조직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며 “목표나 성과지향적인 프로그램보다는 혼자 하면서 자신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주는 것을 골라야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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