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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21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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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여성들 한시짓기 놀이책 ‘규방미담’ 발견
이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이종묵 교수가 문헌을 바탕으로 상상한 조선 후기 규방의 풍경이다. 당시 여성들이 한글 소설 속에 포함된 한자 ‘퍼즐’을 활용해 한시를 짓는 ‘고품격 놀이’를 즐겼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책이 처음 발견됐다.
이 교수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동아시아도서관에서 발견한 ‘규방미담(閨房美談)’을 분석한 결과 이 책이 한글 소설 속의 선기도(璇璣圖·한시를 이루는 한자들을 원이나 사각형으로 배치한 시(詩)그림)의 한자를 바탕으로 한시를 짓는 일종의 ‘게임북’으로 확인됐다고 20일 밝혔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이처럼 책을 활용해 한시 짓기 놀이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규방미담은 송사노창이 지은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작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이 책은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판사를 지낸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가 일본으로 유출했던 것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사들였다. 이 교수는 “종이와 필체가 19세기 것이고 책에 ‘丁卯(정묘)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1867년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책 속에서 한시 짓기 놀이가 포함된 한글 소설은 ‘종백희전’이란 필사본 작품이다. 종백희전은 중국 명나라 때 종백희가 과거에 급제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소설 군데군데 한시퍼즐(시그림)이 수록돼 있으며 그 다음 장에 퍼즐의 답에 해당하는 한시와 한글 번역이 실려 있다.
그중 한 편을 살펴보면 종백희가 두 부인과 첩에게 연정을 전하는 대목에 퍼즐이 실려 있다. 팔각형으로 배치된 한자 중 아랫변에 놓인 별(別)자부터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읽으면 ‘別君思轉轉 懷舊읍愁新(별군사전전 회구읍수신·당신과 헤어져 그리움에 뒤척이는데/옛일을 생각하니 새 시름이 인다오)’로 시작해 ‘月照空樓上 詩成獨愴神(월조공루상 시성독창신·달이 빈 누각을 비추는데/시가 이뤄지자 홀로 마음이 상한다오)’로 끝나는 시가 된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시를 반대 방향으로 읽어도 ‘神愴獨成詩 上樓空照月(신창독성시 상루공조월·마음이 서글퍼 홀로 시를 지으려/누각에 오르니 부질없이 달만 비치네)’로 시작해 ‘新愁읍舊懷 轉轉思君別(신수읍구회 전전사군별·새로운 시름 일어 옛적이 그리우니/뒤척이며 당신과의 이별을 생각한다오)’로 끝나는 또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이다.
![]()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화가 윤덕희가 그린 책 읽는 여인의 일부. 사진 제공 서울대박물관 |
‘임의 눈물 푸른 적삼을 적시고/첩의 눈물 붉은 뺨에 흐르네요…임은 환한 밝은 달이 되고/첩은 높은 하늘 별이 되어/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기울어지며/하늘이 훤할 때까지 이리저리 떠돌겠지요.’
또한 이 책에는 한자로 된 숫자에다 일일이 한글 자음을 대응시켜 뜻을 전하는 일종의 암호문인 ‘당언문(唐諺文)’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예컨대 ‘일(一)’은 ‘ㄱ’, ‘이(二)’는 ‘ㄴ’을 뜻한다. 규방미담은 당언문으로 한시퍼즐의 제목을 암호화했는데 당언문이 실제 사용된 사례가 발견된 것도 처음이다.
이 교수는 “규방미담은 당시 여성에게 교양과 파적(破寂·심심풀이)을 함께 제공한 놀이용 책”이라며 “규방 여성들의 놀이 수요에 맞춰 편찬한 책으로 조선 후기 여성들이 시그림을 만들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며 즐겼음을 보여 주는 첫 실물 자료”라고 말했다.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여성의 한글 문집이 발견된 적은 있지만 한글 소설의 형식을 빌려 한시를 ‘시각적’ 게임으로 즐기도록 만든 책은 처음 본다”며 “19세기 여성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사료”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규방미담을 분석한 연구 논문을 22일경 발간될 한국학 계간지 ‘문헌과해석’ 겨울호(37호)를 통해 발표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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