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씨가 수능치른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 입력 2006년 11월 24일 10시 59분


코멘트
사랑하는 조카 나영에게

나영아, 그동안 시험 공부하느라 정말 애썼다. 수능 치른 날, 시험 잘 봤냐고 물으니까 넌 이렇게 말했지. "나 오늘 답안지 안 맞추어 볼꺼야. 하루 밤만이라도 편히 자고 싶어!"

그래, 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렴. 일단 큰일을 무사히 끝냈으니까.

이모가 고 3때도 잠 한번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었어.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전, 후기 대학에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단다.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다고 좌절하며 몇 달 동안 네 외할머니 속을 얼마나 썩혀드렸는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수험생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못살게 굴면서 자기 스트레스를 푸는가보다. 너도 고3 내내 식구들에게 짜증부린 것 미안하다고 했지? 미안하긴. 머릿속이 압력밥솥처럼 안팎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꽉 차있데 그마저 못했다면 아마 터져버리고 말았을 거야. 너희들을 가마솥 같은 교육제도에 집어넣고 푹푹 삶아 댄 어른들이 오히려 미안해.

나영아, 곧 정시 원서 써야한다지?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과에 갈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만약 선택해야 한다면 이모는 네가 대학 이름보다는 원하는 전공을 택했으면 좋겠어. 나는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능력의 최대치가 나오고 행복의 최대치를 누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거든.

이모 고3 때는 본인의 적성과 관심과는 상관없이 담임선생님이 가라는 대학에 가야했단다. 철저히 간판위주였지.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그때는 그랬어.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 대학에 떨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아니었으면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를 했을 거고 지금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수 없었을 테니 말이야.

세상에는 '적당히 맞추어 살면 되지' 라는 말은 없는 것 같아. 낙타는 사막에서 호랑이는 숲에서 살아야지 제 타고난 기질과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거 아니겠니? 물론 호랑이가 사막에서도 살수야 있지만 늘 맥을 못추며 남보다 못났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할게 뻔하잖아. 그치? 숲에 있었다면 천하를 호령할 동물의 왕이 말이야.

그러니 이모는 나영이가 사막의 낙타, 숲 속의 호랑이로 제자리를 찾아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가 신나서 하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뜨겁고 풍요롭게 살았으면 정말 좋겠다.

하여간 나영아, 아직 기말고사 등이 남았지만 수능 전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을테니 당분간 실컷 자고, 실컷 수다 떨고 영화나 책도 실컷 보려무나. 그러려면 용돈이 필요하다고? 알았어. 5만원 줄께. 됐지? ㅋㅋㅋ. 그리고 논술 때문에 책을 참고서처럼 분석하고 외워야했던 너에게 책읽는 본연의 즐거움을 주면서도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책 다섯 권을 골라보았다.

언제나 네가 보고 싶은 막내 이모가.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