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 기획]해방둥이 작가 최인호의 ‘나의 60년’

  • 입력 2005년 8월 9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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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생 해방둥이 작가 최인호 씨. 환갑의 나이지만 아직도 하루에 원고지 30장 이상을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집필실 앞에서 만난 최 씨는 건강한 몸을 물려준 부모님과 한글로 글을 쓰게 해 준 광복에 대해 지금도 매일 감사하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원대연 기자
을유년생 해방둥이 작가 최인호 씨. 환갑의 나이지만 아직도 하루에 원고지 30장 이상을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집필실 앞에서 만난 최 씨는 건강한 몸을 물려준 부모님과 한글로 글을 쓰게 해 준 광복에 대해 지금도 매일 감사하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원대연 기자
1

미라보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아로새겨라.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법.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 아폴리네르

2

엄마가 날 배고 여름 한철에 임신중독증에 걸려 입에 거품을 물고 다 죽을 뻔하셨다는데 바로 그해 여름에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광복이 되었으니 나야말로 배냇광복둥이다. 이북에서 남하하는 외삼촌을 따라 엄마는 필사적으로 만삭의 몸을 이끌고 지게를 거꾸로 타고 38선을 내려 왔다는구나. 해방된 뒤 2달 만에 태어났으니 나야말로 운명적으로 해방둥이다. 조금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하마터면 창씨 개명하여 내 이름은 하나무라(花村仁浩)가 될 뻔하였지. 신생 대한민국에서 한글사관학교 1기생으로 태어났으니, 나야말로 대한민국의 나이테로구나. 대한민국의 연륜(年輪)이로구나. 한강다리 아래로 한강은 흐르고 우리의 인생도 흘러내린다.

3

여섯 살 무렵에 참혹한 전쟁이 일어났지.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민주주의.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젖어서 형이 동생을 죽이고, 오빠가 누이동생의 가슴에 따발총을 쏘아 피를 흘리게 하였구나. 안심하세요, 국민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철수하지 않습니다. 철떡 같이 믿던 라디오방송 때문에 서울에 머물러 있던 우리는 어느 날 한강다리가 와르르르 무너지는 폭음을 들었지. 아버지를 찾아 나룻배를 타고 청계산을 향해 가던 옥양목 같이 눈부신 잠실벌에는 폭격에 맞은 누에들이 새하얗게 죽어 있었지. 아아, 폭파된 한강다리 아래로 한강은 흘러내리고.

4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라고 놀려대던 부산아이들과 싸우며 바닷가 피난 국민학교에서 나는 가갸거겨를 배웠다. 교과서 뒷장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키자'는 우리의 맹세가 실려 있었어. 서울 가는 12열차에 길에 앉은 젊은 나그네. 잘 있어요 잘 가세요 이별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이북에 할머니와 형제를 모두 두고 와 외롭고 슬퍼 술만 마시던 변호사 아버지는 환도 후 어느 날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다. 국민학교 3학년 때였지. 아버지의 관을 부여잡고 엄마는 류관순 누나처럼 이를 악물고 맹세하였어. 영감 안심하슈. 아이들을 내가 모두 훌륭하게 키우겠소. 엄마는 방을 나누어 하숙을 쳤다.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하숙을 옮기겠다는 학생의 밥상에 엄마는 계란부침을 '와이로'로 갖다 바치고. 이제야 고백하지만 집 뒤에 살고 있던 양키와 살던 양색시 아줌마를 짝사랑하기 시작했었어. 복구된 한강다리 아래로 한강은 흐르고 사랑도 흘러간다. 이 물결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5

중학교 들어가자 4.19가 일어났어. 해마다 생일이면 만수무강을 빌던 우리 대통령 할아버지가 쫓겨났다는 거야. 파고다 공원에 세워졌던 할아버지 동상이 종로 네거리에 질질 끌려 다니고, 학교 뒤 아카시아 숲에서 나는 바지를 내리고 사타구니에 난 음모를 발견했지. 그때 난 합창단에서 쫓겨났어. 감기가 걸려 목이 쉬었어요. 곧 나을 거예요. 내가 그랬더니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넌 목이 쉰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 거야. 아리랑잡지에 난 도금봉의 사진을 보면 나는 숨이 가쁘곤 했었지. 고등학교에 올라간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탱크를 보았어. 그리고 해 없는 날에도 색안경을 낀 까무잡잡한 군인하나가 웃지 않는 심각한 얼굴로 혁명공약을 방송하는 것을 나는 보았어. 한강다리 아래로 한강은 흐르고. 영원의 눈길에 한 지친 물살이 저렇듯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6

하나 남은 건너 방을 전세로 주고받은 보증금으로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10년 동안 데모 때문에 한 학기를 제대로 마친 적이 없었어. 군대로 간 내 친구는 월남에서 다리를 하나 잃었어.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이제사 돌아왔네. 주머니에는 낙타 눈깔 하나씩을 숨겨오고, 나는 김신조 아저씨 때문에 6개월 연장된 42개월의 공군 졸병노릇으로 군복무를 마쳤지. 그때 난 클래스메이트였던 황정숙과 심각한 연애에 빠졌어. 만나고 헤어지는 게 환장하게 싫어서 결혼하겠습니다하고 선언했더니 놀란 엄마의 틀니가 홀랑 빠지더군. 황순원 선생님은 주례사로 이렇게 말했었어. 서로 노력하고 검은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열심히 잘 살아라. 목욕탕 2층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지. 그 가스 사형실 같은 방에 엎드려서 날마다 글만 썼어. '타인의 방'을 쓰니깐 김장배추 10포기를 살 수 있었어. 제2한강교 아래로 한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어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 희망이란 왜 이리도 격렬한가.

7

웃지 않는 아저씨는 절대로 웃지 않으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절대로 웃지 않으며 유신을 선포했지. 나는 그때 첫딸 다혜를 낳았어. 세브란스병원 복도에서 다혜 얼굴을 보고 난 맹세했지. 내가 너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나는 개새끼다. 난 반드시 부자아빠가 되어 너를 보란 듯이 키우겠다. 그 무렵 신문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검열관이 퇴폐적인 소설이라고 반 이상 잘라버렸어. 시인 김지하 때문에 남산정보부에 끌려갔는데 나올 때는 들어왔었다는 얘기를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쓰고 나왔지. 각서를 쓰고 나온 명동에는 네온의 불빛이 황홀했어. 나는 울면서 명동 지하도를 건넜었지. 엉엉엉엉 울면서, 통곡하면서.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 사랑을 싣고서 흘러만 갑니다. 그 무렵 시청 앞 네거리에는 이런 광고탑이 세워졌었지. 마침내 1억불 수출달성.

8

권력은 오래 잡으면 종말이 오는 법. 웃지 않는 대통령은 시바스 리갈을 마시며 심수봉의 노래를 듣다가 총에 맞고 돌아갔어. 각하, 정신 차리십시오. 이 버러지 같은 놈, 선배 형님들에게 배운 수법 그대로, 그래서 그것이 죄가 되는지 모르는 신군부 막내 아저씨들이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어. 그리고 광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났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꽃잎처럼 붉은 피를 흘리며 울밑에선 봉선화처럼 죽어뻔진 내 누이여. 미안하고 미안하구나. 창밖에는 잠수교가 보인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네 사랑은 오지도 않는데 잠수교 아래로 한강은 흘러내린다.

9

난 믿었어. 영삼이 아저씨와 DJ 아저씨를. 그들이 독재자 밑에서 죽음을 각오한 단식과 저항을 통해 민주주의와 자유를 쟁취하고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 받았으므로 적어도 그들이 부패하지는 않을 줄 알았어. 적어도 그들이 도청과 같은 치사한 일은 하지 않을 줄 알았어. 적어도 그들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니까 아들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엄격하게 훈계할 줄 알았어. 적어도 굶주렸던 자기 똘마니들에게 벼슬을 나눠주는 치사한 짓들은 하지 않을 줄 알았어. 적어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벽이 무너질 줄 알았어.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못된 며느리가 태어났다던가. 적어도 5년의 권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는 한순간의 물거품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는 줄만 알았어. 아아, 올림픽대교 아래로 한강은 흘러내린다.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법.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10

해방둥이인 나는 올해 환갑이 되었어. 그러고 보면 신생 대한민국도 올해 환갑의 나이. 그러나 해방은 왔지만 광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생 대한민국은 환갑이 되어 60세가 되었으나 아직도 우리민족은 머리 따로 몸뚱이 따로 잘려진 반병신의 분단국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자, 엄마야 누나야 아들아 새로 생긴 며늘아기야. 그리고 사랑하는 손녀 정원아. 내 아가야 다함께 나오너라. 그리고 달마중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오마니 등에 업고 늙은이 내 손잡고 우리애기 앞세우고 그토록 아름답던 우리 민족의 예(禮), 효(孝), 의(義)와 경(敬)이 우거졌던 숲으로 가자 '동방예의지국'의 그 찬란했던 유림(儒林)의 숲으로 가자.

와르르르 무너진 성수대교 아래로 한강은 흐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보면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을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저렇듯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일어나라, 조선의 민족이여. 영원을 향해 종을 울려라. 아침 햇살처럼 밝아오는 조선의 광명천지를 향해 심봉사처럼 휘벌떡 눈을 떠라. 이제야말로 그러할 때가 되었으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라.

■고2때 등단…최근 유교소설 ‘유림 펴내’

1945년 10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했으며 최근작 ‘유림’을 비롯해 ‘해신’ ‘상도’ ‘길 없는 길’ ‘왕도의 비밀’ ‘지구인’ ‘겨울 나그네’ ‘내 마음의 풍차’ 등 숱한 작품을 써왔다. 1975년부터 월간 ‘샘터’에 ‘가족’을 연재하고 있으며,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이상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대종상(각본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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