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국적법 학계 시각은…열린세계 역행? 분단국가 운명?

  • 입력 2005년 6월 13일 03시 09분


“국가는 아주 가끔씩 지나가는 대상(隊商·노마드) 행렬을 붙잡기 위해 서로 싸움을 벌이는 오아시스가 될 것이다.”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 씨의 최신작 ‘호모 노마드’에 나오는 미래 국가의 모습이다. 호모 노마드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적 삶을 사는 인류를 뜻한다.

세계화로 인해 이미 한 해 세계 인구의 6분의 1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면서 호모 노마드는 급증하는 추세다. 이에 따라 국적은 생래적인 것에서 점점 선택사항이 될 것이고 여러 국적을 지닌 다국적자들이 급증할 것이란 게 아탈리 씨의 예측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예측을 거꾸로 거슬러 가고 있다. 한국에서 국적은 신성한 것이다. 새 국적법의 발효를 앞두고 한국 국적을 포기한 2032명은 ‘건너지 말았어야 할 강’을 건넌 사람들로 낙인이 찍혔다. 물론 그들 중 98.6%가 남자이고, 73%는 15세 이하라는 점은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기 위해 국적을 포기했다는 도덕적 비난을 사기에 충분하다.


개정 국적법은 이중국적자 중 이민자의 자녀를 제외하고는 병역을 마친 후에야 한국 국적을 포기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전에는 이중국적을 유지하다가 18세 전에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는 한국 국적으로 태어난 이상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전에는 한국 국적을 포기할 수 없다. 개정 국적법에 대한 학계의 상반된 시각을 통해 우리 시대 국적과 민족의 상관관계를 짚어 본다.

▽“특수성을 교정하기 위한 보편성의 이탈이다”=‘국민으로부터의 탈퇴’의 저자인 권혁범(정치학) 대전대 교수는 개정 국적법이 국적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권 교수는 “특권층이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적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국가적 목표를 위해 자유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쥐를 잡기 위해 독을 깨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박효종(정치학) 서울대 교수는 “국적법은 국가정체성을 대변하는 엄숙한 법인데 병역의 의무를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고 긍지의 대상이 돼야 할 병역을 마치 징벌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개정 국적법의 문제를 지적했다. 박 교수는 “공직 진출에 병역수행을 의무조건화해 병역을 영예롭게 만드는 방식을 놔두고 규제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라며 “또 한국 국적을 가져야만 한국의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국적만능주의 사고는 ‘닫힌 민족주의’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명섭(국제정치학) 연세대 교수는 “한국이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편성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현재 혈통으로 부여되는 국적을 한국에서 태어나는 사람에게 모두 부여하는 식으로 국적법을 확대해 가야 한다”며 국적 제한에 문제를 제기했다.

개정 국적법 발효 전 국적을 포기한 이들의 대부분이 18세 미만이라는 점은 그들의 국적 선택 자유를 부모가 결정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의 중대한 침해라는 지적도 나왔다.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갈등 상황을 반영하는 실체”=김호기(사회학) 연세대 교수는 “개정 국적법은 세계화와 민족주의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한국적 특수성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유보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세계화가 강해질수록 정치적 문화적으로는 그로 인한 불이익을 보상받으려는 민족주의가 강렬히 분출한다”면서 “분단국가로서 어쩔 수 없이 병역의무를 져야 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개정 국적법은 바로 그런 정치 문화적 뇌관을 건드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이러한 지적은 민족주의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는 동북아 3국의 특수상황과 맞물려 있다. 규범적으로는 세계시민주의의 강화와 이중국적의 확산을 낳을 수밖에 없지만 생존을 위해 민족주의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한국적 상황론이다. 그 같은 한국적 특수성은 민족주의를 넘어 통합으로 가던 유럽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유럽연합(EU) 헌법 부결사태가 발생하면서 새롭게 보편성을 획득하는 양상이다.

민족국가가 근대에 탄생한 ‘상상의 공동체’라고 불렀던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국을 방문해 “민족주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번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근대성의 민족주의적 양태를 비판해 온 문예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일본 긴키(近畿)대 교수도 최근 “오늘날 자본-민족-국가의 강고한 결합을 유지하는 것은 자본이나 국가가 야기하는 각종 모순과 갈등을 무화시키는 민족의 신앙화한 힘”이라고 분석했다.

국적을 둘러싼 이 같은 다양한 견해에 대해 최근 출간된 ‘종족과 민족-그 단일성과 보편성의 신화를 넘어서’의 책임편집을 맡은 김광억(인류학) 서울대 교수는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국가주의는 강화되지만 그것은 자국 국적을 지닌 사람을 철저히 보호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반면 한국에서는 국적 이탈자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국가주의를 지키려 한다. 일본 해군이 일본어업권을 침해한 한국 어선을 끝까지 추적하는 것과 한국 해군이 중국 어선의 한국어업권 침해에 무력하게 대응하는 양식만 비교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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