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똑똑해진 지도… 테마 담고 취향 살리고

  • 입력 2004년 9월 2일 16시 21분


건물이든 사람이든 지구상의 어느 한 좌표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전화 통화할 때 “어디십니까?”하고 묻는 습관성 질문에서부터 전 세계 3000여만명이 일상적으로 활용한다는 위성위치추적시스템(GPS)에 이르기까지 장소는 생활의 핵심이다.

휴가철을 거치면서 GPS는 자동차 길 안내 시스템기기를 지칭하는 말인 것처럼 일상화됐고, 현재 370여만명이 휴대전화 친구 찾기 기능을 사용 중이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에서는 지역정보 검색 서비스 경쟁이 치열하다. 그런가하면 올 여름 미국 코카콜라는 GPS 칩이 장착된 캔을 산 고객들의 위치를 추적해 ‘경품 벼락’을 내리는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단순한 오락을 위해, 원하는 곳에 보다 쉽게 이르기 위해, 취향을 고수하고 자신에게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하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어디?’를 묻고 답한다. 바야흐로 ‘내비게이션 (Navigation) 시대’다.

그림지도를 그리는 지오마케팅 디자이너들. 이들은 자를 사용하지 않고 모든 길과 건물을 손의 감각에만 의지해 그린다.-강병기기자

○ 복잡한 생활을 심플하게

GPS와 이동전화망을 통해 최적경로를 파악해준다는 한 이동통신회사의 길 찾기 서비스에만 의지한 채 모르는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휴대전화와 연결한 단말기를 차에 단 뒤 무작정 ‘서울 은평구’와 ‘우체국’을 입력하니 우체국 8곳의 주소가 뜬다. 이 중 연신내우체국을 선택하자 그곳까지의 길 찾기가 시작됐다. 알 듯 모를 듯한 길이다. 광화문에서 차를 출발시키자 ‘100m 앞에서 우회전’ ‘이번에 좌회전’ 등의 지시가 음성, 화면으로 나오고 내 차의 위치가 간단한 지도에 표시된다.

다음 안내가 있을 때까지 계속 직진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우회전을 했더니 단말기는 요란하게 ‘경로를 이탈했다’고 혼을 낸 뒤 다시 분주하게 길을 찾는다. 일부러 인왕아파트 뒤쪽 산기슭까지 차를 몰고 가자 단말기는 ‘누가 이기나 보자’는 듯 오던 길로 내려가라고 거꾸로 뒤집힌 큼지막한 화살표만 계속 내보낸다. 할 수 없이 유턴을 해서 아파트 갈림길로 내려오자 단말기는 다시 분주하게 ‘좌회전’ ‘직진’ ‘우회전’ 신호를 내보내기 시작한다.

종종 타이밍이 어긋나지만 꽤 정확하게 실시간으로 방향의 지시를 받다보니 공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느낀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늘 신경 쓰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단순해진다. 실제 눈에 보이는 거리의 모양보다 작은 액정 스크린의 지도에 점으로 표시된 위치에 더 신뢰가 간다. 이정표를 볼 필요도 없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기억에 남는 공간은 출발지와 도착지뿐이었다.

점점 복잡해지는 여정을 단순화시켜 주는 기능 때문일까. 지도가 나오는 PDA형 내비게이션 단말기는 65만∼200만원대로 싼 편이 아닌데도 수요가 느는 추세다. 내비게이션 전문업체인 팅크웨어 경영기획실 김형주 팀장은 “불황인데도 내비게이션 기기에 대한 수요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0%가량 늘었다”고 한다. SK텔레콤의 텔레매틱스 서비스인 네이트 드라이브의 사용자도 지난달 말 14만명을 넘었다.

GPS를 이용한 위치 찾기는 사생활을 침해하는 독이 되기도 하지만 그 쓰임새가 무한정하다. 현재 8000여명이 사용 중인 에스원의 ‘애니가드’는 소형 GPS단말기를 이용한 위치추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안전을 방어하는 서비스. 지난달 31일 밤12시 무렵에는 서울 강남에서 실종된 어린이를 위치추적을 통해 찾아내는 ‘개가’를 거두기도 했다.

○ 검색어 하나로 올 가이드

지도를 상품화한 '큐빅퍼즐'

‘내비게이션 시대’에 사람들이 찾는 것은 위치 정보뿐만이 아니다. 장소에 대한 취향까지 남에게 물어보고 검색할 수 있다. 차량 내비게이션 기기들도 ‘테마 박물관’ ‘전국 추천 맛집’ 등의 검색기능을 추가하면서 점점 ‘똑똑’해져 가고 있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에서는 이용자의 만족도 평가까지 반영한 검색 서비스가 하반기 최대 격전지가 될 전망이다.

7월 시작된 야후 코리아의 ‘거기’서비스에서 8월 말 현재 인기 검색어는 ‘강남역 근처 분위기 좋은 카페’ ‘압구정동 파마 잘하는 미용실’ 등이다. ‘압구정동 파마 잘하는 미용실’을 검색하면 압구정동의 미용실들이 지도와 함께 나오고 이용자들의 별점 평가가 함께 제공돼 ‘파마를 잘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이다. 행정구역명 없이 ‘경인미술관 근처 찻집’만 입력해도 검색이 가능하다. 이 서비스의 주간 페이지 뷰는 2500만건, 많을 땐 7000만건 가량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취향에 대한 평가가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 ‘광화문 근처 테라스가 있는 카페’를 입력해보니 광화문 근처 카페 리스트와 이용자의 별점 평가만 제공될 뿐, 테라스가 있는지 없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반면 네이버는 지역검색이 지식검색 DB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 ‘서울 종로구 세종로’를 입력하니 지식검색 DB에 있는 ‘광화문에서 데이트할 만한 코스’가 함께 불려나온다.

야후코리아 마케팅팀 박지영 과장은 “가치 평가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아직은 빈약해 형용사에 대한 본격 검색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라면서 “직접 장소를 겪어본 사용자들의 피드백, 전문가들의 평가를 데이터베이스로 축적하는 과정을 거치면 2, 3개월 뒤부터는 취향에 따라 지역정보를 검색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 이미지 시대, 그림으로 말한다

복잡한 암호가 빼곡히 들어찬 기호지도 대신 그림지도가 다시 각광받는 것도 이미지로 말하는 시대의 한 추세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인기인 입체 그림지도 ‘비틀맵’은 건물 상층의 중앙이 비어있는 종로타워 등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들의 특징적 모양을 포착한 것이 특징. 길의 방향은 맞지만 도로의 크기는 기호지도와 약간씩 다르다. 이미지 위주로 선명하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 이들은 때로 북쪽이 아래가 되게 거꾸로 그리기도 한다. 강남의 경우 한강 주변에 중요 시설물이 밀집되고 밀도가 높아 중요한 건물이 앞쪽에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강남지역 ‘비틀맵’을 들고 도산대로의 기업은행을 찾아가 보았더니 지명보다 근처 청담웨딩홀, M.net 빌딩, 로데오 주유소 등의 모양과 색깔을 따라가며 목적지를 찾는 것이 훨씬 쉬웠다.

‘비틀맵’을 만드는 지오마케팅은 1997년부터 지금까지 50여개의 지역지도와 홍익대앞 클럽들, 인사동 갤러리들, 대학로 소극장들, 민속마을 같은 테마지도를 포함해 150여개의 입체 그림지도를 제작했다. 매달 6만부의 영어, 일어판 무가 월간지도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호텔 등에 배포하고 있다.

김은영 사장은 “그림 지도의 기능은 길 찾기 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름다운 어촌마을’ 같은 주제의 지도 제작도 가능하며 지도 안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는 것.

그는 “의식주를 뛰어넘은 참살이(웰빙)에 관심을 기울이듯, 현대의 내비게이션은 위치 찾기, 길 찾기를 뛰어넘어 잘살기 위한 맞춤 정보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글=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사진=강병기기자 arch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