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강훈 선생의 나라사랑

  • 입력 2003년 11월 13일 18시 31분


12일 100세를 일기로 타계한 청뢰 이강훈(靑雷 李康勳·1903∼2003) 선생은 일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에 바친 애국 애족의 선구자였다. 선생의 꼿꼿하면서도 겸허했던 모습을 다시 대하지 못하게 된 것은 큰 슬픔이다. 일본 우익인사의 망발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돌아보면 선생은 존재 자체만으로 민족의 자긍심이었다. 꼭 한 세기에 걸친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독립운동사에 남긴 족적은 불멸의 민족혼이 되어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16세에 고향인 강원도 김화(金化)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한때 동아일보 김화 분국장을 지냈고, 훗날 중국으로 망명해 북간도와 상하이를 오가며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만주벌판의 혹한과 양쯔강의 황진(黃塵), 그리고 일제의 감방에서 40년 이상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선생은 대쪽 충절과 신의로 일관했다.

5·16쿠데타 후에는 이른바 혁신세력으로 분류돼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나라사랑의 열정은 지칠 줄 몰랐으며, 노구를 무릅쓰고 애국선열들의 넋과 위업을 기리는 일에 헌신해 왔다. ‘독립운동대사전’을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자료집을 발간한 것 또한 다시는 나라를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일념과 민족정기를 되찾기 위한 애국혼의 발로였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소중한 목숨을 나라의 제단에 바친 이들의 삶이 잊혀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이강훈 선생을 비롯한 애국선열들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 극좌와 극우를 모두 배격하면서 오직 독립정신만이 대한민국의 앞날을 밝게 하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고 확신한 선생의 깊은 뜻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선생이 한 세기에 걸쳐 실천한 외곬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나가 대한민국이 진정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은 뒤에 남겨진 우리 모두의 몫이다. 선생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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