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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22일 17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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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세자 교육/김문식, 김정호 지음/340쪽 1만4900원 김영사
원손(元孫·훗날의 정조)이 네 살 되던 해 영조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 원손을 불러 앉히고는 글을 읽고, 글자를 써보이게 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을 막힘없이 외운 원손이 ‘부모’ 두 글자까지 크게 써보이자 영조는 “하늘이 우리나라에 복을 주시려고…” 하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원손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던 여섯 살 무렵 영조는 원손의 스승 남유용을 불러 호피(虎皮) 한 벌을 내리면서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지금 경에게 이것을 주는 것은 원손을 위해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은 엄한 스승이 되라’는 뜻이다. 경을 포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다.”
●걸음마와 함께 시작되는 제왕교육

조선시대 왕실문화 전문연구자인 규장각 학예연구사 김문식씨와 조선시대 아동 인성교육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모아온 아동문학가 김정호씨가 공동집필한 이 책은 ‘어머니 배 속부터 왕으로 즉위하기 직전까지’ 조선의 왕세자들이 어떤 교육을 통해 제왕으로 길러졌는가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왕실의 일화를 풍부하게 인용해 이야기책으로 읽기에도 무난하며, 서울대 규장각과 고려대 박물관 등이 소장한 관련 도록자료들이 적절히 배치돼 사실(史實)의 시각적 이해에도 도움을 준다.
저자들이 파악한 조선 왕세자 교육의 핵심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한 조기교육이자 엘리트교육’이라는 것. 아침 점심 저녁 수업에 야간학습까지 꽉 채워져 있어 학업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도락에 빠졌다가는 양녕대군처럼 폐위를 당하고 마는 스파르타식 훈련과정이기도 했다.
교육목표는 왕세자를 강하고 지혜로운 왕으로 단련시키는 것. 해뜨기 전부터 심야까지 만 가지나 되는 일(만기·萬機·왕의 일과를 일컫는 말)을 처리해야 하는 동시에 이론을 치켜들어 왕권에 도전하는 유학자 신료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빈번히 “요임금의 덕을 알기까지는 학문을 중단하지 말라”고 왕세자와 왕에게 지적 압력을 가했다.
원자들은 늦어도 네댓 살이면 원자교육을 책임지는 보양청(輔養廳)에 들어 회당 3각(45분)씩의 수업을 받으며 ‘천자문’과 ‘소학’ 등을 공부했다. 왕세자로 책봉되고 열한 살이 넘으면 매일의 수업은 물론 매월 두세 차례 자신을 가르치는 수십명의 신하 앞에서 배운 바를 전부 외운 뒤 평가를 받는 회강(會講)도 치러내야 했다.
●부왕(父王)이 교육의 한 주체
조선왕조 왕세자 교육의 특이점은 ‘아버지 역할’이 컸다는 것. ‘딸은 어머니가, 아들은 아버지가 가르친다’는 유교이념에 따라 부왕이 교과목을 정하는 일부터 교사진 선정, 수업시간 조정에까지 개입했다. 때로 신하들과 학부모인 부왕이 교육방식을 두고 대립하는 일도 있었다.
핵심 교과목은 유교경전과 역사지만 평소 생활을 통한 덕성교육, 예체능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은 효(孝). 왕세자는 아침저녁 국왕의 수라상을 살피는 ‘시선(視膳)’과 부모의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侍湯)’을 해야 했다. 군 통수권자로서 활쏘기, 말 타기에도 일정 정도 이상의 성과를 내야 했다.
자신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도 장래 왕이 익혀야 할 중요 덕목이었다. 왕세자가 편식하거나 비만해지면 이를 관리하지 못한 내시들이 문책당해야 했다. 특히 아침을 거르면 학습 진도가 떨어진다 해서 내시들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조선조 왕세자교육 코스의 단연 우등생은 정조. 돌 지나면서부터 붓과 먹을 가지고 놀던 정조는 대개 사대부가 평생 20∼30권의 문집을 만들어낼 때 184권짜리 개인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써냈다. 정조의 성취 뒤에는, 손자를 위해 손수 ‘어제조훈(御製祖訓)’이라는 교재까지 만들며 뒷바라지했던 극성 할아버지 영조가 있었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조선조 왕실의 태교 ▼
◇합궁(合宮)
뱀날, 호랑이날, 초하루, 그믐, 보름으 피해 왕자잉태의 길일을 받았다. 한달에 하루꼴.
◇임신 3개월
왕비의 거처를 별궁으로 옮겨 본격 태교, 단것을 피하고 항상 가야금 거문고 연주를 듣는다. 동백기름, 꿀, 살구씨, 계란으로 머리와 피부를 가꾼다.
◇임신5개월
내시와 상궁이 번갈아 밤낮으로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낭독한다. 동백기름, 꿀, 살구씨, 계란으로 머리와 피부를 가꾼다.
◇임신 7개월
고기반찬을 피하고 아침 식전에 순두부를 먹는다. 콩 음식이 태아 두뇌발달에 좋다는 정성을 따른 것.
◇기타
임신한 왕비의 처소에는 십장생도(十長生圖)병풍을 친다. 왕비는 태교를 위해 십장생도 자수를 하거나 장차 태어날 아기에게 입힐 누비옷을 직접 바느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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