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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월 10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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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순 지음/383쪽/1만8000원/일신사
인류학자의 정체성을 다룬 책이다. 30여년간 미국 테네시대 교수(인류학)로 재직하다가 최근 귀국해 한국디지털대 총장이 된 저자는 1960년대 ‘한국인 인류학자의 한국에서의 현지조사’로부터 얘기를 풀어간다. 흔히 인류학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현지조사를 하면 외부에서 온 인류학자보다 유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외국어를 습득하거나 상이한 생활습관을 익힐 필요도 없고 현지인과 우호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도 적다. 그렇다고 내부인의 현지조사가 항상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1963∼64년 한국인의 법의식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도에서부터 시작해 휴전선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다니면서 표본으로 추출된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이 큰 나라는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전국 규모의 조사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표본지역으로 정해진 곳 중 어떤 곳은 자동차의 통행이 불가능해 걸어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곳도 많았다.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동장이나 이장, 면장, 군수, 심지어는 도지사의 협조를 구해야만 할 때도 있었다. 경찰의 불심검문도 종종 받았고, 소지품의 수색도 당했으며 어떤 때는 시골 지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서구에서 온 백인 인류학자였다면 시골을 다닐 때 경찰관이 그가 간첩일지 모른다고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경찰서나 지서에 데리고 가 그토록 심하게 조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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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970년 미국 조지아주의 벌목공에 관한 현지조사로 화제를 옮긴다. 그가 현지조사를 위해 처음 목재야적장에 도착했을 때 한 중년 백인 남자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나타나서는 “잽(Jap·일본인의 인종비하적 표현)이냐”고 물었다. 그가 아니라고 하자 다시 “그럼 차이나맨(Chinaman·중국인의 인종비하적 표현)이냐”고 물었다. 그가 또다시 아니라고 하자 백인 남자는 퉁명스럽게 “제기랄 그러면 넌 도대체 뭐냐”고 투덜거렸다. 백인남자는 ‘보이(Boy)’라는 표현으로 어린아이에게나 쓸 수 있는 홀대하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보이’라는 말은 소수민족계 사람들을 비하해서 쓰기도 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외부인이기 때문에 누린 이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저자는 흑백갈등이 심한 미국 남부에서 흑인도 백인도 아닌 인종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므로 흑백 두 그룹에 접근하는 데 비교적 자유로웠다. 남부인들은 외국인인 그에게는 자신들의 규칙과 관습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며 길을 물었을 때는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기도 하고 질문에 답할 때는 발음을 천천히 또박또박 해 주거나 심지어 철자까지 불러주기도 했다.
반면 어느 미국인 여성 인류학자는 자기 나라인 미시시피주에서 행한 현지조사에 대해 “내가 연구하는 지역이 내가 속한 곳과 같은 문화고 외국어를 배울 필요도 없었지만, 1930년대까지도 남부지역은 흑인과 백인의 대결구도로 공포감이 조성된 지역이었으므로 나는 그 지역사회에 맞게 처신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1972년 미국 미시시피주의 촉토 인디언에 관한 조사는 조지아주 벌목공에 관한 조사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인디언 보호구역에 사는 원주민들은 백인 인류학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네들과 생김새가 비슷한 저자는 호감을 갖고 대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외부인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한국인이었지만 한국에서 현지조사를 하면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대접을 받지 못했듯이, 만일 내 자신이 촉토 인디언이었다면 그들로부터 내가 받은 것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을지가 의심스러웠다. 우리는 생김새가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간에 아주 생소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서로의 사생활을 알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 큰 이점이었다.”
이 책은 ‘한 인류학자, 두 세계(One Anthropologist, Two Worlds):30년간 북미와 아시아에서 행한 성찰적 현지조사’라는 제목으로 작년 미국에서 출판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81년 미국 인류학회 내에 한국학회를 창설해 일그러진 한국의 모습을 바로잡는 데 기여해온 김 총장은 학문적으로도 미국 인류학계에서 저서를 가장 많이 낸 교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한국의 이산가족 자료를 집대성한 ‘Faithful Endurance’, 미국 남부에 진출한 일본기업을 다룬 ‘Japanese Industry in the American South’ 등의 저서가 있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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