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메밀 버무려 가을 빚다

  • 입력 2002년 9월 12일 16시 14분


달큰한 맛이 코로 느껴지는 메밀카스텔라 전영한 기자scoopiyh@donga.com
달큰한 맛이 코로 느껴지는 메밀카스텔라 전영한 기자scoopiyh@donga.com
잠자리에서 일어나 느끼는 아침 공기가 이제 제법 차갑다. 찌는 듯 볶는 듯 지겹게 더워서 우리를 몸부림치게 했던 여름은 그 모습조차 없어졌다. 사람들 사는 세상이 제아무리 잘났다고 소란을 떨어도 묵묵히 색을 바꾸는 계절 앞에는 맥을 못 추고…. 여름이 가을로 변해감에는 딱히 여기부터라 말할 경계선이 없다. 모날 모시로부터 가을이 되겠다는 예고 또한 없다.

'수확의 계절'이라는 가을이 왔지만 수해에 난리를 겪은 이들의 허탈 앞에는 미안함을 감출 길이 없다. 안타까움을 전하며 오늘의 밥상을 차려본다. 파란 하늘이 부쩍 높아진 '메밀꽃 필 무렵'에 말이다.

'…드팀전 장돌이를 시작한 지 20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장을 빼논 적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등의 이웃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 지방도 헤매기는 하였으나 강릉쯤에 물건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내를 돌아 다녔다.…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의 가까웠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더구나 그것이 저녁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생원은 변하지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메밀꽃 필 무렵' 중

그 나긋하고 서정적인 어투 뒤에 감춰진 날카로운 현실의 모습들은 작가 이효석 선생의 작품마다 빛을 발한다.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읊어내는 한마디 한마디는 끝이 안보이도록 하얗게 펼쳐지는 봉평의 메밀꽃밭을 눈 앞에 보는 듯 생생한 이미지로 그려낸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80리의 밤길…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 카스테라

먼저 밀가루는 메밀가루와 함께 체로 친다. 가루를 체 치는 사이 가루재료의 입자와 입자 사이에 공기가 섞여들어 완성 후 씹는 맛이 폭신해진다. 갖은 재료로 질척한 농도의 반죽을 만들고 나면 제철맞아 단물이 바짝 오른 호박도 썰어 넣어 찜통에 올린다. 김이 올라 있던 찜통에 반죽이 채워지면 둘러 놓은 면보에 쌓여 익어 가는 동안 달큰한 수증기가 온 집안에 퍼지며 '가을'이란 게 어떤 냄새였는지를 어렴풋이 기억나게 한다. 값나가는 오븐없이도 손쉽게 준비되는 빵 한조각으로 입안의 온기를 느껴보자. 참고로 카스테라는 옛날 스페인의 카스테야(Castella)마을에서 만들어진 빵의 형태다.

이국적이고도 구수한 '메밀 카스테야' 한 조각에 허생원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여복도 재복도 없는 한 사나이가 우연한 밤 달빛에 취해 들어간 방앗간에서 마주친 여인과 정을 나누게 된다. 그 밤 이후로 다시는 여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세월은 흐르는데, 떠돌던 장거리에서 만나 동행하게된 '동이'란 이름의 어린 장꾼이 생원의 아들이라는 암시를 보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정'이란 것은 얼마나 질긴 놈인가! 하룻밤 인연이었을지언정 세월에 굴러 굴러 눈덩이처럼 불어나 내 앞으로 다시 떨어지니 말이다.

●메밀차 & 메밀술

메밀을 바짝 볶아서 두었다가 한큰술씩 끓는 물에 우려 마시면 깔끔하고도 깊은 맛이다. 게다가 소화까지 돕는다. 밥이라도 한술 말아 장아찌 한가지에 요기를 하든, 한조각 케이크와 짝을 이뤄 마시든간에 개운한 뒷맛은 참 은은하다.

항암 성분까지 갖고 있다는 메밀을 우리는 흔히 '국수'의 형태로 접하는데, 그 메밀국수란 것이 밀가루와 메밀가루의 비율로 승부하는 맛인지라 본고장에 가야만 거칠고 진하게 뽑아낸 메밀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본고장에서 만날 수 있는 또하나의 맛은 '메밀 동동주'다. 메밀쌀을 발아시켜 만드는데 술을 담글 때 솔잎에도 많은 '루틴'이 다량 함유된 메밀꽃도 섞어 넣기 때문에 요염한 애칭 '꽃술'로도 불린다.

메밀맛 바람맛, 가을냄새에 취해서 날 저무는 줄 모르게 웃다보면 소설 속 그날처럼 달빛이 흐드러지는 가을밤이 찾아온다. 알맞게 익은 시원한 바람에 다리 아픈 줄 모르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던 어느 밤, 유난히 달빛이 나를 잡는다 느끼면 용기내어 잠깐 멈춰서자. 우리는 모두 '연'을 맺고 살아가야 하는 나약한 중생들. 불교경전 '수타니파타'는 모든 근심이 '연'에서 비롯된다고 이른다. '연'을 맺고 나면 헤어질까 근심, 보고 싶어서 근심, 더 보고 싶어서 근심… 온통 세상은 달콤한 근심 덩어리가 된다. 바야흐로 메밀꽃이 필 무렵이다.

박재은 파티플래너·요리평론가

■메밀 카스텔라

설탕 250g, 소금 5g, 계란 350g,

밀가루 200g, 메밀가루 70g,

베이킹 파우더 3.5g, 물 20g, 우유 10g,

버터 5g, 단호박 또는 늙은 호박

(양은 원하는 당도에 따라 조절).

1. 찜솥에 물을 준비한다.

2. 오목한 그릇에 계란을 풀고 설탕,

소금을 섞어서 세지 않은 불에

중탕하면서 저어준다.

3. 2가 따뜻해 지면 불에서 내려 핸드

믹서기로 반죽이 질척해지도록 계속

저어준다.

4. 3에 물, 우유, 얄팍하게 썬 호박, 밀가루,

메밀가루, 베이킹파우더, 녹인 버터를

모두 넣고 섞어준다.

5. 찜솥에 젖은 면보를 깔고 여분의 호박도

깔아준다.

6. 5의 찜통에 반죽을 담고 뚜껑을 덮은 뒤

40여분간 찐다.

7. 쇠젓가락등으로 케이크의 중앙을 찔러서 반죽이 묻어나지 않으면 다 익은 것이다.

*카스텔라에 넣을 호박의 양은 어른이 먹을

경우 100g(약 반 개) 정도, 단맛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주로 먹을 거라면

150g 이상(약 한 개)이 적당하다. 오븐을

이용한다면 175도로 예열한 후 약 25분간

구워낸다.

■메밀속 칼슘 우유보다 50% 많아

척박한 토양에서도 비교적 쑥쑥 자라나는 메밀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구황식물이다. 비타민, 철분을 비롯해 같은 양의 우유에 비해 50%나 칼슘이 더 들어있으며 다량의 섬유질도 함유돼 있는 건강 식재료다.

가정에서도 쉽게 메밀 요리를 시도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침요리나 제과 제빵 조리법에 제시된 것 중 밀가루의 양을 줄이고 그만큼 메밀가루를 섞어 넣으면 소화흡수율이 높아진다. 따끈한 장국물에 메밀 국수를 말아서 온메밀로 즐기거나 메밀묵을 채 썬 오이와 양념장에 무친 뒤 밥에 얹어도 간단히 덮밥이 된다.

직접 봉평을 찾는다면 메밀싹이 아삭하게 씹히는 ‘메밀싹 비빔밥’을 맛볼 수 있는 ‘미가연’(033-335-8805), 메밀 농도가 확실히 짙은 메밀국수 하나의 메뉴만을 내놓는 ‘현대막국수’(033-335-0314)를 권한다. 차, 쌀 등 메밀 가공상품의 구입 문의는 봉평농협 가공공장(033-336-4210)으로 하면 된다.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찬기운을 띠는 메밀을 베갯속으로 쓰면 잠자리가 한결 시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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