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섹스&젠더]타인의 취향

  • 입력 2002년 8월 29일 16시 07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타인’으로 규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몸과 마음을 섞는 부부를 타인이라고 한다면 한없이 외롭고 삭막해진다. 그러나 어쩌랴. 돌아서면 한순간에 남남이 되는 불안한 관계가 부부인 것을. 취향의 차이로 인해 번번이 오해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관계 역시 부부인 것을.》

#1.가슴

20대 후반의 커리어우먼 A씨. 탁월한 미모로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더니 6개월 전 ‘백마 탄 왕자’와 웨딩마치를 올렸다. 탄탄한 재력과 학력, 세련된 매너, 무난한 외모 등 어느 하나 빠질 곳 없는 남편은 그러나 신혼 첫날밤부터 불만을 토로했다.

“꼭 남자랑 결혼한 것 같아.” “어디 만질 곳이 있어야지.”

남편의 잔소리는 A씨의 가슴 사이즈에서 비롯됐다. A씨가 착용하는 브래지어 사이즈는 75A. 결코 풍만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한국 여성들의 보편적 사이즈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혼 전 ‘뽕 브라’의 위력으로 미국 육체파 여배우 파멜라 앤더슨을 연상시켰던 A씨의 ‘실상’에 낙담한 남편은 급기야 유방확대수술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A씨는 최근 성형외과에 문의해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수술비는 600만원. 평소 자신의 가슴이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온 A씨이지만 남편의 구박은 인간적 모욕감마저 느끼게 했다. A씨는 남편이 밝힘증이 있는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의심이 든다고 했다.

서울 수성형외과 한상훈 원장은 “유방확대수술을 받는 여성 중 절반은 기혼여성이며, 그 중 15∼20%는 남편의 요구로 수술을 받는다”고 말했다. 한 원장은 “남편이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아내의 모든 점이 다 예뻐 보일 것이다. 가슴 사이즈에 대한 남편의 트집은 아내에 대한 다른 불만의 표출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수십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함께 했다는 31세의 남성(차마 A씨의 남편에게 물어 볼 수는 없었으므로)은 “손으로 쥐었을 때 약간 남는 듯한 여성의 가슴이야말로 남성에게 풍요로운 안정감을 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A씨 남편의 투정은 아내에 대한 ‘욕심 많은’ 사랑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2.터치(touch) & 위치

30대 커리어우먼 B씨는 잠옷으로 입는 실크 란제리로 갈아입은 뒤 플로럴향인 프리스크립티브즈의 ‘칼릭스’ 향수를 귓불과 가슴 굴곡 사이에 섬세하게 뿌렸다.

‘오늘밤엔 남편이 다정스럽게 애무해 줄까.’

6세 연상인 B씨의 남편은 언제나 섹스를 서둘러 해치워야 하는 밀린 숙제로 생각하는 듯하다. ‘사랑의 행위에 능숙한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가장 둔감한 부분에 먼저 손길을 주고, 사랑의 행위에 능숙한 여자는 남자의 가장 민감한 부분부터 자극한다’는 말이 있던데…. 남편은 일단 아내의 몸 속에 들어간 뒤 멈추지 않고 운동해야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편의 감미로운 터치는 욕심이라고 치더라도 회사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남편은 늘 마네킹처럼 누워 B씨를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고 아내의 ‘개인 플레이’만을 원한다. 한번은 무리하게 관계를 요구하던 남편이 자신의 뜻대로 잘 되지 않자 B씨를 옆에 둔 채 자력으로 일을 마친 적도 있다.

남편이 매사에 B씨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B씨는 “남편이 섹스에 통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누군가 내 몸을 소중히 다뤄주는 남자가 어디선가 나타나면 미친듯이 사랑에 빠져버릴 것 같아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시리즈를 집필한 존 그레이 박사는 “여자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남자는 본능적으로 직장에서의 성공에 집착하게 되고 갈수록 정서적인 균형을 잃어간다”고 갈파한 바 있다.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래시 교수(미국 워싱턴대)는 저서 ‘일부일처제의 신화’에서 이렇게 썼다.

“스위스의 작가 드 루즈몽은 두 종류의 윤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혼인의 윤리며, 다른 하나는 열정의 윤리다. 그리고 모든 기혼자는 선택을 해야 한다. 소설 ‘보봐리 부인’의 주인공이 우둔한 남편과의 생활이 지루해지자, 인생에는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정에 빠졌듯이…”

남편들이여, 아내들의 취향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아내의 육체에 열정을 불러줄 남자가 당신이 아니라 해도 여전히 태평할 수 있는지.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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