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보안서비스 전문회사 출동현장 르포 '침묵-긴장의 5시간'

  • 입력 2002년 4월 25일 15시 15분


서울 테헤란로에서 도청탐지장비 '오스카'를 펴놓고 전파를 탐지하고 있는 삼성에스원 요원들.
서울 테헤란로에서 도청탐지장비 '오스카'를 펴놓고 전파를 탐지하고 있는 삼성에스원 요원들.
18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삼성테스코빌딩 지하 주차장. 경비·보안 서비스 기업인 삼성에스원(S1) 특수사업팀 소속 5명의 현장 탐지 요원들이 출동을 서두르고 있다.

이들이 이날 스타렉스 승합차에 실은 도청기 탐지 장비의 가격은 모두 3억원어치. 무선 도청기 정밀 탐지 장비인 오스카와 ECR2는 각각 수천만원이 넘는다. 조성룡 특수사업팀장은 “회사 내 밀실에 보관된 장비의 가격을 모두 합하면 10억원이 넘는다”고 말했다.

이날 행선지는 서울 시내의 한 코스닥 상장업체. “정보가 새고 있는 느낌이다. 중역실과 회의실 등을 탐지해 달라”는 이 업체 보안 담당자의 연락을 받은 것. 고객 기업의 ‘요주의 지역’에 설치해 놓은 상시(常時) 탐지기에서 도청 혐의 신호가 전송돼 긴급 출동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해당 기업 보안 담당자 1명에게만 “지금 간다”는 것을 알릴 뿐, 출동 사실 자체를 비밀에 부친다.

●요원 모두 비밀취급 인가증 취득

스타렉스에 오른 요원들은 경찰청에서 일반 기업에 발급한 2급 비밀 취급 인가증을 받은 이들. 짧은 머리, 짙은 감색 양복 상하의, 카키색 와이셔츠 차림으로 외양이 통일돼 있다. 기업체 최고경영자(CEO)들, 정계 주요 인사들의 집무실 자택 회의실 등을 자주 방문하다보니 ‘제복’이 필요한 것이다. 외양이 통일되면 나름대로 기강도 선다.

이들은 군부대 등에서 통신·정보 처리 분야에서 일한 사람들이다. 테러진압부대 요인경호대 통신요원 출신도 있다. 정기적으로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대(對)도청 방지협회 ‘베카(BECCA)’ 등에서 연수를 받는다.

이들이 의뢰받은 회사의 회의실에 도착한 순간부터 팀원간 대화는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수화만 가능하다. 회의실은 불이 꺼져 있고, 사무실의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상태. 요원들이 10여개의 트렁크 속에 담긴 장비들을 ‘정위치’시키는 데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헤드셋을 착용한 현장 조장인 정채환 과장(36)이 눈을 반짝이며 회의실 내 중점 탐지 지역을 짚어본다. 우선 천장 환풍구와 천장 스피커, 화재 경보기를 지목했다. 탐지 요원 하나가 일단 환풍구에 미러를 집어넣어 육안 검사를 한 후 긴 봉 끝에 탐지기가 달린 장비 ‘오리온’을 다시 집어넣어 ‘전파를 송신하는 물체’가 있는지 확인했다.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베카의 보고에 따르면 천장에 공사하다가 남겨둔 것 같은 동축 케이블 끄트머리에 쌀알보다 작은 초소형 마이크가 달려 있는 것이 최근 외국에서 발견됐다. 어둠 속에 오리온을 들고 회의실 곳곳을 체크하는 요원들의 모습은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의 한 장면 같다.

한편 유선 도청기 탐지 요원 1명은 드라이버를 들고 마치 ‘고참 병장이 총기 분해하듯’ 전화기 한대를 순식간에 분해했다. 내장형 도청 장비가 없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유선 전화의 선로는 TDR(Time Domain Reflectometer)라 불리는 장비로 점검한다. 전화 선로에 신호를 쏘아서 선로를 감싼 피복 등이 벗겨진 곳에서 나타나는 이상 신호를 체크하는 것이다. 도청자들은 선로 피복을 벗기고 도청 장비를 연결하곤 한다. TDR 모니터를 지켜보는 요원들의 눈빛이 어둠 속에 반짝인다. 이들은 회의실 한쪽에 놓인 칠판 지우개까지 점검했다. 도청기는 세균과 같다. 숨지 못하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어 탐지 요원들은 한 중역실로 들어섰다. 일단 전자계산기와 마우스 등 분해하기 힘든 것에는 X레이 투시기를 갖다대고 체크한다. ‘승진 축하’ 화분에도 탐지기를 대보았다. 도청하려는 사람들 가운데는 누군가를 사칭해 화분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화분 속에 무선 도청기를 심어놓고 화분에 박아놓은 철심을 안테나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 시그널이 없다. 지금까지는 일단 ‘이상무’.

그러나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한번은 어느 사무실의 붙박이 옷장을 열었더니 내부가 이상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한 간부는 “통풍성이 좋은 옷장을 특수 주문했다. 옷장 하단을 도려내고 벽에 난 통풍구의 바람이 곧장 들어오게 아이디어를 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탐지 장비들은 공통적으로 옷장에서 이상 시그널이 나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정밀 탐색 결과 옷장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벽의 통풍구 안에서 초소형 도청기가 발견됐던 것이다.

●화분-칠판지우개까지 점검

드디어 중역실 한가운데에 ‘오스카’ 장비를 펼친 요원 하나가 양 손을 번쩍 들어 신호를 보낸다. 이상 시그널을 찾아낸 것이다. 오스카는 미 연방수사국(FBI)이 주로 쓰는 정밀 장비. 각각 휩, 디스콘, 루프, 인프라 레드라 불리는 4개의 안테나가 작동한다. 오스카 담당 요원은 동그란 다이얼을 돌려가며 모니터에 띄워진 각 주파수대를 관찰하다가 420㎒대에서 이상 시그널이 발생하는 것을 보았다. 이게 뭘까? 모니터의 그래프에 봉우리처럼 치솟은 이 이상 시그널은…. 오스카 주위로 몰려든 요원들이 긴장한다.

휩 안테나를 작동시키자 무언가 긴장된 대화 내용이 희미하게 들려나온다. 이 대화가 420㎒대 전파를 타고 어딘가로 송신되고 있는 것이다. 도청기일 가능성이 있다. 위치 측정 장비를 가동하자 아래층 어딘가에서 발신되고 있다.

요원 하나가 이 회사 보안 담당자를 불러 ‘아래층들을 차례로 확인해 달라. 아래층 방에 누가 남아있는지 체크해 달라’는 메모를 써서 준다. 긴장된 순간이다. 바깥으로 나갔다가 20여분 후에 돌아온 보안담당자는 3개층 아래에 입주해 있는 다른 회사 회의실에서 야간 회의가 진행중이라는 메모를 전달했다. 요원 하나가 ‘무선 마이크를 쓰고 있지요?’라고 써서 준다. 보안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요원들이 긴장을 푼다.

범용 무선 마이크는 사실상 도청기나 다를 바 없다. 어렵잖게 구할 수 있는 고감도 안테나를 사용하면 수백m 떨어진 곳에서도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말들을 잡아낼 수 있다 (현장 탐지가 끝난 후 정 과장은 “적외선 마이크를 쓰는 게 보다 안전하다. 이럴 때도 회의실 유리창에는 적외선 차단 필름을 붙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신호”… 확인결과 무선마이크

최근 현장 탐지조는 서울 여의도의 한 기업과 테헤란로의 한 인터넷업체에서 무선 도청기를 찾아냈다. 사건을 수사중인 한 검사의 집무실에 비밀스레 놓아둔 녹음기를 찾아내기도 했다. 에스원의 경우 “징후가 있다”고 의뢰한 기업체에 나가 10% 정도의 확률로 도청기를 찾아낸다. “도청기는 탐지 반원들을 따돌리기 위한 것을 포함해 2∼3개를 숨길 수 있으므로 하나를 찾아냈다고 해서 방심할 수 없다”고 조성룡 팀장은 말했다. 2∼3개를 찾아냈다고 해서 떠들고 다닐 수도 없다. 유럽에 현지 공장을 둔 한 우량 업체는 최근 회사 내 중요 사무실에서 도청 장비가 발견된 사실이 누설되자 주가가 급락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함구돼야 하는 것이다.

도청기가 나올 경우 탐지 의뢰 업체나 개인은 경찰 등에 수사를 의뢰할 수 있다. 그냥 덮어버리는 곳들도 있다. 반드시 도청기 설치자를 색출하겠다는 업체는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기도 한다. 도청기를 통해 자연스레 허위 정보를 흘리거나, 의혹이 드는 내부자들만을 차출해 회의를 갖게 하기도 한다.

이날 탐지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왔다. 서울 시내 업무용 빌딩 하나를 탐지할 경우 주파수를 가진 전파나 잡음 등 대개 600개 안팎의 시그널이 잡힌다. 이날 의뢰한 기업의 60평 실내를 옮겨다니며 이들 시그널을 모두 탐지, 확인하는 데 걸린 시간은 5시간가량. 오전 1시가 되자 모두들 지친 표정이다. 이제 요원들은 3억원어치의 장비를 다시 차에 ‘안치’해야 한다.

승합차가 달려가는 서울의 새벽 거리는 고요하다. 승합차 라디오에서는 브람스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전파는 이처럼 우아한 선율을 담을 수 있음을 요원들은 새삼 깨닫는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보안요원들이 휴대하는 도청기 탐지 기본장비

●선로 도청 분석기

전화선에 도청기가 접속돼 있는지 파악한다. 이 분석기는 전화기를 통해 강한 전파를 전화선에 쏘아준다. 전화선에 도청기가 접속돼 있다면 전파를 반사시켜 다시 돌아오게 한다. 이 분석기는 이때 전파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도청기가 전화기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지를 계산해낸다. 레이더의 원리와 같다. 일명 TDR(Time Domain Reflectometer)이라 부른다.

●휴대용 도청 탐지기

좁은 공간에서 탐지해야 하거나 긴급 탐지를 해야 할 경우 사용한다. 근처에 작동하는 도청기가 있을 경우 헤드셋을 통해 도청되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전자 회로 탐지기

일명 ‘오리온’. 얼른보면 진공 청소기처럼 생겼다. 실내에서 들고 다니며 탐지하는 장비다. 봉 끝의 동그란 기기가 전파를 쏘아내 반도체를 찾아낸다. 이런 기능 때문에 반도체가 내장된 도청기라면 작동하지 않고 있어도 찾아낼 수 있다. 벽 가구 소파 등의 내부에 설치돼 있더라도 찾아낸다.

▼도청기 정밀탐지 방비 '오스카'

실내의 주파수를 검색해서 무선 도청기와 몰래 카메라에서 나오는 전파를 잡아내는 정밀 탐지 장비 ‘오스카’의 각 부분과 기능들.

(1) 고정 안테나들. 왼쪽부터 휩, 디스콘, 루프, 인프라 레드라고 불린다. 각각 메가 헤르츠(㎒)급, 기가 헤르츠(㎓)급, 킬로 헤르츠(㎑)급 전파를 탐지한다. 인프라 레드는 적외선 신호를 잡아낸다. 전파 도달 거리가 먼 것부터 차례로 꼽으면 ㎑-㎒-㎓ 급이다. ㎑ 전파는 먼 거리로 송신할 수 있지만 내용이 선명하지 못한 단점이 있다. AM 라디오는 ㎑급, 011 휴대전화는 800㎒대 전파를 쓴다. 도청기들은 400㎒∼2.4㎓급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2) 몰래 카메라가 촬영 중인 화면을 잡아내는 모니터. 위의 모니터는 PAL 방식으로 전송되는 화면을, 아래 모니터는 NTSC 방식으로 전송되는 화면을 띄운다. TV 전파 송신 방식 중 주사선이 많은 PAL은 러시아와 동구의 TV 전파 송수신 방식이며, NTSC는 미국과 한국 중국 일본 등의 송수신 방식이다.

(3) 소형 녹음기: 도청 중인 목소리를 잡아냈을 때 증거확보를 위해 녹음하는 데 쓰인다.

(4) 액정모니터: 휩 등의 안테나가 감지하는 전파를 표시한다.

(5) 이동용 안테나: 도청 탐지 요원이 들고 다닐 수 있다.

(6) 도청기 위치 파악 장비: 삼각 측정법으로 도청기 위치를 파악한다.

(7) 출력기: 액정 모니터에 띄워진 전파들을 프린트한다.

(8) 다이얼: 탐지하고자 하는 주파수대를 정한다.

도움말〓삼성에스원 조성룡 특수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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