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보수로 간다

  • 입력 2002년 1월 3일 15시 37분


《부모들의 것이 좋다. 흔들림보다는 안정이 좋다. 오늘의 20대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에 설레지 않는다. 대신 현실을 냉철히 직시하려 한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20대 범보수층이 50대 보수층보다 훨씬 두꺼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보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삶 그자체다.》

새해 서울대 미대 디자인학부 4학년이 될 조창근(29) 홍문기씨(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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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지난해 11월 말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당시 선거운동본부 ‘조까지마’를 세워 각각 총학생회장 부회장 후보로 나섰다. 이들은 선거포스터에 “학교 생활 잼 있니? 조까지마. 편안함, 재미, 우리가 쏜다!”라고 썼다. 구체적 공약은 ‘학교도서관 앞 집회금지’ ‘언더 그라운드 가수 초청 학내 공연 활성화’ ‘학교 내 만화 카페 개설’ 등이었다.

개표결과는 11.9% 득표. 운동권 후보로 출마해 당선한 민중민주주의(PD) 계열의 득표율 21.4%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같은 비운동권 계열인 ‘백지’(득표율 10.1%)와 후보단일화가 이뤄졌더라면 산술적으로는 당선을 넘볼 수 있었던 수치였다.

선거는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거공약을 나름대로 실천하며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다.

조씨의 겨울방학은 사업구상을 위한 시간. 지난해 12월부터 일본어학원에 다니고 있다. 이유는 아다치 미쓰루, 하라 히데요리 같은 일본 만화가의 스포츠멜로를 원어로 읽기 위해서다.

“졸업하면 만화출판사를 만들 생각입니다. 자본금은 학교 다닐 때 벌 겁니다. 부모님께 손 벌릴 수는 없어요. 요즘은 1주일에 20권씩 만화를 ‘분석’합니다.”

조씨는 졸업 후 취직하지 않고 곧바로 만화출판사를 차려 최고경영자(CEO)가 될 생각이다. 80년대 선배세대가 민중미술의 걸개그림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했다면 그는 기업가치와 상품 효용을 최대화하는 실용미술을 통해 사회에 나갈 생각이다.

“요즘 하루 4시간씩 인터넷을 하는데 주로 사업 아이템을 찾습니다. 2000년 초겨울부터 시험 삼아 사업을 해 왔는데, 내용은 비밀입니다. 방방곡곡 발품을 팔아서 흔치 않은 상품들을 산 다음 인터넷을 통해 미국 유럽에 팔았다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6만원 짜리를 500달러(약 65만원)까지 받아 봤습니다. 성공이었지요. 선거운동으로 다 날렸지만…. ”

조씨는 요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탐독하고 있다. 내년에는 주로 경영학 과목을 들을 생각이다. 성균관대 수학과, 중앙대 사진학과를 거쳐 서울대에 들어왔으며 더 이상 대학을 옮길 생각은 없다.

‘조까지마’라는 도발적인 선거본부 이름을 지었던 홍문기씨.

농구와 인터넷게임 스타크래프트, 포트리스의 마니아다. 춤을 못 춰 주변에서 ‘몸치’라는 말을 듣자 지난해 5개월 동안 ‘힙합스쿨’에 다녔다. 유연하게 몸을 놀리는 ‘웨이브’, 팝콘 튀기듯 몸을 퉁겨주는 파핑…. 모두 능숙하게 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피아노연주를 전공하는 여자친구는 힙합을 좋아하지 않는다.

홍씨의 24시간이 재미찾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기아중공업과 몇몇 벤처회사들의 기업이미지 통합작업(CI)에 참여해 로고 디자인과 전용서체 연구를 한 경험이 있다.

장래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놓은 것은 아니지만 졸업 후 방위산업체에서 군복무를 마치면 몇 년 경력을 쌓은 후 자기 사무실을 열겠다는 밑그림 정도는 그려놓았다.

홍씨는 어릴 때 꿈이 만화가였다. 김수정의 ‘둘리’, 이현세의 ‘까치’ 캐릭터를 무척 좋아했다. 최근에는 애니메이션 쪽으로 관심을 돌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오시이 마모루의 ‘인랑’‘공각기동대’ 등을 진지하게 봤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두 사람은 탈(脫)정치적이다. 선거운동도 엔터테인먼트처럼 했다. 선거포스터를 위해 초겨울 배경에 위통 벗은 사진, 물총에 맞는 사진 등을 찍어놓았지만 결국 선글라스를 끼고 친구 애완견을 안은 사진을 썼다. 조씨가 아는 정치인은 3김(金)씨를 포함해 5명 정도였다. “‘한노갑씨’…” 하고 덧붙이려다 말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성 정치판’에 대한 관점이나 정치적 태도는 분명하다.

“대선 때요? 될수록 남한테 신세 안 진 사람 찍으려구요. 대통령이 되기까지 진 빚 갚느라고 국정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탈정치적 색채, 현실주의 등을 근거로 주위에서는 이들을 범보수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신들이 신보수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절대 아니다”라고 손을 저었다.

“우린요, 정치적인 용어로 규정되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우리 위치를 매길 수 있는 건 문화사회적인 용어라야 해요.”

사회학자들은 ‘신(新)보수 젊은이’들의 특성 중 하나를 이기적인 자기중심주의로 규정하지만 두 사람은 자기중심주의에 갇혀 있지는 않다. 종래 대학내 운동권과 정치적 태도와 견해가 다를 뿐 모교 학우들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공복(公僕)’이 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던 사람들이다. 지난해 말 종강파티 때 전체 학생의 20% 정도만 참석하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이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정보화와 세계화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하는 것. ‘연애도 네트워크를 통해’ 할 생각이다.

경북 영양군에서 농부집안의 3남5녀중 일곱째로 태어난 조씨는 97년 봄 제대 후 영국 아일랜드를 한달반 동안 여행했다. 더블린, 벨파스트 등의 고성과 시장 등에서 골동품들을 만지작거리며 “돈이 되지 않을까” 사업 구상도 했지만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가진 사회의 안정성. 옛 것을 존중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예의를 잊지 못한다.

건축감리사의 외아들로 서울 토박이인 홍씨는 중3 때 부모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한 것으로 다른 세상 엿보기를 시작했다. 고1 때는 방학을 이용해 친구들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와 몬태나를 여행했고 대학 1학년 때는 일본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일본 여행의 원래 목적은 ‘일본 본토에서 애니메이션 감상하기’.

상영관을 찾지 못해 정작 애니메이션은 못 보았지만 오사카 나라 교토를 국철로 이동하며 친절까지 상품화하는 일본의 풍물을 실컷 구경했다.

이들의 선배인 386세대는 시대의 주류를 거스르며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러나 조창근, 홍문기 두 사람은 자기 세대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저희는 대세의 중심에 접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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