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부부…이혼을 꿈꾸는 사람들

  • 입력 2001년 3월 6일 18시 59분


◇가부장적 남편권위에 반기 여성들 '자기 목소리'커져

자녀문제등으로 '결정' 못해,꾸준한 대화로 갈등 없애야

영화 ‘해피엔드’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여성(전도연)에게는 두 남자가 있다. 남편과 대학시절 애인.

실직 가장인 남편과의 사이에는 판에 박힌 대화와 형식적인 섹스만이 있지만 숨겨 놓은 애인에게서는 정서적, 육체적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이혼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인이 오피스텔에 자기 칫솔을 갖다 놓자 “아무 흔적없이 오가고 싶다”며 화를 낸다.

불륜이 드러나 전도연처럼 비극적 상황에 부닥칠 가능성은 적지만 유미진씨(가명·32)도 말뿐인 결혼 생활 중이다. 맞벌이 부부. 남편 김성한씨(가명·34)는 컨설팅회사, 유씨는 광고 및 홍보대행사 직원이다.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한 이들에게 틈이 생긴 것은 시부모 때문. 남편은 주말마다 부모를 찾아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여자는 어쩌다 건너뛸 수도 있지, 출석부 확인하는 식은 곤란하다고 맞섰다.

시부모 문제가 갈등 요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유씨는 그렇지 않아도 무뚝뚝해져 가는 남편에게 실망하던 상태였다. 김씨는 김씨대로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아내에게 부담을 느끼던 차였다.

두 사람은 신혼 직후부터 이렇게 지냈다. 결혼 1년 반이 지났지만 애를 갖지 않았다. 가끔씩 헤어지고 싶다는 마음을 먹지만 실제로 이혼 서류를 만들어 본 적은 없다. 결혼 못지않게 이혼은 그들에게 힘든 선택이다.

하루에 세 쌍이 결혼하고 한 쌍이 헤어질 정도로 이혼율이 증가 추세인 건 사실이다. 여기에는 달라진 여성의 자아의식이 한몫을 한다.

96년부터 서울고등법원의 조정위원으로 일해 온 박동섭 변호사는 “전에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남편이 아내에게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었지만 요즘은 남녀 양쪽이 목소리를 같이 낸다”고 위기의 부부가 많이 생기는 이유를 설명했다.

MBC드라마 ‘아줌마’에서 ‘무급 파출부’나 다름없는 주부 오삼숙이 남편 장진구의 위선을 깨닫고 이혼하는 순간 시청자 게시판에는 ‘통쾌하다’ ‘딸의 용기를 북돋워 주는 친정 어머니가 멋지다’는 글이 쏟아질 정도.

그러나 현실 세계에선 이혼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어쩌면 못하는) 커플이 적지 않다.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이혼을 꿈꾸면서도 그냥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일종의 ‘잠재 이혼’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오래 전부터 거리를 두면서도 부부가 한 지붕 아래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처받을 자녀가 생각나서 이혼할까 고민하다 그만뒀다.”(주부 한모씨·53) “이혼 그 자체가 순간의 탈출구는 되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자영업자 황모씨·47) 이렇듯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이유가 여러 가지이다.

부부 갈등을 다루는 KBS 2TV의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 프로그램 자문위원인 이종학(李鐘鶴·41)변호사는 “이혼소송을 위해 변호사 사무실과 법원을 찾았다가 이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중간에 그만두거나 자녀를 결혼시키기 전까지 일단 참자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혼 관련 인터넷 사이트가 최근 6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배우자가 단 한번 외도했을 때 이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혼해야 한다’는 응답은 30.6%였다. 47.5%는 용서해야 한다, 21.8%는 자녀가 있다면 용서해야 한다는 반응.

잠재이혼 상태, 위기의 부부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제 발생시 당사자간 대화가 가장 중요하고 주변 사람들이 갈등을 부추기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성장상담연구소장인 이종헌(李宗憲)박사는 “남자는 사실 중심, 여자는 정서 중심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가부장적인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남편일수록 아내의 변화와 심리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며 꾸준한 대화를 권유했다.

이종학 변호사는 “결혼 전에는 누구나 단점을 안 나타내고 장점만 보여주지만 결혼하고 나면 단점이 드러나므로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며 “부부가 충돌하고 이혼 얘기까지 나올 때 집안 어른들이 자존심을 내세우며 이를 부추겨서는 곤란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혼은 No, 동거는 Yes"

사회적 가치판단 떠나 젊은층 '결혼대안' 으로

‘집안 일은 반씩 나눠서 한다. 자기 수입은 각자 관리한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헤어지자고 할 경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회사원 정철준씨(가명·31)와 이윤미씨(가명·29·여)가 지난해 가을부터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빌라에 같이 살면서 나눈 약속이다. 이들은 이런 내용을 계약서로 만들었고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정씨와 이씨는 부부가 아니다. 그러나 부부와 다름없다. 한방을 쓰고 ‘관계’도 갖는다. 동창 모임에 같이 나가기도 한다. 연애를 하던 그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구속받기 싫다며 동거를 택했다.

남녀의 동거생활은 새로운 사회적 현상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자 결혼식이나 혼인신고 없이 동거에 들어가는 커플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 동거는 사회적 가치판단을 떠나 인습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결혼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점이 다르다.

동거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인터넷 카페에서 운영하는 박모씨(26·여)는 “동거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의 양식”이라며 “여러 형태의 생활 방식이 존중되고 보호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문에 자신들이 즉흥적이고 섹스파트너나 찾는 부류로 받아들여지는 걸 거부한다.

“결혼 그 자체는 남녀 관계의 목적이 아닙니다. 행복이 목적이지요. 저는 동거에서 행복을 찾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동거 중인 어느 여성의 주장이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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