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극단 '아리랑'의 <대한민국 김철식>, NG인생들 그려

  • 입력 2000년 9월 25일 19시 00분


'아리랑'의 연극 '대한민국 김철식'
'아리랑'의 연극 '대한민국 김철식'
‘NG없는 인생은 없다.’

망루처럼 보이는 높은 초소 위에서 총을 든 경비병들. 그리고 두차례 검문을 거쳐 겹겹이 쌓인 4개의 철문을 지나 들어간 경북 청송군 진보면의 청송감호소. 이곳에서 열리는 연극 공연을 취재하기 위해 21일 처음으로 감호소를 찾은 내 두눈, 두발을 붙들어 맨 것은 감호생 사동 입구에 쓰여진 이 문구였다. 밑에 있는 문구도 보고 싶었지만 “독보(외부인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는 안됩니다”는 교도관의 급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청송’이라는 이름에 눌린 탓일까. 빛이 바랜 회색으로 가득한 감호소 풍경은 이방인에게는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지게 한다. ‘대도(大盜)’로 불리던 조세형이 수감됐었고, 폭력조직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과 탈옥 뒤 신출귀몰했던 신창원도 있었던 그곳이다.

천주교 사회교정사목위원회가 초청한 극단 ‘아리랑’(대표 방은미)의 연극 ‘대한민국 김철식’이 공연된 감호소 내 강당은 묘한 열기로 가득했다. 영화 ‘빠삐용’의 죄수복을 연상시키는 병동의 줄무늬 환자복을 입은 감호생까지 휠체어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대학로 무대에서 이미 호평을 받은 ‘대한민국∼’은 일제시대부터 4·19 때까지 어리석게 보일 만큼 정직하게 인생을 살아온 정치가 김철식(정진오 분)과 힙합 댄서를 꿈꾸는 손녀의 꿈을 연결시킨 작품이다. 900여명이 몰려 강당은 좀 비좁았고 풍자성이 강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감호생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한 감호생은 “풍자가 강한 이 연극이 감호소에서 공연될 수 있다는 게 놀랍다”면서 “우리 현대사와 개인 삶을 접목시켜 작품의 감동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이 감호생은 2년전인 98년에도 같은 극단의 ‘첫 사랑’을 관람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석방되지 않는다면 내년에도, 그 다음해에도 다른 제목의 연극을 보게 될지 모른다.

교도소보다 더 유명한 감호소는 엄밀하게 말해 교도소가 아니다. 사회보호법에 따라 형기를 마쳤지만 재범 위험성이 크다는 판정을 받은 이들이 7년씩 수용되고 있다. 하지만 한때 “교도소가 아니지만 교도소보다 더 살벌하고, 거의 죽기 직전이 아니면 걸아나올 수 없는 곳”으로 불리기도 했다.

3차례 이곳에서 공연한 정진오는 “처음에는 배우들이 청송에 가는 것 자체를 무서웠했다”며 “지금은 이곳의 관객들이야말로 입장료를 주고 극장을 찾은 대학로의 관객보다 더 뜨겁게 반응하는 최고의 관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시간반의 ‘연출(공연이나 행사를 위해 자기 사동을 벗어나 외부와 접촉하는 것)’이 끝났다.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다. 머리가 희끗한 감호생들은 “고맙습니다” “내년에 또 오세요”라며 인사를 건네지만 더이상 가까워질 수는 없다. 감호생들은 그들의 숙소로, 극단은 철문 밖으로 향한다.

감호생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강당. 죄 짓는 것과 갱생을 의미한다는, 외부인은 그 뜻을 짐작하지도 못할 ‘나는 잤다’ ‘나는 깼다’라는 표어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81년 세워진 이곳에는 1, 2 교도소와 1, 2 감호소 등 4개 시설이 있고 현재 4000여명이 수감돼 있다.

<청송〓김갑식기자>gs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