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사병이 쓴 '6·25 세밀화'

  • 입력 2000년 4월 21일 21시 18분


▼'그 여름 겨울-6·25 종군기'/최정화 지음/ 범한 출판사/308쪽/8000원▼

‘얘야, 불침번 내가 서자/ 아녜요, 아버진 주무셔요/ 아버지 소리 말라니까, 누구 들을라//돌아눕다 말고 코 고는 시늉을 한다/ 신병 내무반’ (수록시 ‘부자병(父子兵)’ 중)

세상 어떤 군대의 신병 내무반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불침번을 설까. 1950년 6·25 전쟁의 상황이 그랬다. 오로지 총을 들 수 있는 건강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느닷없이 거리에서 징집되는….

이 책은 그런 사병의 한 사람이 쓴 종군기다. 직업군인이 전략적 분석을 늘어놓는 ‘승전록’류나 역사학자가 쓴 정치사류와는 그래서 시각부터 다르다. ‘살아서 가족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이념(理念)’인 보통 남자들의 눈으로 6·25를 증언한 세밀화다.

저자는 압록강변인 평북 삭주 출신의 시인. 피난민으로 객지를 떠돌다가 구국지원병에 자원해 1년10개월간 육군 보병으로 참전했다. “신병 주제에 툭하면 뭘 적는다”고 고참들에게 매를 맞아가면서도 놓지 않았던 공책 두권의 기록이 기초자료. 공책은 전장에서 잃어버렸지만 기억이 그를 놓아주지 않아 근 50년만에 책으로 묶였다.

스스로 군인이 됐음에도 그의 기도는 “제발 사람 향해 총 쏘지 말게 지켜주소서”였다. 북에 남은 동생이 인민군으로 끌려 나왔다면 형제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증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폭격 와중에 태어난 아이의 첫 울음소리. 태어나자마자 죽음에 처한 아이의, 세상을 향한 그 단말마의 비명. 반듯한 신분증 하나 없다고 양민까지 ‘적’으로 몰아 즉결처형하는 기막힌 희극성.

그러나 저자의 글에서는 전쟁의 막간을 묘사한 대목이 더 ‘전쟁으로 잃어버린 삶의 소중함이 무엇인가’를 웅변한다. 언제 불바다가 될지 모를 상황임에도 떡을 쳐서 병사들을 먹여준 적지의 바닷가 마을 사람들, 여동생 또래의 어린 ‘양공주’들과 “가랑잎이 휘날리는…”을 합창하며 야학생들처럼 밤길을 걷는 한가로움. 전쟁이 아니었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 그들. 저자의 회고는 그 어떤 ‘반전(反戰)론’보다 뭉클하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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