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갑작스런 '老子 붐'인가]김용옥씨 방송강의 대중인기

  • 입력 2000년 1월 17일 20시 06분


노자(老子) 바람이 불고 있다. 작년 11월말부터 EBS에서 56회 예정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 고려대 철학과 교수 김용옥씨의 강의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그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지난 몇 년간 계속되던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유교를 중심으로 동양사상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것이었다면 김씨가 주도하고 있는 바람은 노자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우선 역사상 노자사상이 각광을 받은 것은 언제나 왕조 교체기와 같은 혼란기였다는 점에서 김씨가 노자사상을 밀레니엄의 전환기에 들고 나온 것은 시의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퍼포먼스’ 수준이라는 김씨의 강의기술과 입담은 대중매체를 통해 화제를 낳고 강의교재를 베스트셀러에 올려 놓으며 ‘노자 붐’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몇 해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벌어지면서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유교에 치중돼 온 것이 사실이다. 이 논쟁은 대체로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상’ 쪽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런 점에서 김씨가 노자사상을 들고 나와 자연을 도구화하는 서구적 사유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세계관과 인식론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인류의 방대한 지적유산으로서의 동양사상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조명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로 평가된다.

하지만 ‘아시아적 가치’ 논쟁과 이번 노자 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아시아적 가치’ 논쟁은 세계적으로는 이미 70∼80년대부터 본격화했고, 국내에서는 94년 리콴유 싱가포르 당시 총리와 김대중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의 논란을 계기로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게 됐다. 그 논쟁의 초점은 공동체 중심주의, 혈연 지연 학연 등 연고주의, 윤리적 우월성과 근면성, 높은 저축률 등을 유가사상에 기반한 아시아적 가치로 인정하는가, 인정한다면 그런 것이 자본주의와 사회발전을 위해 계승 발전시킬 만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논의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각 분야 학자들이 우리의 현실문제를 둘러싸고 동양사상을 재조명하며 이론을 축적해 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노자붐의 경우는 전문가들 사이의 진지한 논의나 검증 없이 김씨의 일방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그대로 일반인에게 ‘던져지고’ 있다.

그동안 도가사상의 현대적 의미에 주목해 온 충북대 정세근교수는 “서양의 자연관을 비판하며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파악하는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라는 식의 주장이라면 대만의 천구잉(陳鼓應), 일본의 오하마 아키라(大賓 皓), 미국의 크릴(Creel) 등 많은 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해 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교수는 나아가 “노자 이후의 학자들이 당대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도가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왔는지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환경론이나 여성론 등 보다 현실에 구체적으로 부합하는 도가적 대안이 제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도나 사회구조 등 구체적 현실에 대한 반성과 대안모색 없이 단순히 노자사상으로 세계관을 바꾸라는 식의 ‘선언’은 역사상 노자사상이 흔히 그래 왔듯이 현실과 괴리된 개인의 정신적 위안 수준에 그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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