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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1월 5일 20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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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폭설이 퍼붓던 89년 12월 어느날, 미국 하버드대의 한 대형 강의실에 울려퍼진 이 한마디. 키가 작고 통통한 한국인 스님의 서툰 영어 목소리였다.
이 도발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질문에 숨이 막혀버린 미국 젊은이가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니. 충격 당혹감 환희…. 죽비로 등줄기를 후려치는 듯한 전율.
그 한국인 스님은 숭산스님이었고, 젊은이는 진리를 갈구하던 가톨릭신자이자 하버드대 대학원생이었던 스물다섯의 폴 뮌젠이었다.
그날 밤 젊은이의 머리 속은 온통 숭산, 숭산 뿐이었다. 한국에서 온 큰 스님 숭산은 대체 누구이고 한국의 불교는 과연 무엇인가.
한 젊은이의 운명은 그렇게 바뀌어 갔다.
바로 현각스님(35). 지난해말 TV다큐멘터리 ‘만행’의 주인공으로, 감동과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벽안(碧眼)의 스님. 지금은 서울 화계사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이 책은 현각스님의 구도기(求道記)다. 어린시절부터 숭산 큰스님을 만나 스님이 되기까지의 이야기, 한국과 불교에 관한 느낌 등.
동양인도 아닌 미국인이 출가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그것은 용기다.
이 책엔 ‘비움으로써 삶을 채워가는’ 젊은 수행자의 삶이 투명하고 담백하게 그려져 있다.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용기.
그가 스님이 되어 이렇게 멀고도 낯선 땅에 온 것은 오직 진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명문대의 종교철학도였던 청년시절, 빛과 진리는 늘 그의 화두였다. 이를 놓고 끝없이 고뇌해야 했다.
그 고뇌의 한 가운데에서 운명처럼 숭산스님을 만났던 것이다. 숭산스님의 강연에 충격을 받은 일년 뒤. 그는 가슴 설렘을억누르지 못하고 한국을찾았다. 90일간의 동안거(冬安居)를마치고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내뱉은 말. “아, 스님이 되고 싶어.”
하지만 어머니와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번뇌의 연속.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손짓할수록 선(禪)수행에 정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언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안개가 걷히고 의심과 고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길이 명확해졌다.
“그래, 출가하는 거야.” 그때가 92년 가을. 그리고 다시 찾은 한국땅….
책의 전체적 톤은 차분하고 담담하다. 하지만 행간엔 번뇌를 물리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의 흔적이 숨어 있다. 번뇌를 다스리고 구도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진한 감동과 깊은 여운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삶을 비우면서 삶을 채워온 젊은 스님 현각. 이제 겨울이 오고 있다. 각권 249, 245쪽, 7000원.
〈이광표기자〉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