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씨, 절필선언후 쓴 詩23편 발표『시인 겸업』

  • 입력 1999년 2월 23일 19시 01분


소설가 박범신(53·명지대 교수)은 요즘 곧잘 소년처럼 얼굴을 붉힌다. 쑥스러움과 기대 조바심이 겹쳐 번지는 홍조(紅潮).

시(詩)때문이다. 소설가로 외길을 걸어온 지 26년만에 처음으로 계간 ‘시와 함께’에 20편, ‘작가세계’에 3편의 시를 발표했다. 만나는 사람에게 체면치레도 없이 “내 시 봤어요? 어떻든가요?” 묻는 것이 그의 인사다.

발표된 시들은 그가 93년 “한계에 이르렀다”며 돌연 절필선언을 한후 경기 용인군 산간의 한터마을에 틀어박혀 지내던 3년동안 쓴 것들. 나이 쉰에 “소설도 인생도 다 헛살았다”고 자신을 매질해대던 작가의 절망감과 격정 고뇌가 자연 묘사에 투영돼 드러난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답니다/뜨거운 쉰살의 빈 것이/내 안에서 타고 있는 걸 보면서/나무들이 가만히 흔들리는 걸 보면서…’(‘생일’중)

‘봄날 온 산천에/종환(腫患)들이 떼지어 솟아/터진다/피고름이 터진다//무섭다’(‘꽃’)

작가는 “소설이 지상의 논리라면 시는 천상의 논리”라며 “시 덕분에 오랫만에 가슴떨림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산문작가로서의 글버릇때문에 시에 군더더기가 많다”고 한계를 짚어내면서도 “청해오기만 한다면 계속 시를 쓰고 싶다”고 주저없이 말했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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