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머리부터 정명훈의 터치는 ‘충격적’. 관현악의 첫 화음은 무려 11초를 끈다. 이어지는 합창단의 피아니시시모(ppp)는 거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다. 악장마다 거의 예외없이 극한에 이른 피아니시시모의 세계가 펼쳐진다. 템포 역시 이에 상응하듯 느리기 한량없다.지금까지 ‘진혼곡 답지 않게 맑고 밝다’고 여겨졌던 작품이지만 정명훈의 손끝에서 문자 그대로 ‘흑암(黑暗)’의 세계로 우러나온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른 지휘자들이 비교적 담담히 넘어가왔던 ‘디에스 이레(진노의 날)’부분에서 정명훈은 베르디의 ‘레퀴엠’ 못지 않는 질풍같은 분노를 터뜨린다.
솔리스트는 소프라노 바르톨리와 바리톤 터펠. 바르톨리는 목소리의 유성(油性)질감때문에 ‘립스틱 바른 수녀’같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작품의 성격에 맞춰 한껏 성의있게 표정을 변화시키고 있다. 터펠의 절절한 호소도 귀에 달라붙는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