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천일의 밤」 예술의전당서 22일까지

  • 입력 1998년 11월 11일 18시 31분


남편을 비명에 잃고 충격으로 눈까지 멀어 고통의 세월을 살던 여인이 자살했다는 이야기. 애절하기는 하지만 비슷한 순애보야 많지 않을까.그러나 젊은 연극인 박상현(37)은 모두가 잊어버린 그 여자를 쉽게 잊지 못한다. 여인의 죽음은 타살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한없는 절망을 ‘순애보’로 윤색해 버림으로써 따지고 넘어갔어야 할 문제들을 다 은폐해 버린 것은 아닐까.

예술의 전당이 30대 연출가 박상현 조광화 이성열을 초청해 내년1월17일까지 펼치는 ‘우리시대의 연극시리즈’. 그 테이프를 끊는 박상현은 이런 의문을 담아 ‘사천일의 밤’을 무대에 올린다.4천일. 12·12쿠데타가 일어나던 날 상관인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을 지키려다가 신군부의 총탄에 쓰러진 김오랑소령의 아내 백영옥이 남편의 죽음 이후 홀로 견뎌야 했던 날을 꼽아본 것이다.

“법정에 섰던 전직 두 대통령처럼 역사의 주역은 누구나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격랑 속에 묻힌 작은 인물들은 누가 기억해 줄까요.”

박상현은 ‘사천일의 밤’에서 ‘부당했던 역사’를 목청높여 비난하기 보다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개인의 불행’을 섬세하게 그리는데 더 공을 들였다.

주인공 백영옥(이영숙 분)이 신군부 핵심인물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던 중에 의문의 추락사를 했다는 정황은 주변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난다. 백영옥 자신은 남편과의 연애편지를 뒤적이거나 혼자 사는 여자에 따라붙는 스캔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약한 모습이다. 남편에게 ‘엄마같은 사랑으로 당신을 싸안아 주고 싶어요’라고 수줍게 편지를 쓰던 여자가 4천일에 걸쳐 파괴돼 가는 과정을 통해 폭력의 잔혹성을 더 절절하게 고발하려 했던 것.

공연은 22일까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평일 오후7시반 금토 오후3시 7시반 일 공휴일 오후3시 6시. 02―580―1234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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