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산문집「그렇다면 도로…」 출간

  • 입력 1997년 10월 7일 07시 56분


소경이 눈을 뜨더니 전에는 잘 다니던 길조차 헤매게 되었다. 화담(花潭)선생이 한 말씀했다.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눈을 감은 소경은 이내 길을 찾아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 사상가이자 대문장가인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은 한 후학에게 보낸 편지에서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일화를 꺼낸다. 이어 그는 세상의 어지러운 색깔과 모양에 홀려 뒤죽박죽이 된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가라」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동아시아가 급변하던 시기, 답답한 조선의 현실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던 선구자. 선진문물을 흡수할 것을 역설한 중국 기행문 「열하일기」나 양반의 위선을 비판한 「호질(虎叱)」에서 보듯 한문체 형식의 하나인 산문(散文)의 소재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속내를 맘껏 펼쳤다. 당시 지식인들은 이런게 못마땅해 「문체의 타락」을 떠들었고 그를 아끼던 정조대왕도 끝내 속죄의 글을 그에게 강요했다. 『시집가는 날 새벽 단장을 하던 누님 옆에서 여덟 살의 나는 뒹굴며 응석을 부렸다. 새 신랑 말을 더듬 더듬 흉내내자 누님은 부끄러운 나머지 빗을 내 이마에 떨어 뜨렸다. 내가 울며 불며 분에다 먹칠을 하고 침을 거울에 바르며 골을 내자 누님은 옥으로 된 오리를 주며 달랬었다』 누님의 묘비에 새겨진 그의 글은 28년 전 어느 날 일을 눈에 선하도록 생생히 전하는 것만으로 어떤 그리움의 말보다 진하게 가족의 애틋한 정을 전해 준다. 문학사에 밝게 빛나는 그의 글이건만 아쉽게도 모두 한문이어서 현대인들이 접하기란 쉽지 않았다. 학고재에서 펴낸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는 연암 연구 전문가인 김혈조교수(영남대 한문교육과)가 추려낸 산문을 쉬운 현대어로 엮어 글이 지닌 감칠맛을 느끼게 해준다. 모두 95편의 짧은 글을 △삶의 지혜 △학문의 길 △조선의 현실 △관리의 자세 △우정 △자연인 연암 등 6장으로 나눠 싣고 있다.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말라빠진 먹과 종이 사이에서 눈을 지치게 하고, 책장에 붙은 좀벌레의 오줌과 쥐똥을 찾아 주워 모으는 것이 독서인가. 그보다는 아침 녹음진 마당에 철새들이 정답게 소리하는 광경을 보는 것이 참 독서가 아닌가』 학문의 길에 실린 그의 편지에는 참독서에 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조헌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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