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에서 뻗어나간 철로는 북쪽 우수리스크를 지나 하바로프스크에서 서쪽을 향해 직각으로 꺾여 수천㎞의 시베리아를 가로지른다.
삼나무와 자작나무 사시나무가 초지(草地)와 끝없이 어울린 전형적인 타이가기후 풍경이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다.
이 광활한 초원은 스탈린 정권 때 6천만명이 넘는 반혁명분자들이 강제노역으로 끌려와 숨져간 거대한 무덤. 스탈린은 37년 고려인들을 시베리아 너머로 이주시켜 척박한 중앙아시아를 논밭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 시도는 성공했다. 고려인 후세들은 자신들이 「호모 소비에티쿠스」(소비에트를 위한 인간)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회상의 열차」는 세번에 걸쳐 시간변경선을 넘으며 하바로프스크에서 치타∼울란우데∼바이칼호∼이르쿠츠크∼크라스노고르스크를 거쳐 16일 밤 늦게(한국시간 17일 0시)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이 여로는 60년 전 무서리가 내린 침목(枕木)들 위로 강제이주열차가 굉음속에 요동치며 한달간 달렸던 핏물어린 길이다. 37년 11월초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베리노역을 통과하던 강제이주열차 505호가 전복, 7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바이칼호 주변에서도 대형열차화재사고로 고려인들이 타죽었다.
「회상의 열차」에는 당시 강제이주 당했던 하바로프스크 기술종합대학 예프게니에 박교수(71)와 김혜숙(71) 조옥금 할머니(68), 중앙아시아 이주후에 태어난 작가 아나톨리 김, 전직 대령급 KGB간부 아나톨리 한, 러시아 로스토브지역 고려인협회장 세르게이 최부부, 오페라가수 리나 김, 모스크바 셉프킨대 맹동욱교수 등이 타고 있었다.
박교수는 치타역에 이르자 『아버님의 무덤이 여기 있다. 고국 동포들이 보여준 우의를 추석 제상 위에 올리겠다』며 하차했다.
김혜숙할머니는 『37년 당시 창문없는 캄캄한 화차칸에서 젊은 어머니들은 아기들을 체온으로 녹이며 바닥 틈새에서 몰아치는 시베리아 바람을 몸으로 막아냈다』고 회상했다.
김할머니의 아버지(김형국씨)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신문 「레닌기치」 편집에 참여했고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 교수를 지냈다. 그녀는 『고려인 농부들은 씨앗꾸러미를, 지식인들은 책을 품고 열차를 탔다』며 『아무리 추워도 단 한권의 책도 불쏘시개로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김할머니의 부친은 크질오르다에서 학교설립을 준비하다가 38년초 처형당했다.
크질오르다에 내린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고 구들을 만들었다. 무쇠가위로 갈대와 왕가시나무를 잘라 불을 때고 현지 카자흐족들에게 옷을 주고 양고기를 얻었다. 아침인사는 단 하나 『별일 없으십니까』.
강제이주후 고려인들은 붉은 스탬프가 찍힌 거주증명서를 받았다. 붉은 도장은 「내륙에 갇힌 포로」 「중앙아시아의 농노」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고려인들은 53년 스탈린 사망 후까지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이주 10년만인 46년 소련당국의 행정착오로 몇개월 동안 거주제한이 풀린 신분증을 재발급받기도 했다. 크질오르다로 이송됐던 작가 아나톨리 김의 일가도 이 덕택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나톨리 김은 『귀로에서도 캄캄한 화물칸에서 한달을 보냈다』며 『아버지는 늘 우리집안이 강릉 김씨임을 상기시켰다』고 말했다. 본관을 기억하는 것은 고려인들의 철칙이었다. 91년 방한했던 그는 조부의 이름이 들어있는 가문의 족보를 찾아 자기 일가의 뿌리를 물을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KGB간부로 일했던 아나톨리 한의 아버지는 37년 크라스노고르스크 인근의 체르노고르스크(「검은 도시」라는 뜻)에 떨어뜨려졌다. 현지에서 병든 홀어머니를 두고 징집당할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는 고육지책으로 조혼, 열여덟살에 그를 첫 아들로 얻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말은 강제이주2세들의 귀에는 뼈저리게 사무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불행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너희라도 잘되거라』
아버지는 뼈가 녹아내리도록 일했으며 그는 모래속의 싹사우나무뿌리를 잘라 땔감으로 팔았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공대에서 건축학을 전공, 토굴에서 살아온 아버지에게 큰 집을 지어주고 싶었지만 「케게베(KGB)요원」제의를 받았다. 맹동욱교수는 『그가 고려인들을 음지에서 도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그 문제로 90년 옷을 벗어야 했으며 아버지와 둘이서 모시던 추석제사를 이제는 아버지의 위패 앞에서 지낸다.
고려인들을 이같은 운명 속에 떨어뜨린 스탈린의 강제이주 지시는 30년대 소련비밀경찰인 「국내문제 인민위원회」의 유태인 류시코프를 통해 집행됐다. 그는 뒷날 일본으로 망명한 후 강제이주 집행자일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비관해 권총자살했다.
우수리스크와 울란우데, 노보시비르스크역에는 자정이 다돼 도착했다. 그때까지 동포들은 추위를 견디며 「회상의 열차」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란우데 국립예술문화학교 예프게니아 김교수(여)는 우리민족 서로돕기본부의 이윤구공동대표에게 꽃다발을 전해준 뒤 『내 평생 이런 추석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체제는 이주한 고려인들의 풍습과 노래, 말과 글을 소멸시키고자 했다. 그의 이런 강요는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둬 젊은 고려인들은 우리말과 풍습을 잘 모른다. 스탈린체제는 고려인들의 한가위 달을 가리는 거대한 개기월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강제이주 60년후 「회상의 열차」는 추석의 밤을 가로질러 수만의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알마티와 종착지인 타슈켄트를 향해 달려나갔다.
〈노보시비르스크〓권기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