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4월1일부터 본보에 연재된 소설 「아라비안나이트」가 19일로 5백회를 맞는다. 이 소설은 1천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전세계인의 애독서가 된 「아라비안나이트」를 20세기 감각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 5백회를 맞아 작품의 의의와 지금까지의 줄거리 등을 소개한다.》
▼ 「아라비안나이트」작품의 가치 ▼
『나에게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다오. 그렇지 않으면 너의 목숨을 빼앗아가리라』
천하룻밤동안 이어질 샤라자드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며 왕은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 「재미 아니면 목숨」이라는 사면초가의 처지. 20세기의 작가와 비평가들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이 무지막지한 샤리야르왕이야말로 오늘날의 강력한 「독자」이며 매일 목숨을 걸고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샤라자드는 「작가」를 상징한다고 이해한다.
오랜 세월 아랍문학권에서조차 「야담」으로 평가절하돼온 「아라비안나이트」의 의의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이 이야기가 유럽사회에 널리 번역된 19세기 후반부터다. 스탕달, 테니슨, 포 등의 작가들이 이 신비스러운 미지의 문화에 매료됐다.
그러나 「아라비안나이트」 재평가의 결정적인 계기는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이다.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주제는 죽음을 패배시키는 전략으로서의 창작이다.작가들은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밤에 죽음을 앞지르고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계속한다』고 갈파했다. 평론가 김성곤교수(서울대)는 『서구의 작가들은 TV와 영화에 본격적으로 독자를 빼앗긴 60년대이래 「소설의 죽음」까지 선언할 만큼 위기감에 사로잡혔다』며 『상상력의 고갈을 극복하기 위해 「아라비안나이트」등의고전을 다시살펴보기 시작했고 특히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면 죽음」이라는 샤라자드에서 작가의 운명을 새삼스레 깨닫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우리에게는 낯선 이슬람문화를 읽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아라비안나이트」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일신 알라 경배에 목숨을 바치는 한편 시민사회와 자본주의의 윤리관에 입각한 행동을 함으로써 이슬람문화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다.
아내에게 배신당한 후 닥치는 대로 신부를 죽이는 왕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던지며 샤라자드는 만류하는 아버지에게 『남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 하일지씨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야말로 시민사회의 윤리』라고 주장한다.
마신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해 준 대가로 목숨을 건지지만 그것이 꾸며낸 얘기라는 사실을 알고는 계약을 무효로 하기 위해 다시 마신을 찾는 상인의 이야기(「죽음의 약속」), 부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항해를 벌이는 뱃사람 신바드의 이야기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정당한 거래와 모험적인 기업가 정신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정해진 원전과 원저자없이 편역자에 따라 구성과 수록된 이야기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하일지씨 역시 프랑스의 마르드류스판을 중심으로 영어로 된 버튼판 등을 참조하지만 그 체계와 해석은 「하일지판」이라는 명칭 그대로 독창적이다.
<정은령 기자>
▼ 지금까지 줄거리 ▼
하일지판 「아라비안나이트」는 5백회가 진행되는 동안 프롤로그와 8개의 이야기를 마쳤다.
제1화 「운명적 사랑」은 마신의 장난으로 서로 다투고 헤어진 두 형제 사이에 태어난 사촌남매가 끝내 알라가 예정한대로 부부로 맺어지는 이야기. 하룻밤 정을 잊지못해 13년을 기다리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제2화 「죽음의 약속」에서는 대추씨를 잘못 뱉어 마신의 아들을 죽인 한 사나이가 마신의 손에 죽기 직전 그를 불쌍히 여긴 세 노인의 이야기로 목숨을 부지했으나 그 이야기가 거짓인 것을 알고 「정당한 거래」를 위해 마신을 다시 찾아간다. 제3화 「사랑의 고통」은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인 교주의 첩을 사랑한 한 사나이와 아름다운 여인의 플라토닉한 사랑과 고통을 그렸다.
제4화 「어부와 마신의 이야기」는 악독한 마술의 힘을 이겨내는 지혜로운 어부와 왕의 이야기, 제5화 「철없는 사랑」은 무모한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의 도피행각을 그렸다. 제6화 「항간의 이야기」는 어이없이 죽은 꼽추의 살인용의자들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펼치는 이야기들 속에 곡절많은 인간사가 다채롭게 드러난다. 제7화 「사랑의 신비」에서는 육친까지 죽이려드는 질투의 힘과 가혹한 운명을 이겨나가는 고결한 동기애가 대비된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에피소드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제8화 「신바드의 모험」은 일곱번의 목숨 건 항해를 통해 갑부가 된 뱃사람 신바드의 모험담을 담고 있다.
▼ 작가의 말 ▼
일찍이 소파 방정환선생이 주옥같은 세계각국의 동화들을 편역하여 「사랑의 선물」을 만들었듯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문학적이고 가장 현대감각에 맞는 아라비안나이트 판본을 하나 만들어보리라는 다소 엉뚱한 야심을 내가 품기 시작한 것은 벌써 10여년 전이었다. 나의 이 막연한 생각을 동아일보는 전적으로 이해하고 신뢰에 찬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실행에 옮겨지게 된 것이 하일지판 아라비안나이트인데 벌써 5백회에 이르렀으니 감개무량하다.
그러나 진실을 고백하자면 이 작업을 하고 있는 나는 정작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때가 많다. 그만큼 이 작업은 나를 몰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많은 독자들이 우정에 찬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 앞으로도 격려와 충고 있으시길 바란다.
▼ 글:하일지 ▼
△55년 부산 출생 △83년 중앙대 문창과, 중앙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89년 프랑스 리모주대 문학박사 △90년 소설 「경마장 가는 길」 △91년 비평서 「소설의 거리에 관한 이론」 △94년 소설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 그림:김봉준 ▼
△54년 서울 출생 △80년 홍익대 미대 조소과 졸업 △83년 민중미술계열의 동인모임 「두렁」창립회원 △87년 뉴욕 한인회관 초대전 △97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오래된 미래 Ⅰ,Ⅱ」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