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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7년 5월 16일 0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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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특수효과나 컴퓨터그래픽 없이도 배우의 몸만으로 만들어내는 감동이 거기 있다.
홀스또메르란 보폭이 넓은 말이라는 뜻이다.
유인촌은 품위있게 태어났으면서도 세월이 실어준 어쩔 수 없는 노추를 지닌 거세마에서부터 탄탄한 가슴과 다리를 지닌 젊은 시절, 그리고 갓 태어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귀여운 망아지까지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는 말의 생로병사를 경이롭게 그려냈다.
무대는 간결하다. 황토빛 마대가 벽에 둘러쳐 있고 구속의 상징인 말뚝들이 바닥에 박혀 있다.
이 마구간에서 홀스또메르가 났다. 제 잘못이 아님에도 얼룩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멸시받던 그는 자신을 「알아준」 공작(송영창 분)의 소유가 되면서 활짝 날개를 편다. 『날 죽도록 달리게 해줘! 그럼 난 미칠 듯이 행복해질 테니까!』
최고의 행복과 최악의 불행은 손잡고 오는 법. 공작을 위해 경마에서 우승까지 했으나 그날 밤 역시 공작을 위해 목숨 걸고 달린 끝에 홀스또메르는 말로서의 생명을 잃는다. 불구가 된 것이다. 그 다음은 죽느니만도 못한 길만 남아 있다.
이병훈씨가 연출한 이 작품이 돋보이는 것은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현장성과 역동성 그리고 살내음까지를 유감없이 펼친데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아무것도 될 수 없음을 뼈아프리 만큼 냉철하게 드러낸 것이다.
홀스또메르의 첫사랑 암말이자 공작의 요염한 정부 역을 연기하는 것은 방은진 한 사람이다. 불교의윤회사상을연상케하는절묘한 배역설정이다.
연극에서 원작자 톨스토이가 지적하는 것은 소유의 어리석음이다. 「내 말」 「내 땅」을 강조하는 인간들이 왜 「내 공기」 「내 하늘」이라고 말하지 않는지 통렬하게 비판한다.
평생 소유만을 위해 뛰었던 공작의 종말과 말로서의 자존을 위해 뛰었던 홀스또메르의 충만한 죽음은 묵직한 여운을 남겨준다. 박수소리가 멎고도 관객들은 한동안 일어서지 않았다.
유인촌 레퍼토리 제작으로 6월1일까지 호암아트홀. 02―3444―0651
〈김순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