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좋아」. 이런 감상적인 제목을 달고 60년대 한국관객을 감동시켰던 옛 영화가 원제 「페드라」를 되찾아 리바이벌 개봉된다. 감독은 국제적 감각으로 명성을 떨쳤던 줄 다생. 주연은 감독의 정신과 육체의 반려자 멜리나 메르쿠리와 가냘픈 몸과 불안한 눈동자로 모성본능을 자극했던 앤서니 퍼킨스. 첨단을 외치면서 전진만을 추구하는 한국영화계에 30년전의 영화, 그것도 흑백영화가 다시 상영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서구 정신문화의 거의 모든 것은 그리스에서 시작되고 완성됐다. 그 이후의 역사는 고작해야 현란한 각색일 뿐. 인간 욕망의 원초적 모습을 추구하는 「페드라」의 이야기도 아테네 왕 테세우스와 그의 후처 페드라, 그리고 전처의 아들 히폴리투스의 애증의 삼각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희랍극적인 장치를 기반으로 한 공간구성과 예정된 운명을 연기하는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연기가 「페드라」를 일반적인 대중영화와 구별시켜 주지만 다생의 연출스타일은 그리스 신화를 엄격한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기록했던 프랑스의 극작가 라신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다.
그대신에 감독은 해외 로케이션으로 관객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아테네와 런던 그리고 파리를 잇는 화려한 공간이동과 줄거리 위주의 드라마 전개로 대중성은 획득했지만 아쉽게도 그 와중에 신화의 웅장한 비극성은 훼손되고 말았다. 하지만 62년작인 영화는 35년이 지나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사는 관객의 가슴을 뒤흔들어 버린다. 바로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함과 소피아 로렌의 야성미, 그리고 마녀성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두려운 캐릭터를 하나의 표정에 담을 줄 아는 멜리나 메르쿠리가 있기 때문이다.
자칫 무게중심을 잃으며 상투적인 멜로드라마로 전락할 위험의 영화를 구한 또하나의 공신은 영화음악 프로그램의 영원한 애창곡을 만든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격정과 애잔이 공존하는 선율이다. 소리로만 경험했던 그 명장면을 영상으로 확인하는 즐거움도 독특하다.
강 한 섭(서울예전 영화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