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특집]금융상품 입맛따라 수천가지

  • 입력 2001년 5월 8일 18시 42분


“따르릉….”

미국 워싱턴DC에서 자동차로 1시간반 가량 남쪽의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자리잡은 신용카드회사 ‘캐피털원’의 콜센터. 고객으로부터 오는 전화를 일괄처리하는 곳이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이곳 컴퓨터에는 ‘고객번호 011―9991―6627인 브라운씨로부터 온 전화임. 브라운씨는 신용카드 대출금리가 17.5%여서 금리에 불만을 가질 가능성이 높음’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전화는 자동으로 ‘금리협상 전문상담원’에게 연결된다. 상담원은 전화를 받기 직전 잠깐 브라운씨의 신용현황과 양보 가능한 금리수준을 점검한다.

예상대로 금리불만 때문에 온 전화였다.

대화는 짧았지만 협상은 금방 끝났다. 금리를 2% 가량 깎고 기분이 좋아진 브라운씨는 상담원이 권하는 자동차대출상품까지 주저 없이 계약해버렸다.

컴퓨터가 고객의 요구를 미리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객이 콜센터에 전화를 하면 고객번호를 입력하라는 안내를 받는다. 고객번호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고객의 신용상태와 거래특성을 분류해 그의 불만내용이나 예상 관심사를 추론하는 것. 고객의 요구에 맞춘 금융상담서비스를 준비하기 위한 장치다. 이곳의 IR담당 임원인 폴 파퀸은 “컴퓨터가 고객이 전화한 이유를 알아맞히는 확률은 80% 정도”라고 말했다.

버지니아주 폴스처치에 있는 캐피털원 본사 입구에는 수많은 신용카드 견본들이 고객을 맞는다. 기자가 신용카드 종류가 몇 개냐고 묻자 정보기술담당 부사장인 마조리 커넬리는 “2000여가지”라고 말했다.

캐피털원이 수년 만에 미국 5대 신용카드 업체로 부상한 비법은 고객의 요구를 정확히 찾아내서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맞춤형 금융상품 기술’인 셈.

온라인트레이딩 전략으로 한동안 세계적인 증권사인 메릴린치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미국의 찰스스와프.

이곳에는 기업종목을 발굴하는 애널리스트와 고객의 주문을 받아 주식을 매매하는 브로커들이 각각 고객층의 성격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다. 심지어 고객층에 따라 안내 전화번호도 다르다. 즉 자산규모는 작지만 주문을 자주 내는 고객을 위한 애널리스트와 자산은 많지만 1년에 한두 번 거래를 하는 고객을 위한 애널리스트그룹이 따로 있다. 우리나라처럼 한 애널리스트가 고객성향에 관계없이 동일한 기업분석보고서를 내놓는 것과는 고객 접근 방법이 완전히 다른 셈.

찰스스와프의 에릭 킴은 “우리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고객성향을 제대로 분석해 각자에게 맞는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방법”이라며 “이를 위해 설문조사 등 조사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찰스스와프의 공세로 곤욕을 치른 메릴린치도 결국 99년 말 찰스스와프의 전략을 그대로 수용했다. 주식거래고객을 5항목으로 분류해 이들마다 각기 다른 거래수수료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선진금융업체들이 고객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95년 미국 와코비아은행을 방문했던 한 국내은행장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와코비아은행측이 고객자료 축적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자 국내 은행장이 “한국은 아직 전산용량이 충분하지 않아 자료축적이 안된다”고 말했다. 이때 와코비아측은 1920년경 작성된 종이로 된 고객카드를 보여줬다. 그 카드에는 고객의 생일과 가족관계 취미 관심사 재테크방법은 물론 가족의 대소사를 망라한 일대기가 꼼꼼히 기록돼 있었다. 기록량이 넘치면서 카드는 고객 한사람당 네댓장씩 됐다. 와코비아은행측은 우리 행장에게 말했다. “고객에 대한 관심은 컴퓨터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컨트리와이드라는 주택담보대출회사(모기지컴퍼니)가 있다. 미국 내 모기지컴퍼니 중 2위 업체인 이 회사도 맞춤형 금융상품에서 독보적인 업체.

사우스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지점을 찾았다. 오전인데도 벌써 한 부부가 찾아와 상담을 벌이고 있었다. 상담을 끝낸 뒤 기자와 인터뷰를 한 패디 텍슨은 “대출금액 대출이율 상환방법 상환기간 등 약 10여개 항목에 대해 고객이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다”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상품조합이 수천개가 넘는다”고 말했다. 지점이나 인터넷사이트에서 고객이 인적사항과 원하는 대출옵션만을 선택하면 자동대출결정 소프트웨어가 대출승인을 내게 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주택금융전문기관이라 해도 기껏해야 서너개의 주택담보대출밖에 없다.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하나요?”(기자)

“우리가 좀더 세밀하게 분류해 고객의 선택폭을 넓힌 것뿐이지 미국의 웬만한 금융기관은 대부분 고객층별로 특화된 맞춤형 금융상품을 내놓은 지 수년이 되었죠.”(홍보담당 커즌 앰버)

세계는 지금 ‘금융혁명중’이며 이미 그들은 저만치 앞서가 있음을 실감케 했다.

◇ 국내 금융지주회사 출범 앞두고 본보, 선진각국 경영기업 취재

“우리나라에도 금융지주회사가 곧 출범한대요.”(기자)

“그럼 뭐가 달라지지?”(데스크)

“아무래도 선진금융이 도입되면서 서비스가 좋아지지 않겠습니까?”(기자)

우리금융지주회사 출범을 앞둔 1월초 동아일보 금융부 회의실. 금융지주사가 출범되면 뭐가 달라질까 하는 주제를 놓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한 기자가 던진 말.

“외형만 바뀐다고 금융서비스가 달라질까요?”

이 말 한마디가 우리를 세계 선진금융현장 취재로 내몰았다.

그동안 목놓아 외쳐온 ‘금융기관의 소프트웨어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지 둘러보자는 데 뜻이 모아졌다. 시리즈팀이 구성됐고 금융기관의 일선 전문가들과 컨설팅사 ‘매킨지’ 등과 함께 두 달간 준비기간을 가진 후 6명의 기자가 미국 유럽 일본 홍콩 등으로 흩어졌다.

방문한 금융기관은 한결같이 얄미울 정도로 수익 위주의 경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익성 경영’과 ‘고객을 감동시키는 금융서비스’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우리 금융기관도 잰걸음으로 이들을 따라잡기에 나서고 있다. 7명의 기자가 보고 느낀 기록이 우리 금융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작은 보탬이 될까 하는 기대로 10회분에 걸쳐 취재보따리를 풀어본다.

<허승호기자>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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