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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7월 19일 19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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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돌풍이 불고 커다란 빗방울이 날아와 얼굴에 떨어졌다. 길에는 택시 한 대가 지나가고 공원 앞에 양복을 입은 사내가 신문으로 머리를 가리고 서 있다. 그 자리에서 약속이 있는가, 빗방울이 툭툭 날아오고 돌풍에 가지가 뒤집히는 오동나무 아래…….
뒤돌아보니 텅 빈 아스팔트 위로 붉고 푸른 낙엽들이 나비떼처럼 나부끼며 날아왔다. 길가 4층 아파트의 난간에 내어놓은 화분이 바람에 날려 깨어진다. 화분 조각이 일층 베란다 유리에 부딪쳐 떨어진다. 사람들이 황급히 창문들을 닫는다. 주인이 없는 듯한 아파트의 베란다 유리문 틈으로 세로 블라인드살 세 개가 바람에 날려 커다랗게 휘어진다.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녹슨 금고 같은 가슴이 덜컹 열린다. 무언가 가장 단단한 것이, 깊숙이 파묻히지 못하고, 늘 문 앞에 나와 뒤척이던 것이, 날카로운 비수 같은 것이 나의 발등을 찍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린다. 눈썹 위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다.
켸켸묵은 빗방울, 켸켸묵은 가을, 켸켸묵은 바람, 무어 새로운 것이 있다고 돌연히 가슴속의 것들이 쏟아지는가. 지금은 9월의 마지막 주말이고, 돌풍이 분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그 여자는 1965년 3월2일 새벽에 태어났고 혈액형은 AB형, 이름은 미흔이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8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8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아내의 이름을 잊어갔고, 마지막 몇 년 동안엔 농담으로라도 그 이름을 불러본 적 없었다. 지금와서 새삼 미흔이라는 이름을 적고 보니, 그 이름은 마치 내 살 속 깊숙이 새겨진 기묘한 흔적 같다. 이제 나에게 아내는 없다. 그러므로 8년 동안이나 함께 산 그 여자를, 불편하지만, 미흔이라고 불러야 한다.
미흔이 없다는 사실을 나에게 가장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은 냄새이다. 방문을 열면 다정한 두 손처럼 나의 얼굴을 더듬어오던 해묵은 냄새. 여러 가지 화장품들, 특히 아내가 늘 쓰던 로션과 파우더 냄새, 백합향 향수와 에나멜과 아세톤 냄새, 여자들의 얇은 속옷에서 나는 냄새, 머리카락 냄새, 침대 위에서 마시는 커피 냄새, 꽃이 말라가던 냄새, 여자의 살 냄새, 내 삶을 켜곤 했던 인도 양초 냄새, 그 모든 것이 합쳐진 약간 울적하고 신경질적이고 관능적인 냄새…… 이젠 아내의 방문을 열어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박제된 새의 깃털에서처럼 건조한 먼지 냄새가 적막한 공기 속에 비릿하게 떠돌 뿐이다. 미흔의 방에 있던 물건들이 거의 전부 그대로 있는데도 그녀와 함께 그 냄새는 사라져 버렸다. 나의 집에서, 나의 인생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연하게.
미흔은 키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았다. 하지만 늘 높은 굽의 신을 신었다. 특히 굽이 뾰족하고 뒤가 열려 있는 슬리퍼 스타일을 즐겨 신었는데, 그녀의 걷는 모습은 무척 독특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생래적인 걸음걸이였다. 세상과 삶에 대해 무관심한 듯하고 나른하고 오만해 보이는 걸음걸이. 나중에 나는 그녀의 어머니에게서도 그 걸음걸이를 발견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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