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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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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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방학, 매미채 그리고 디지털 기기[청계천 옆 사진관]

    ● 1925년 여름, 매미를 쫓던 아이시대에 따라 뉴스도 달라집니다. 있던 뉴스는 사라지고 없던 뉴스가 새로 생깁니다.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5년 8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여름 풍경입니다. 사진 설명은 단 한 단어, ‘맴맴’입니다. 매미채를 든 아이가 나무에 붙은 매미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보조로 나선 왼쪽 아이는 형에게 자신이 발견한 매미를 알려주듯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방학’이라는 시간의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방학식과 개학날 풍경은 신문과 방송의 단골소재였습니다. 방학은 아이들이 학교를 벗어나 가족의 품에서 생활하는 시간을 의미했고 그래서 부모들에게는 방학의 시작과 끝은 중요한 정보였을 겁니다. 곤충채집은 방학의 대표적 숙제 중 하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비, 사슴벌레, 매미를 채집해 나무 상자에 핀으로 고정하고 알코올로 방부 처리하던 작업이 떠오릅니다. 개학직전 허겁지겁 잡아 온 곤충 중 하나가 살아서 기어 나왔던 일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그 시절의 방학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는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자연도 자연이지만 어른들이 아이들의 방학을 함께 책임졌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서 긴 시간 동안 머물다 오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사촌형들과 물고기를 잡고 원두막에서 수박을 먹으면서 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낯설기만한 풍경입니다. ● 자연도 어른도 없는 여름, 새로운 방식의 배움에어컨과 와이파이, OTT 없는 시골집으로 방학을 보내러 떠나는 아이는 드뭅니다. 부모들도 그런 스케줄을 제안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하니까요. 곤충채집이나 야외놀이 대신 실내에서의 디지털 활동이 방학을 채우고 있습니다. 자연과 어른들이 함께 아이를 키우던 시대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과거의 방학 풍경이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대는 달라졌고, 아이들의 성장 방식도 바뀌었습니다. 자연 대신 디지털 세상에서 배우는 것도 새로운 배움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 것인지, 아이들에게 남겨주는 방학의 기억이 어떤 모습일지, 백년 전 매미를 쫓던 아이의 사진을 보며 질문을 던져봅니다.1970,80년대부터 동아일보 사진 DB 속에 저장된, 방학 풍경 몇 장을 함께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의 방학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으신가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유년시절을 함께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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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대야의 소명

    올봄 딸기를 싱싱하게 가정으로 배달했던 플라스틱 대야. 여름철엔 환풍기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모자로 변신했네요. 가을이 오면 또 어떻게 쓰일까요.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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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의 메모는 우연일까 작전일까 - 권력 앞에서 셔터를 누르다[청계천 옆 사진관]

    ● 정치인 메모의 파장사진이라는게 눈 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찍을 때도 있지만 때론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의 행사는 그래서 때로는 사진기자의 접근을 허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진기자의 접근을 막고 정치인의 참모들이 찍은 사진으로 현장을 보도하도록 유도합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협상을 진행하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사진은 정치인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마음을 졸이면서 지켜보는 가운데 31일 (미국 시간 30일)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등의 협상단이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최종 면담함으로써 무역협상을 타결했습니다. 기자들은 협상장과 발표장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백악관은 소셜 미디어에 사진 한 장을 올려 한미 관세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사진 속에서 트럼프와 한미 협상단이 함께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습니다.우리보다 열흘 가량 앞서 있었던, 미일 간의 협상 타결 모습 역시 댄 스카비노 미국 대통령 차석보좌관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통해 한 장의 사진으로 외부에 보도되었습니다. 트럼프의 단호한 입모양에 비해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의 표정은 곤혹스러워보였습니다. 게다가 가뜩이나 체격이 큰 트럼프쪽에서 촬영된 사진은 일본 대표의 몸이 왜소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참 자존심 상하는 사진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권력을 찍는 사진기자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정치인의 메모가 사진에 찍히면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좋은 쪽이건 나쁜 방향이건 말입니다. 지난 7월 27일(현지시간) 영국 스코틀랜드 텐베리 골프장.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관세 협상을 마친 후 기자들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의 옆에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덴 유럽연합 (EU) 집행 위원장이 앉았습니다. 트럼프의 손에는 EU의 제안서가 있었고, 그 위에 가필된 숫자가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트럼프가 크고 진하게 쓴 숫자는 마치 무슨 연설문 같았습니다. “우리는 EU가 준비해 온 투자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얻어냈고, 더 높은 관세율을 관철시켰다”는 트럼프의 메시지였습니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았을 텐데 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역광(逆光)’ 사진이었기 때문에 메모가 정확하게 보였습니다. 그 순간, AP통신의 백악관 출입 사진기자 재클린 마틴이 셔터를 눌렀습니다. 트럼프는 말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종이에 적힌 숫자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시각적으로 전했습니다. 미국 내 지지자들은 환호했을 것이고 한국을 비롯한 다음 협상자들은 긴장해야 했습니다. 트럼프의 메모가 사진으로 유출(?)되자 전 세계가 주목했습니다. 동아일보의 경우는 숫자가 잘 보이도록 포토샵으로 반전 작업을 해서 신문 1면 사진으로 사용했습니다. ● 국회 난간 위에서 권력을 감시하는 카메라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인의 메모는 강력한 뉴스의 재료입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정치인의 메모를 촬영해 특종을 만듭니다. 국회의원의 문자나 메모는 뉴스 밸류가 크기 때문에 국회 본회의장 2층 사진기자석 난간에 자리를 잡는 사진기자들은 회의 때마다 고성능 망원렌즈로 의원들의 손과 눈 주변을 노립니다. 상임위 회의장에선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어 국회의원들의 휴대폰과 메모의 노출 위험은 더 큽니다. 어떤 의원은 기자들이 잘 보이도록 아예 휴대폰을 살짝 꺼내 보이며 ‘애드벌룬’을 띄우기도 합니다. 여론의 방향을 가늠해 보려는 정무적 계산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몰래 카메라 형식이라 항의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정치인들은 항의 없이 넘어갑니다. 정치인에 대한 몰래 카메라는 언론과 권력의 관계에 따라 큰 변화를 겪습니다. 권력의 힘이 강하면 언론이 정치인에게 불리한 장면을 촬영하기도 어렵고 보도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고발 사진은 민주화 정도와 밀접합니다. 또 하나 변수는 카메라 렌즈의 기술력입니다. 1992년 10월 12일, 민자당 김영삼 총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 모습의 사진입니다. 당시의 망원렌즈로는 수첩을 찍는다고 해도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지금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메모나 화면이 사진으로는 분명하게 촬영됩니다. 사진으로 찍힌 정치인 메모 중 필자가 기억하는 첫 사례는 2000년 12월 1일, 당시 민주당 장재식 예결위원장이 같은 당 김경재 의원에게 보낸 메모였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의 발언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쪽지였는데 조선일보 사진기자 이기원이 촬영해 신문에 보도했고, 국회는 파행을 맞았습니다.김경재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는 명백한 사생활 침해”라며 “서양에서 말하는 피핑 톰(Peeping Tom), 파파라치와 같다”고 항변했지만, 공공의 공간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점에서 정치권은 크게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장재식 위원장이 김용갑 의원에게 사과하고 사태는 마무리됐습니다.메모가 뉴스가 된 대표 사례 중 하나는 2015년 1월, 김무성 의원이 적은 것으로 보이는 ‘문건 파문의 배후는 K,Y.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쪽지였습니다. 이 메모는 곧바로 정치권을 흔들었습니다. ● 메모의 진실과 왜곡요즘은 메모를 넘어, 휴대폰 노트북 태블릿까지 기자들의 관찰 대상이 다양해졌습니다. 2017년 겨울, 국민의당 권은희 원내수석부대표와 박홍근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의 카카오톡 문자가 사진기자의 망원렌즈에 포착되면서 국회는 또 한바탕 파동을 겪었습니다. 야당인 자유한국당을 배제하고 국민의당이 호남 지역 SOC 예산을 얻기 위해 예산안 통과에 협조한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입니다. 2019년에는 국회 회의장에서 공동경비구역(JSA) 대대장이 청와대 관계자에게 보낸 ‘북한 주민 2명을 추방했다’는 문자가 포착돼 정치권이 요동쳤습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보낸 ‘체리 따봉’ 이모티콘이 여당 지도부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것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2005년부터 국회 본회의장 각 의원석에 노트북이 설치되면서, 의원들이 방심하고 야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보안필름이 있긴 하지만 실제 사용하는 의원은 거의 없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메모는 생각지도 않은 방식으로 유출되기도 합니다. 2018년 3월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회담 중 작성한 메모 일부가 북한 노동신문에 의해 공개됐습니다. 노동신문은 메모를 따로 보도하지 않았지만 해상도 높은 사진을 잘라서 확대해보니 “한미훈련으로 단절 없어야”, “김정은이 엄포”라는 문구가 보였고, 당시 한미관계를 두고 중요한 해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권력 앞의 셔터, 셔터 앞의 권력세계를 상대로 미국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일방적 협상이 1차 마무리 되어가고 있습니다. 디테일을 점검하는 수많은 협상과 타결이 앞에 남아 있습니다. 트럼프와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어떤 이미지 정치를 할지 지켜볼 일입니다.이번 주 EU와의 협상을 마무리하며 트럼프가 발표장에서 들었던 종이 한 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사진기자의 순발력은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비슷했습니다. 찰나의 순간 잠깐 열리는 메모나 화면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트럼프의 메모 사진은 단순한 기록일까요? 트럼프의 의도된 연출이었을까요? 아니면 기자의 예리한 관찰력이 빚어낸 특종이었을까요? 아니면 복합적인 무언가 일까요?사진기자들에게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난간은 아슬아슬한 담벼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의원들의 메모와 휴대폰 화면이 혹시나 전략은 아닐까, 우리의 사진이 세상을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포착과 함께 의도에 대한 질문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더위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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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형 키즈카페서 시원한 여름나기

    29일 문을 연 서울 구로구 서울형 키즈카페 신도림동점에서 어린이와 보호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2시간 이용료는 2000원(성인 1000원)이다. 서울지하철 1·2호선 신도림역과 연결돼 있어 접근성이 좋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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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에세이]물로 빚은 고래

    ‘바다의 왕’ 고래가 에메랄드빛 물살을 가르며 춤을 춥니다. 넘실대는 파도와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된 고래를 보며 우리도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가로 20m, 세로 5m의 대형 디지털 사이니지(전광판) 속 모습이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는 고래의 몸짓과 파도 소리에 체감온도가 훅 떨어지는 기분입니다.―인천 중구 국립인천해양박물관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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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차 안의 수재민들 — 1925년 수해 사진과 이재민을 도왔던 신문 배달 트럭 [청계천 옆 사진관]

    경남 산청, 경기 가평, 광주광역시 등 전국 곳곳에서 극한 호우로 이재민이 속출했습니다. 자연 재해 중에서도 사람의 힘으론 거의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수해입니다. 물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고, 그 길을 막을 수도, 방향을 틀수도 없습니다. 자연이 우리 공동체에 던지는 이 숙제 앞에서, 과연 해결책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이 수해 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복구 작업에 힘을 보탰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도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경기도 가평군에서는 공무원 10명이 폭우로 고립된 80대 어르신 7명을 위해 길이 끊어진 도로를 걸어 20kg의 구호품을 지게로 져서 전달했다는 뉴스도 있습니다. 100년 전에도 홍수는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쓸어갔습니다. 서울은 한반도 최악의 수해로 꼽히는 ‘을축년 대홍수’로 4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합니다.당시 기사 중에는 수해로 서울에 집이 부족해지자 집값이 폭등해 이재민들이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이번 수해로 홍수에 집을 떠내여 보내고 혹은 무너뜨리고 하여 주택의 곤란을 당하고 있는 리재민들이 매우 다수함으로 자연히 세집의 수요가 등귀하여짐을 따라 집을 가지고 있는 가주(家主)들은 이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자 집세를 나날이 올리는 중인데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5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 두 장입니다.왼쪽은 서울 남대문역 역사 안에서 임시로 생활하는 수재민들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은 열차 내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재민들의 모습입니다. 열차 안에서 임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암담한 현실에서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을 테고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을 텐데요. 정치 지도자들이 수해 현장을 직접 찾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동아일보 DB를 찾아보니,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그러한 행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1959년 9월 1일에는 ‘한강 연변 수재민을 친히 위로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있었습니다.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육영수 여사와 박근혜 양이 수해 지역을 방문한 기록도 있었고요.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이후로도 대통령들의 수해 현장 방문 사진은 꾸준히 등장합니다.그런데 많은 ‘이재민(罹災民)‘ 사진과 피해 현황에 대한 사진을 살펴보던 중 특별한 기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해 현장을 보도하는 것 뿐 아니라 구호 활동에 직접 나선 신문사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925년 7월 23일자에는 청량리에 마련된 구호 캠프 모습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신문사가 만든 구호 캠프였습니다. 커다란 천막 아래 이재민들이 줄을 서서 뭔가를 받고 있는 사진입니다. 1925년 7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본사에서 이재민 임시 수용”이라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지금의 서울 광화문, 당시 동아일보 본사 건물을 임시 거처로 내어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구호 활동에 참여한 기록을 지면에서 종종 확인할 수 있습니다.1963년 7월 9일자 지면에는 “본사 기탁된 구호금품 1차분 재해대위에 전달”이라는 제목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삼남지구 풍수해 재민들을 위한 겨레의 따스한 손길을 호소해 온 본사에서는, 6월 21일부터 7월 8일까지 정오 현재까지 사회 각계에서 기탁해온 구호금품 중 제1차분을 전국재해대책위원회에 전달하였다. 의류 4,976점, 신발 218켤레, 밀가루 9포, 광목 11필, 비누 3,600개, 기타 물품과 쌀 20가마가 포함되어 있었다.”신문사 이름이 써진 트럭에 구호 물품이 실려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언론의 구호 활동’은 1970년대 후반까지 꾸준히 이어졌고 수해 지역에 도착해 물품을 내리고 돌아오는 트럭 사진은 1987년까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왜 신문사가 이 일을 했을까. 지금처럼 국가 예산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 아직 시민단체나 자원봉사 체계가 자리 잡기 전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그 시절, 언론사도 조직력과 기동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주체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처럼 전국에 인쇄 공장을 두고 분산 인쇄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당시 신문들은 서울 본사에서 통합 인쇄하여 각 지역으로 배송됐습니다. 그래서 큰 트럭과 전담 기사들이 수송망의 핵심이었습니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 이후, 국가가 본격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갖추면서부터는, 신문사의 직접적인 구호 역할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89년에는 전국의 기관이 보낸 수재 의연품 트럭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의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남대문역 열차 안에 몸을 누인 수재민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과 구호 트럭의 사진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재난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공동체의 손길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들에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나눠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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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창신동으로 오세요”

    주민센터 안내 아래로 봉제사, 고물상 등 ‘창신 피플’의 일상이 담긴 조각이 줄지어 있습니다. 지역 주민, 만물상을 찾는 손님 모두 반깁니다. ―서울 종로구 창신1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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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거리의 악사

    배움 앞에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가 봅니다.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한 어르신이 길을 걸으면서도 연습에 매진하네요. 어르신에겐 이 거리가 오페라극장 못지않은 무대입니다.―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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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오는 날에도 우리 안 보일 리 없겠죠?

    21일 서울 강동구청 열린뜰에서 어린이들이 ‘안전 홍보 우산’을 들고 있다. 강동구는 어린이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노란색과 반투명 소재로 제작된 우산 2578개를 관내 어린이집 222곳에 배부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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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슈퍼우먼 선생님

    물놀이장에 온 유치원 교사의 한쪽 팔에 물병이 주렁주렁 매달렸네요. 목이 마르면 달려올 아이들도 선생님의 품 넓은 사랑을 느낄 겁니다. ―서울 송파구 성내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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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때 복날의 상징 ‘보신탕’…1950년대부터 비문화적 평가 [청계천 옆 사진관]

    내일 일요일은 초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초복, 중복, 말복으로 나눠지는 삼복(三伏)은 해마다 돌아오는 가장 더운 시기이자, 한 해의 절반을 지나 후반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입니다. 사람들은 무더위를 이기고 몸을 추스르기 위해, 음식과 휴식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이 시기를 견뎌왔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00년 전 초복날을 맞아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는 시민들 풍경입니다. 삼계탕이나 보신탕 가게에 몰려 있는 인파가 아니라 약수터에 몰려 있는 시민들의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복날에 대한 시선이 지금과는 사뭇 다른 옛날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매일신보의 1925년 7월 16일자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사진과 같은 날인 1925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시겠습니다. 今日은初伏복날이란 절기로 보면, 음기가 양기에 눌려 잠복하는 것을 말한다.이 삼복이 지나가면, 차차 눌려 있던 음기는 양기의 세력을 뚫고 나와 생기가 살아난다.비유해 보면, 어떤 힘이 조용히 숨어 있다가 장차 나올 때를 준비하며 희망을 키우는 것과 같다.중국 양휘(楊煇)의 전기에 보면, 농사짓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다가 복날이나 납일(臘日, 섣달 그믐 무렵)에 이르면 양이나 염소를 잡아 술과 함께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했다는 말도 있다.하지만 실제로는 숨이 막힐 듯한 더운 볕 아래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농사꾼들에게 있어,지금쯤이면 보리도 다 익었으니 하루쯤 즐겁게 쉬고 노는 것도 좋을 것이며,또한 그것이 사람의 정이기도 하다.복날에 흰죽과 개고기를 먹는 것도 다 양기를 돋우려는 치열감(治熱感, 더위를 이기려는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니,이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전해 내려오는 풍습으로 지내는 것을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동아일보의 1925년 6월 23일자 기사에도 ‘악박골 물터’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꽤나 명소였었나 봅니다. 사진에 등장하는 ‘악박골’은 현재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일대의 옛 이름입니다. 악박골 물터는 ‘라듸움’ 성분이 풍부해 일반 속병과 가슴앓이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여름 복날 뿐만 아니라 6월 유두일 등에도 시민들로 북적였었다고 합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도 이곳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궁금증이 하나 생겼습니다. 한 때 중·노년 남성들에게 복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보신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땠을까 하는 점 말입니다. 기사를 찾아보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생각보다 보신탕에 대한 혐오는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복날과 관련된 기사를 몇 개 찾아보았습니다. ●1930년대의 여름나기 — 영양과 낮잠, 그리고 ‘여름 타는 사람들’1933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는 복날을 맞아 여름철 건강관리에 대한 조언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기사에서는 특히 더위로 식욕이 떨어지는 사람들, 선천적으로 체질이 약한 어린이, 그리고 여름철 피로감을 호소하는 대중을 위해 수면과 영양 보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뱀장어나 연어 같은 기름진 생선, 보리밥과 현미밥,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추천 식품으로 등장하며, ‘한낮의 낮잠’도 휴양의 방법으로 언급됩니다. 이 시기 복날은 단순히 개고기를 먹는 날이 아니라, 여름을 견디기 위한 종합적이고 실용적인 생활 건강 지침과 맞물려 있었습니다.●1934년 — 조선의 기후와 삼복의 과학적 관찰1934년 7월 23일자 기사는 ‘조선의 여름과 더위’를 주제로, 한반도의 기온 상승과 복날의 기후적 의미를 통계와 함께 설명합니다. 조선의 여름은 지역별로 3개월에서 5개월 반까지 지속되며, 가장 더운 시기[酷暑期]는 7월 하순에서 8월 중순 사이였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이 삼복 기간은 단지 민간신앙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한반도 전역이 고열에 시달리는 기후학적 절정기였습니다. 대구는 매년 최고기온을 경신하며 ‘조선의 더위의 종가(宗家)’로 불렸습니다. 이 글은 복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문화적·기후적 근거가 모두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1937~1938년 — 복날과 보신탕, 그리고 농민의 고비 넘김1937년 7월 9일자 기사와 1938년 7월 20일자 기사에서는 복날의 문화적 풍속과 음식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구탕’(개장국)은 이열치열로 몸을 보하는 대표적인 음식이었으며, 특히 농민들에게는 더위로부터 회복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1937년 기사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다양한 민간요법이 소개되는데, 개의 간이나 쓸개, 젖 등을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거나 술을 끊는 데 쓴다는 전설까지도 전합니다. 개장국에 마늘을 많이 넣는 것을 경계하는 조언도 실렸지만, 이 역시 건강을 위한 궁합의 차원에서 해석됐습니다.1938년 인천에서는 복날을 ‘더위를 쫓는 날’로 삼고 개장국을 먹는 전통이 이어졌으며, 이날은 애써 기른 벼가 한 마디씩 자라는 농사의 중요한 기점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보양을 넘어 공동체의 생존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의미까지 함께했습니다.●1954년 — ‘보신탕은 비문화적’이라는 시선의 등장그러나 1954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이전과는 뚜렷하게 달라진 문장이 등장합니다. 이날 초복을 맞아 보신탕에 대한 전통을 언급하면서도 “올해는 비문화적이라는 탈을 쓰고 개장국은 쥐구멍 신세요!”라는 표현이 실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식문화가 아닌 사회적 시선과 가치 판단이 개입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바로 이 기사에서 ‘보신탕은 비문화적’이라는 인식이 등장합니다. 이전까지는 그 효능이나 속설, 조리 방식 등에 대한 긍정적·중립적 서술이 주를 이뤘던 데 반해, 이 기사에서는 개장국을 먹는 행위 자체가 부끄럽거나 퇴행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당시 기사 원문은 이렇습니다. ▲고래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날이면 보신탕이라 하여 개장국을 먹고 농촌에서는 천렵(川獵)이 성행되었건만 올해는 비문화적이라는 탈을 쓰고 개장국은 쥐구멍 신세요! 쇠고기 돼지고기 값은 껑충 뛰어 올라 농가에선 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지경!아마 광복 후 달라진 한국 사회의 정체성과 서구화된 위생 개념의 확산, 도시인들의 생활방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문화적이라는 비판이 시작된 지 70여년이 지난 요즘 보신탕의 설 자리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2024년 1월 ‘개 식용 금지법’(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 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고 2027년부터 개고기의 제조와 유통이 전면 금지됩니다. 그나마 ‘영양탕’ 이름으로 유통되던 보신탕은 이제 식당 메뉴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은 100년 전 복날을 맞아, 지금은 사라진 약수터에서 건강한 물을 마시려던 시민들의 풍경을 보면서 여름나기의 방식이 변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소재를 고르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100년 전 한반도는 ‘을축 대홍수’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1주일 치 신문 전체가 수해 상황을 보도하는 사진으로만 채워졌습니다. 당시 수해 피해 상황과 이재민들의 모습은 지난 주 “백년사진 No. 121인사동, 폭우의 기억…널빤지와 냄비로 지켜낸 마루” 포스팅에 소개했었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수해로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 속히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가실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참고 기사19250년 7월 15일. 「今日은初伏」1933년 7월 13일. 「초복!오늘부터 三복입니다 여름을 안타십니까? 더위에 여위는 이와 선병질인 아이는 영양과 수면에 주의할 일」1934년 7월 23일. 「朝鮮의 여름과 더위」1937년 7월 9일. 「삼복과 구탕(狗湯) - 복 명절의 의미와 구탕 먹는 까닭」1938년 7월 20일. 「餘滴」1954년 7월 13일. 「오늘 初伏!」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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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아낌없이 주는 싸리나무

    한때는 숲에서 보랏빛 꽃을 달고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 싸리나무입니다. 이제는 빗자루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네요. 젊을 땐 꽃으로, 노년엔 빗자루로 사람들을 웃음 짓게 합니다. ―경기 수원시 매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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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기적이 일어나면

    태평양이 육지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하루 8시간씩 걸어 335일 만에 미국에 도착한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왠지 설레지 않나요? ―경기 안성팜랜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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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꿀벌의 노동

    따가운 햇빛 아래 해바라기 꽃이 만개했습니다. 그 위로 꿀을 모으려는 꿀벌들이 날아듭니다. 꿀벌을 보며 배웁니다. ‘더워도, 일은 해야죠.’ ―경기 안성팜랜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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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동, 폭우의 기억…널빤지와 냄비로 지켜낸 마루[청계천 옆 사진관]

    ■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5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서울 인사동 모습입니다. 서울에 내린 폭우에 완전히 잠겨 버린 거리 모습입니다. 한강과도 떨어져 있는 서울 도심이 물에 잠겨 버린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대 초반, 서울 인사동은 매년 여름마다 하늘이 뿌리는 재난 앞에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총독부의 수도 행정은 정비되지 않았고, 한양 도성 안쪽을 관통하던 하천과 하수 시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인사동은 한강이 불어날 때마다, 그리고 폭우가 쏟아질 때마다 가장 먼저 물이 차오르는 동네였습니다. 1920년도와 1926년에도 인사동이 침수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 1920년 8월 — 참혹했던 한여름의 장대비1920년 여름, 인사동은 말 그대로 ‘물에 잠겼다’. 3차례에 걸친 장대비에 경성 전체가 수해를 입었고, 이촌동, 교동, 묘동, 파고다공원 아래 일대는 해수면보다 낮았던 탓에 유난히 피해가 심했다. “좁은 개천이 일시에 넘쳐” 인사동으로 “좌우로 밀어닥쳤고,” 골목과 상점, 대문과 부엌까지 순식간에 붉은 흙탕물에 잠겼다.물결은 개울을 따라 흐르지 않고 집 안 마루까지 올라왔고, 사람들은 냄비 조각이나 양철통을 들고 물을 퍼내느라 혼이 빠졌다. 시내를 다니던 전차가 완전히 두절되고 경의선과 경부선 철도와 전신까지 불통되었으므로 경의선 경원선 방면의 통신 두절로 강원도와 경기도 각 지방의 수해가 어떤 상황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인사동뿐 아니라 인접한 낙원동, 재동, 계동, 청진동, 관철동, 창신동 등도 줄줄이 물에 잠겼다.특히 인사동 일대에서는 ‘다리목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집집마다 작은 목다리를 놓아 다니던 인사동에서 폭우로 목다리가 떠밀려가자, 주민들은 떠내려가지 않은 목다리를 차지하려 서로 경쟁했다. 누군가는 집 앞 대문에 다리를 걸어놓고, 전신주나 기둥에 묶어두며 필사적으로 고정했다.●1925년 7월 — 인사동을 휩쓴 또 한 번의 쓰나미5년 후인 1925년 7월, 또다시 쏟아진 장마에 인사동은 비극을 반복했다. 이미 몇 번의 집중호우로 물바다가 된 서울에 7월 11일 새벽부터 다시 폭우가 내렸다. 물은 북악산과 낙산 자락을 타고 재동과 계동을 덮쳤고, 그 아래 인사동과 낙원동 일대는 순식간에 붉은 물에 휩쓸렸다. 가장 피해가 컸던 곳 중 하나가 인사동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하수도였다. “하수도가 불완전한 까닭”에 비가 내리자 물은 도로를 역류해 길바닥으로 솟구쳤고, 길 양옆의 상점과 민가 수십 채가 침수되었다.종로서 관내에서는 인사동 일대의 집 65호가 마루 아래까지 침수되었고, 1호가 마루 위까지 침수되었고, 집 한 채는 완전히 무너졌다. 우체통 하나마저 쓰러졌고, 경복궁 돌담은 4간 길이로 무너졌다. “물은 길 위로 넘쳐서” 사람들은 길이 아닌 물 위를 걸어야 했으며, 관훈동 방향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비는 하루 종일 내렸고, 침수된 가옥은 전체 종로서 관내만 해도 150여 호에 달했다. 특히 인사동은 바닥이 낮은 지형이었기에 피해가 더욱 컸다.● 1926년 7월 — 바람과 비, 불까지 겹쳤던 날1926년에는 단순히 물난리만이 아니었다. 장마가 끝날 즈음, 폭우와 함께 거센 바람이 몰아치며 시내 곳곳의 낡은 공가(空家)가 무너졌고, 그중 인사동에서는 무너진 폐가에서 화재가 발생해 부녀자 두 명이 사망하는 참극까지 벌어졌다.인사동 일대의 하천은 또다시 범람했고, 광화문 통과 톄신국(체신국) 일대는 물론, 인사동·관훈동에도 길이 잠겨버렸다. 당시 총독부는 피해 조사에 나서고, 시찰 차량을 투입하며 “자동차 안에서 응급조치”를 지시했다고 하나, 주민들에겐 그저 허망한 구호였다.그럼에도 사람들은 견뎠고 누군가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왔다. 수해가 반복되자, 동아일보사는 1925년에는 자체 구호반을 조직했다. 인사동 주민을 위해서는 “중앙예배당”을 임시 수용소로 지정했고, 밥을 먹을 곳조차 없던 이들에게는 “식료품과 거처의 주선”을 약속했다. 당시 신문은 “집이 무너져 갈 곳이 없거나, 침수로 인해 침식을 할 수 없는 이는 본사로 통지하면 구호반이 출동해 현장에서 방편을 취하겠다”고 적고 있다.■ 인사동은 원래 물이 모이는 자리였었네요. 조선시대에는 관청과 사찰이 많았던 이곳이, 일제강점기에는 골목과 골목 사이 민가로 빼곡히 들어찼습니다. 집은 많은데 하수도와 배수시설이 턱없이 부족 했고, 바로 곁에 청계천이 흐르는 지형상 매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엇습니다. 청계천이 수해의 원인이었던 셈입니다. 수해가 나면 인사동 사람들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자연과 싸웠습니다. 폭우가 내리면 문을 닫고 널빤지 등으로 물을 막았고, 양푼을 들어 물을 퍼냈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텼습니다. 폭우가 지나가고 나면 주민들은 무너진 담장을 수습하고, 떠내려간 집기들을 건져내며 삶의 자리를 되찾으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신문사를 비롯해 뜻이 있는 단체들이 힘을 모아 수재민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1926년 이후 기사에서 인사동이 큰 수해를 입었다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공사 중이어서 오히려 수해의 원인이 되었던 하수관 공사가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서울이 수해라는 자연재해를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인사동을 다룬 3년의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추가적으로 앞에서 보여드렸던, 1925년 인사동 수해 당시 서울 시내의 다른 모습의 사진을 소개해 드립니다. 당시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동아일보 지면에 실렸던 사진입니다. 사진기자로서 당시의 사진이 제대로 인화지로 보관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무척 아쉽긴 하지만, PDF 파일의 형식이라도 당시 이미지가 살아남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참고기사1920년 8월 3일. 「京城의水害慘狀, 一個月間에三次大洪水」1925년 7월 12일. 「市內外水害罹災民」1925년 7월 13일 「市內水害狀况」1926년 7월 16일. 「再昨日의暴風驟雨 市內의浸水狀態」1926년 7월 18일. 「中部以北을中心으로 旱災後의暴風雨」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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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마음 밝혀주는 등불

    가게 앞 전등에 누군가 ‘웃는 얼굴’을 그려 놓았네요. 바라만 봐도 절로 미소짓게 됩니다. 웃음은 마음속 어둠을 밝혀 주는 작은 등불입니다. ―경기 수원시 매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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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궐에서 동물원으로, 다시 궁궐로… 창경궁의 장면들 [청계천 옆 사진관]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 사진입니다. 철창 안에 서 있는 두 마리의 코끼리 부부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창경궁으로 복원되었지만 이곳은 한 때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개조되어 서울의 대표적인 유락 시설이었습니다. 글의 끝부분에서 사진 몇 장도 함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일제에 의해 조선의 궁이 동물원으로 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은 궁이었는데 성종 대에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확장했습니다. 창경궁이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면서입니다. 창경궁의 전각들이 대거 철거되고 그 자리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들이 건립되기 시작합니다. 이름도 궁에서 원으로 바뀐 것이지요. 1910년대부터 창경원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서울의 명소였습니다. 1917년 4월 22일에는 하루에만 무려 1만 2966명이 입장을 해 당시 서울 인구 25만 여명 대비 5%가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1924년부터는 “봄 벚꽃이 만개할 때를 기다려 이, 삼 주일 동안 시기를 정하여 동물원을 밤에도 열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하여 흥취를 돕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창경원의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은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되며 경성의 대표적인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매년 4월 20일을 전후하여 열흘 정도 오후 10시 반까지 특별 개원했는데, 이때는 수백 개의 전등을 나무에 매달고 17m에 달하는 네온탑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우선 백년 전 사진의 주인공인,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의 사연을 읽어보겠습니다. 상군부처(象君夫妻 入園)창경원 동물원에는 지난 2일 오후에 새 식구 둘이 늘었다. 이는 그 안에서 몸집도 크 중 크거니와 날마다 구름 같이 모여드는 많은 손님들의 큰 인기를 끌던 홀애비 코끼리가 작년 이 맘때에 세상을 떠난 뒤로 그 방주인이 없더니 이번에 싱가포르로부터 코끼리 부부가 일본 神戶(고베)에 와서 유죽(有竹)이라는 일본 사람 동물 장사의 중매로 바다를 건너 인천에 와서 차를 타고 와서 그 방 주인이 되었는데 그들의 나이는 일곱 살과 여섯 살이며 몸값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이 두 식구가 는 대신에 그 웃방에 있는 하마(河馬)한 부니 그 대신 동물 장사 손으로 가게 되었다하며 부부의 금슬이 끔직이 좋은 모양인데 이번에는 그 부부가 가끔 운동을 할 만한 운동장을 훌륭하게 만드는 중이라더라.1925년 7월 4일자 동아일보■ 코끼리 부부가 동물원에 도착한 대신 하마 한 마리가 일본 상인을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코끼리 말고 다른 동물들은 궁궐이었던 창경원에 어떻게 들어오고 나갔을까요? 서울에 있던 동물원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궁금해서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 새 사자와 ‘사자원숭이’… 동물원은 시험 중1924년 7월, 창경원 동물원에는 서인도 출신 ‘사자원숭이’(獅子猿) 한 쌍과 함께 젊은 사자 두 마리도 새로 들어왔다. 사자원숭이는 얼굴과 꼬리에 사자와 닮은 털이 나 있어 이름 붙여진 동물로, 한 쌍에 150원가량이라 전해졌지만, 아직 시험 양육 중이었다. 새 사자들은 일본 유전(有田) 동물원에서 이송된 두 살 된 개체로, 만약 적응에 성공하면 기존의 늙은 사자 두 마리에 1,500원을 더 얹어 교체할 계획이었다. 기존 사자 가족은 아버지가 죽고 어미(14세)와 딸(8세)만 남은 상황이었다.● 창경원은 봄 소풍 1번지, 동물들도 봄앓이1933년 4월, 창경원은 서울 시민의 봄맞이 행락지로 인기를 끌었다. 진달래, 개나리와 함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 하루에 1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창경원을 찾았다. 코끼리, 호랑이, 곰, 사자 등 동물들 또한 ‘봄의 안타까움’을 참지 못해 하염없이 울타리 너머를 내다보며 몸을 비볐다. 원앙과 두루미는 물 위에서 춤을 추었고, 잔디밭에는 푸른 새싹이 솟았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봄을 즐긴 그 풍경은 창경원의 대표적 장면이었다.● 호랑이의 비극, 창경원 첫 사고그러나 창경원 동물원이 항상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다. 1933년 3월 30일, 창경원 호랑이가 우리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6세 아이를 할퀴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는 평안남도에서 상경한 가족의 아들 김태하로, 어머니와 함께 호랑이를 구경하다가 다가선 순간 변을 당했다. 어머니 역시 아이를 구하려다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창경원 개원 이래 최초의 중대한 참변이었다.● 겨울 코끼리, 서민보다 따뜻한 방에1957년 겨울, 창경원의 코끼리는 유리문으로 둘러싸인 스팀 난방실 안에서 월동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겨울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코끼리는 따뜻한 방에서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어딘지 쓸쓸하고 추워 보였다고 당시 신문은 전했다. 한편, 같은 시기 북극곰은 오히려 생기를 발산하며 활발하게 우리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군 장군이 기증한 곰, 창경원으로1955년 4월, 미극동지상군 총사령관 테일러 장군은 자신이 기르던 3살 된 수컷 곰 한 마리를 창경원에 기증했다. 간단한 기증식에는 미군과 서울시장이 참석했고, 8군 군악대와 의장병이 동원되며 의식은 장식되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창경원의 재건에 보탬이 되고자 한 기증이었다.■창경원은 단순한 동물원이 아니었습니다. 궁궐의 과거와 일제의 통치 전략, 그리고 도시민의 일상과 욕망이 얽힌 복합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울던 코끼리, 춤추던 홍학, 관람객을 할퀸 호랑이, 겨울을 버티던 동물들의 이야기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창경원은 해방 이후에도 한참 동안 서울의 인기 유원지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1981년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고 철거와 이관 작업을 하면서 1986년 8월 23일 다시 창경궁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동아일보 DB 속에 있는 창경원의 옛날 모습 사진 몇 장을 소개하며 오늘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기사 (동아일보)〈상군부처 入園〉/1925년 7월 4일〈昌慶苑에 새손님〉/1924년 7월 8일〈郊外에賞春客沙汰 昌慶苑에만萬名〉/1933년 4월 17일〈동물원 암 호랑이가 六歲 兒를 할켜 重傷〉/1933년 4월 1일 (석간)〈테將軍의 ‘곰’ 昌慶苑서 寄贈式〉/ 1955년 4월 19일〈겨울철 서민층보다 나은 ‘코끼리’〉/ 1957년 12월 3일〈일제가 창경원으로 바꾼 창경궁〉/ 2024년 9월 12일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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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꽃자리를 찾아서

    구상의 시 ‘꽃자리’에는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저기서 모인 아령들이 단돈 1000원에 팔리고 있네요. 하지만 곧 주인을 찾아 자신만의 꽃자리를 펼치겠죠. ―서울 동묘시장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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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마법으로의 초대

    손끝에 놓인 투명 구슬에 아이들이 정신을 뺏겼습니다. 구슬에 담긴 것은 자신들의 모습이지만, 아이들은 구슬을 통해 다른 세상을 봅니다. ―서울 송파구 성내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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