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

김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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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취재하는 방송·영화 담당 기자입니다. 재미를 주는 콘텐츠를 더 재밌는 기사 안에 담겠습니다.

jetti@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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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었던 남편과 대화하고… “AI기술, 윤리적 논란 가이드라인 필요”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 시즌2 ‘돌아올게’에서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아내가 가상의 남편과 얘기하고 부대끼며 산다. 남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기록, 통화녹음 등을 학습한 인공지능(AI)이 남편의 디지털 페르소나를 만들어낸 것. 죽은 이를 살려내는 기술은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NHK는 2019년 3월 가상현실(VR) 기술을 이용해 배우 데가와 데쓰로가 별세한 어머니를 만나게 했고, 2020년 우리나라 한 방송사도 혈액암으로 일곱 살에 세상을 떠난 딸과 엄마가 만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AI 기술은 어디까지 사용해도 될까. 서울여대 정보보호학과 김명주 교수(59)는 2일 발간한 ‘AI는 양심이 없다’(헤이북스)에서 AI 기술이 인간의 죽음, 존재, 신뢰에 미칠 수 있는 윤리적 부작용과 해결 방안을 제안한다. 서울 노원구 서울여대에서 2일 김 교수를 만났다. 그는 “인간이 사별을 받아들이기까지 일정 단계를 거친다. AI를 통해 죽은 이를 만나게 되면 고인이 실제 살아 있다는 착각을 일으켜 정상적 애도 과정이 왜곡될 수 있다. 고인이 생각날 때마다 찾는 중독 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컴퓨터공학 박사인 김 교수는 1994∼2002년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에서 컴퓨터범죄 사건 수사 자문을 맡았다. 인문학, 사회과학 전문가들과 2018년 AI 윤리 가이드라인 ‘서울 PACT’를 만들었다. 김 교수는 가상 가수, 인플루언서, 아나운서부터 가상 대선 후보까지 등장한 만큼 가상의 존재가 실제 인간이 아님을 밝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만든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는 2020년 8월 처음 등장했을 때 가상의 존재임이 공개되지 않았다. 김 교수는 “가상 인플루언서는 제품을 사용해 보지 않고 광고를 하기 때문에 소비자를 기만하는 측면이 있다”며 “사람들도 속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상 존재에 대한 신뢰성 문제를 해결할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며 “미국은 딥페이크 기술을 사용할 경우 이를 명시하게 한 ‘딥페이크 법’을 2019년 만들었다”고 말했다. AI 기술이 채용, 교육 분야에서도 활용되고 있어 인간의 편견을 답습하지 않도록 AI를 개발하는 것도 과제다. 아마존은 2016년 신입사원 채용 시 서류 평가에서 AI 프로그램을 도입했다가 여성 차별 논란이 일자 이를 폐기했다. 김 교수는 “AI 챗봇 ‘이루다’가 인종 및 지역 차별 발언을 한 건 이루다에 투입한 데이터에 담긴 편견 때문이었다”며 “AI 설계 초반부터 공정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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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예기치 못한 죽음이 비추는 삶의 이야기

    마약과 같은 밀수품을 삼킨 뒤 다시 토해내는 방식으로 물건을 운반하는 ‘스왈로어’ 데이브는 기내에서 한 남성의 죽음을 목격한다. 데이브 옆자리에 앉은 잭은 데이브에게 “저 남자는 아마 헤로인이 담긴 콘돔을 삼켰다가 약물중독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섬뜩한 이야길 한다. 정체불명의 가루가 담긴 고무장갑을 삼킨 상태였던 데이브는 급사한 남성의 사인에 대한 잭의 가설을 들은 직후 죽음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낀다. 몸속의 벌레가 수백 개의 바늘을 들고 배를 푹푹 찔러대는 것처럼…. 책은 죽음과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이다. 책 제목인 단편 ‘스마일’은 자신과 같은 스왈로어의 죽음을 목격한 데이브의 이야기다. ‘심심풀이로 앨버트로스’는 플라스틱 폐기물로 가득한 섬에 떨어졌다가 구출된 실존 인물 조이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려던 작가가 조이의 사망 소식을 뉴스로 접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다. ‘왼’은 연구를 위해 인도네시아의 칼리와 부족을 관찰하던 중 결투를 벌였던 부족원 중 한 명이 죽으면서 혼란스러워하는 기하의 이야기다. 타인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생생하게 각인된다. 데이브는 “죽은 자의 얼굴을 볼 기회는 흔치 않다”는 잭의 부추김으로 1등석에 운반된 스왈로어의 얼굴을 몰래 본다. 묘하게 미소를 띤 듯한 그의 얼굴을 데이브는 잊지 못하고, 비행기에서 내려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 전화를 건다. 기하는 부족원의 결투 장면이 머리에서 영상처럼 재생됨을 느낀다. 그 부족은 오른손잡이를 배척했는데, 때마침 죽은 부족원은 오른손잡이였다. 기하는 결투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지만, 오른손잡이 부족원이 조직논리에 희생됐다고 추측한다. 예기치 못한 죽음과 마주한 인간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전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 마지막 단편 ‘휴가 중인 시체’의 주인공인 프리랜서 작가 ‘나’는 버스를 집 삼아 전국을 유랑하는 주원을 취재하기 위해 그와 동행한다. 주원은 전날 먹은 술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로 스쿨버스를 운전했다가 아이를 죽일 뻔했다. 나는 주원과 이별하면서 곧 그가 죽을 거라 생각한다. 버스에 매달려 끌려갔던 아이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던 주원을 떠올리며 나 역시 사죄할 상대를 생각하며 자신의 뺨을 때린다. 타인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계기가 되기도 한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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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레리나 되고 싶었어요, 발레리노가 아닌”…드래그퀸이 된 ‘모어’의 20년

    그의 경기 양주시 집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15-1번’ 45분 후 도착. ‘360번’ 55분 후 도착. 서울 지하철 3호선 지축역에서 그의 집 앞 정류장인 청암민속박물관행 버스는 올 생각을 안했다. ‘버스 배차간격이 길어서 좀 늦을 듯 합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너머 목소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차분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운전해서 오는 거 아니었어요? 여길 대중교통으로 오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랬다. 이태원 클럽 트랜스의 간판스타인 20년 경력의 드래그퀸 아티스트 모지민 작가(44)의 집은 자동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버스의 배차간격은 기본 30분이었다. 택시는 오지 않았다.●“내 삶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무기징역 불행이었다”‘대중교통 타고 오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아연실색하던 그도 운전면허가 없었다. 모 작가는 서울 아무 곳이나 찍어도 기본 한 시간 반, 왕복 세 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오가며 스마트폰 메모 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쓴 글의 초안 90% 이상은 스마트폰으로 작성됐다. 누드모델을 하러 한국예술종합학교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드래그쇼를 위해 이태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고통과 찬란함이 교차했던 삶의 조각들을 모은 에세이집 ‘털 난 물고기 모어’(은행나무)를 8일 펴냈다. 그는 ‘모어’(MORE), 또는 ‘모어(毛魚)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19일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제 말이 좀 느닷없잖아요. 아름답게 가다가 뜬금없는 표현이 나오고, 이 세상에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각 잡고 노트북 앞에 앉으면 글이 안 나온다고 할까요?” 그의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빠, 난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어요. 발레리노가 아니라.‘ 남자의 몸에 발레리나를 꿈꿨던 그가 학교와 사회에서 받았던 차별, 음지에 숨어 일하는 것이 싫어 성전환 수술을 포기했던 20대 초반의 아픔, 군대 면제를 받기 위해 ’성 주체성 장애‘ 진단을 받고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했던 지난한 전쟁들이 담겼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반‘이란 범주에서 한참 벗어났던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한다. ’모 씨 집안의 셋째는 애미의 뱃속에서부터 구더기를 씹어 먹고 치부를 달고 세상에 기어 나왔다. 이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무기징역 불행이었다.‘ “어렸을 땐 호모새끼라 놀림 받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매일 맞았어요. ’대학교는 다르겠지‘란 기대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입학했는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가 ’여자인 척 하지 마라‘며 뺨을 때려서 제가 날라 갔어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고통 받나‘ 싶었어요. 20대 초반까지는 당연히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던 그는 드래그퀸이 됐다. 22살 되던 해인 2000년 처음 이태원 클럽 트랜스에 발을 들였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드래그퀸이 되면서 소수자 중 소수자가 됐다. 전공을 살려 발레리노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귀신이 제 머리 끄댕이를 잡고 이태원 클럽으로 데려갔다”고 회고했다. 드래그쇼를 한 세월은 그의 책에 이렇게 한 문장으로 압축됐다.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기 위해 쥐구멍으로 들어간 20년의 세월.‘ “드래그는 엄청나게 화려하잖아요. 그렇게 꾸미기 위해 드레스와 하이힐, 가채, 장갑, 옷핀, 실핀, 바늘 하나까지 다 챙겨야 하고, 기분이 나빠도 웃어야 해요. 근데 변신의 가면이 주는 쾌감이 어마어마해요. 저는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있어요. 그게 너무 커서 죽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이렇게 애증 덩어리인 드래그쇼를 계속 하고 있네요.”●’변방에서 끼 떠느라 애쓴 사람‘, 모어고통에 몸부림쳤던 날들에 대한 회고는 역설적이게도 일상의 평온에 대해 무한한 감사함을 느끼게 했다. 반려묘 모모와 나눈 대화가, 23년 째 함께한 남편에 대한 사랑이, 유년시절부터 조금은 유별났던 자신의 곁을 지켜준 부모님을 향한 감사함이. 그의 삶을 지탱하는 세 축인 반려묘, 남편, 부모님을 향한 글들은 처연하게 아름답다. 면허가 없는 남편을 향해 모 작가는 이렇게 썼다. ’꿈에라도 당신이 별안간 부릉부릉 운전해서 동해로 남해로 데려다주는 낭만은 절대 벌어지지 않겠지요. 그럼 어때요. 우리에겐 씩씩한 두 다리가 있는걸요. 우린 노인이 되어서도 팔짱 끼고 버스로 전철로 마실 나가요. 그 아름다운 영상이 눈앞에 펼쳐지네요.‘ “남편과 결혼했던 2017년 5월 24일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어요. 스스로의 삶을 ’욕창의 구더기‘라고 표현했던 그는 2019년 6월 뉴욕에서 열리는 스톤월 항쟁(1969년 미국에서 동성애자 집단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벌인 데모) 50주년 기념 공연에 초대됐다. 60년 전통의 라 마마 실험극장에서 뮤지컬 ’13 fruitcakes‘ 무대에 서 등장인물 13명 중 한 명인 ’올란도‘를 연기했다. 일본 도쿄의 한 클럽 분장실에서 찍힌 그의 사진을 보고 모 작가에게 연락한 이일하 감독은 2018년부터 3년간 그의 삶을 담아 다큐멘터리 ’모어‘(2021년)를 만들었다. 다큐는 지난해 DMZ 국제 다큐멘터리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고, 올해 6월 개봉한다. ”’그 시간 안에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요즘 많이 해요. 삶에는 그 시간대마다 벌어지는 일이 있는 거 같아요. 그때 마다 피하지 않고 그 시간을 이 악물고 버티면 된다는 걸 마흔 다섯이 되고 깨달았어요.“그의 책은 이렇게 끝난다. ’낮은 곳에서 힐을 신고/ 높은 곳에서 토슈즈를 신고/ 내일은 낮은 곳에서 당신을 만나고/ 내일은 높은 곳에서 모모를 만나고/ 그렇게 높고 낮은 곳에서/ 그렇게 있고 없고/ 헛헛하게 허비해진 시간/악물고 버틴 이의 시간/ (중략) 무언가/ 그 시간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다면/ 그 아래 서슴없이 무릎을 꿇을 것이다.‘ 삶의 높고 낮음을 묵묵히 지나온 그는 시련 속에서도 비상할 기회들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죽어서 ’변방에서 끼 떠느라 애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동네 주민들에게 책을 드렸어요. 60살이 넘은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언니라고 불러”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 같은 사람을 한 번이라도 보셨을까요? 제 성정체성과 제가 하는 예술은 너무나 변방에 있잖아요. 그래도 누군가는 이런 저를 알아봐주고 책으로, 영화로 내 주시는 게 신기해요. 요즘은 그 변방의 삶이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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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낮일밤글’ 사무관 작가가 다잡은 ‘창작하는 자세’

    민간기업에서 일하다가 시청 공무원이 된 ‘꽁지머리’ 상사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직원’으로 뽑힌 뒤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다. 그러나 새로운 데 도전하는 그의 성향은 끝내 ‘공무원화’되지 못한다. 결국 조직문화에 좌절한 상사는 안정적인 자리를 박차고 사표를 쓴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현직 국가보훈처 사무관인 이태승 작가(36·사진)가 12일 펴낸 단편소설집 ‘근로하는 자세’(은행나무)에 수록된 단편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의 줄거리다. 단편 8개로 구성된 신간은 중학교 선생님, 국립묘지 직원, 시청 공무원 등 공직자들이 조직에서 겪는 고군분투를 흥미롭게 그렸다. 그는 2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느낀 비애, 뭉클함 등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게 저만의 ‘새로움’이라고 생각했다”며 입을 열었다. 작가는 일상 속 비애를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책 제목과 같은 단편 ‘근로하는 자세’는 독일로 출장을 떠난 환경부 공무원들이 무장단체에 납치돼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테러범의 총에 맞아 막내 사무관이 사망한 후 살아남은 이들의 삶도 비극이다. 평생 일에 빠져 산 차관은 대장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고, 기러기 아빠 과장은 독단적인 성격 탓에 후배들과 멀어져 가정과 직장 어디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일하면서 찾아야 하는 건 자기 자신인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아요. ‘내가 일한 보람이 뭐였지?’를 가장 마지막에야 돌아보죠. ‘시스템에 종속된 내가 잃어버린 건 무엇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여운을 남기고 싶었어요.” 지난한 일상의 분투로 무뎌진 감정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인물의 심리도 세밀히 묘사했다. 단편 ‘문 앞에서 이만’에서 무기력한 공무원 주인공은 자신과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상사를 철저히 피한다. 직장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주인공은 맞선 상대에게 ‘한 번 더 보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다. 단편 ‘오종, 료, 유주’에는 사내커플임을 숨기는 공무원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여행지에서 만난 동성 커플이 연인임을 떳떳이 밝히는 걸 보며 자기 삶에 갑갑함을 느낀다. “직장상사나 맞선 상대와의 관계에서 주인공들은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자신을 직시해요. 여자친구를 공개하지 않는 주인공을 통해선 비밀의 겹을 쌓고 자신이 누군지 고민하는 직장인의 단상을 그렸죠.” 이 작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사무관으로, 퇴근 후와 주말에는 소설가로 산다.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생 때부터 품은 창작욕이 소설이란 매개체를 만나 뒤늦게 피어난 만큼 의무감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고. “저는 공무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할 겁니다. 전업 작가가 되면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데 그러면 글 쓰는 걸 못 즐길 것 같아요. ‘빨리 신작을 내야 한다’는 조급함보다 천천히, 멀리 보려고 해요. 다작보다 좋은 작품 하나를 쓰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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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근 후엔 소설가…공직생활의 비애가 무기 되었죠”

    꽁지머리에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사기업 출신 상사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직원’으로 뽑힌 뒤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점점 ‘공무원화’된다. “내가 저 직원보다 2분의1만큼 일을 더 한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을 하지만 밉상이었던 직원은 결국 모두 기피하던 지사로 발령받는다. 퇴근 직전 업무지시가 일상인 상사 때문에 건강에 이상이 온 주인공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걸 상사에게 보여주고 싶어 조금 심각한 병이길 바라면서도 ‘이런 내가 제정신인가?’ 싶은 회의감에 빠진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가보훈처 사무관으로 일하는 이태승 작가(36)가 첫 소설집 ‘근로하는 자세’(은행나무)를 12일 펴냈다.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책은 중학교 선생님, 국립묘지 직원, 시청 공무원 등 각기 다른 공직자들이 매일 회사에서 벌이는 소소한 고군분투를 드라마틱하게 그린다. 이 작가는 공직에서의 경험이 자신의 색을 드러내는 무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2015년부터 습작을 써온 그는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단편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다닌 소설쓰기 학원에서는 ‘상투성과 전형성을 벗어나라’는 말을 많이 했다. 25일 전화로 만난 이 작가는 “상상력이 멀리 있을 것 같지만 가까이 있더라. 나만 아는 내밀함이 결국은 새로운 것”이라며 “일을 하면서 느꼈던 비애, 뭉클함 등 여러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제가 가진 ‘새로움’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작가의 말처럼 그의 소설은 일상 속 비애를 정확히 포착해낸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단편 ‘근로하는 자세’는 독일 출장을 간 환경부 차관, 과장, 막내 사무관이 무장단체에 납치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사무관이 사망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의 삶 역시 비극이다. 평생을 일에 바친 차관은 대장암에 걸려 시한부 3개월 선고를 받고, 기러기 아빠인 과장은 독단적인 성격 탓에 후배직원들과 멀어져 가정과 직장,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일을 하면서 찾아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인데, 사람들은 시스템에 종속돼 그 사실을 마지막에 깨달아요. ‘내가 일한 보람인 뭐였지?’를 가장 마지막에 돌아보게 되는 거죠. ‘내가 시스템 속에서 잃어버린 건 무엇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여운을 남기고 싶었어요.” 지난한 일상의 분투로 무뎌진 감정 속에서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심리도 세밀하게 그린다. 가까워지려 하는 상사를 철저히 피하는 주인공은 맞선녀에게도 선을 긋는다. 호감인지 뭔지 모를 미묘한 감정 속에 혼란스러워 하다가 결국 ‘한 번 더 보자’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한다. 사내커플이지만 이를 철저히 비밀로 하는 주인공은 여행지에서 만난 동성커플이 연인임을 떳떳하게 밝히고 스스럼없이 애정표현을 하는 모습을 보며 이미 경로가 정해져버린 듯한 자신의 삶에 갑갑함을 느낀다. “인물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어요. 직장 상사와 맞선녀와의 관계에서 주인공은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자신을 직시해요. 제목 ‘문 앞에서 이만’처럼 늘 문 앞에까지밖에 못 가는 인물이죠. 사내커플을 소재로 한 ‘오종, 료, 유주’에서는 여자친구를 사회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주인공을 통해 비밀에 비밀의 겹을 쌓고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는 직장인의 단상을 그렸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행정사무관, 퇴근 후와 주말은 소설가로 사는 그는 조급함이 생길 때마다 ‘천천히, 재밌게 쓰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대학생 때부터 갖고 있던 창작욕구가 소설이란 매개체를 통해 뒤늦게 피어난 만큼 의무감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전 퇴직할 때까지 공무원으로 일할 거에요. 전업 소설가가 되면 돈을 벌기 위해 계속 글을 써야 하고, 그럼 오히려 글 쓰는 것을 즐길 수 없어질 것 같아서요. ‘빨리 뭔가를 내야겠다’는 조급함보다는 천천히, 멀리 보려고 해요. 다작보다는 좋은 것 하나를 쓰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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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귀병도 내 특징중 하나”… 현실속에서 찾은 담담한 희망

    전신 혈관에 염증이 생기는 희귀 난치병 타카야수 동맥염을 앓는 고등학생 신채윤 양(18)이 투병기를 담은 에세이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한겨레출판사·사진)를 12일 펴냈다. 신 양은 병을 앓는 것이 자신의 여러 특징 중 하나라고 보고, ‘견디는 시간이 축제처럼 즐거울 수도, 난파된 배에 매달린 심정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했다. 신 양은 열다섯 살이던 2019년 병을 진단받았다. 치료제가 없어 염증 수치를 낮추는 고용량 스테로이드제를 맞는 게 유일한 치료법. 한데 안과에서 “스테로이드제를 계속 복용하면 시신경이 죽어 실명할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새 학기에 친구들에게 병을 고백하기까지 고민하고, 부은 얼굴을 보기가 싫어 병을 앓고 난 뒤에는 미용실도 가지 않았다. 책은 투병의 고통만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혈관이 좁아지는 증상 때문에 조금만 운동해도 손발이 차가워지지만 언니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 체력을 기른다. 어두운 감정만 기록하는 ‘우울노트’를 따로 만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 ‘이 상황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다’고 했다. 발레 하는 사람부터 엄마와 언니의 얼굴, 수업을 듣는 친구들까지 A4 용지에 연필로 스케치를 하며 그림이라는 취미도 키워 나간다. 책 제목은 새 학기에 실제 자기소개를 할 때 했던 말이다. 자신의 질병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저자의 모습은 고통에 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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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흔들리지 않는 일상, 그것이 행복의 조건

    ‘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소득 증가가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1974년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이 주장한 이론이다. 그는 1946∼70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등 30여 개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 증가가 행복 증대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 주장을 담은 이른바 ‘이스털린의 역설’은 소득 증가는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경제학의 기존 관점을 뒤집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행복을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 국가가 개인의 행복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등에 대해 문답식으로 정리했다. 소득 수준과 행복에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은 개인이나 집단을 장기간 추적 조사하는 시계열 분석을 통해 도출됐다. 미국의 경우 70년간 실질소득이 3배 증가했지만 행복 수준은 장기적으로 하락세를 보였다. 저자는 비교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상황에서 원인을 찾는다. 돈을 많이 벌어도 더 부자인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행복해지려면 비교 기준을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다. 건강과 가족, 두 가지는 소득과 달리 타인과 비교하기보다 ‘과거의 나’가 기준이 된다. 내가 가장 건강했던 순간, 가족들과 가장 화목했던 순간이 준거 기준이 된다는 것. 이 기준은 타인과의 비교에 따라 흔들리지 않기에, 이를 달성하면 인간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돈을 더 벌려는 것보다 더 건강해지고, 사랑하는 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논의는 ‘정부가 개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결론을 먼저 낸 저자는 독일 통일 직후였던 1991년 동독 사람들의 행복 수준이 급락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제시한다. 경기 침체로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었고, 사회안전망이 붕괴되면서 보육과 교육,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정치적 자유는 얻었지만 행복의 중요한 세 요인인 일자리, 건강, 가족이 모두 흔들리면서 동독 사람들은 통일 전보다 더 불행해졌다는 것이다. “복지국가 정책과 국민 행복은 함께 간다”는 저자의 주장은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 건강과 인간관계 등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도 함께 제시한다. 정치 체제가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모든 인종이 투표권을 갖게 된 후 처음으로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하자 국민의 행복 수준이 높아졌다. 하지만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의 행복 수준이 인종차별주의 정책을 펼친 이전 정권 수준으로 돌아온 건 정치 체제가 행복의 결정적인 요인이 아님을 보여준다. 저자는 “행복은 정치체제가 아니라 경제 상황, 건강, 가정생활을 증진시키는 정부의 구체적인 정책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행복을 위해서는 일상의 만족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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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렸을땐 ‘내 소리 대단하지’라며 내질렀는데… 이젠 추리닝 입고 바나나 물고 귀가하는걸 꿈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판소리에 빠져 힘든 줄 모르고 달려왔다. 1997년 18세에 ‘심청가’ 4시간 완창에 이어 이듬해 ‘춘향가’ 8시간 완창에 성공했다. 최연소, 최장 시간 춘향가 완창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 후 1년간 갑자기 온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공연을 이어갔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희곡 ‘사천의 선인’과 ‘억척어멈과 그 아이들’을 재해석한 창작 판소리 ‘사천가’와 ‘억척가’로 주목받으며 미국, 프랑스, 호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그러다 2017년 사천가와 억척가를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며 3년 가까이 무대를 떠났다. 그는 2019년 11월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를 통해 무대로 돌아왔다. 소리꾼으로 록 밴드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보컬인 이자람(43)의 삶은 영화 같다. 영광과 고통이 교차한 삶을 되돌아본 에세이 ‘오늘도 자람’(창비)을 15일 펴낸 그를 최근 만났다. 2007년 초연한 사천가는 뚱뚱한 ‘순덕’이 외모 지상주의와 싸우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2011년 초연한 억척가는 위촉오 삼국시대에 전쟁을 겪은 여인의 삶을 다룬다. 해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브라질 상파울루 극장의 한 프로듀서는 공연 후 무대에 올라 존경의 뜻으로 그의 구두에 입을 맞췄다. “프랑스 파리에서 첫 사천가 공연 때 유명 연극배우가 막이 내린 뒤 찾아왔어요. ‘출연자가 마리오네트(꼭두각시 인형)가 되기도,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더라. 이런 식으로 브레이트 작품을 재해석하다니 믿을 수 없다’며 놀라워하더군요. 내레이터와 등장인물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판소리에 충격을 받은 거죠.” 이자람은 온몸의 근육을 사용해 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 이상이 오는 ‘소리앓이’를 겪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인해 오른쪽 귀의 청력이 떨어지고, 무대에서 갑자기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는 것. “억척가 공연 때 2시간 40분 동안 몰아치는 장단에 쉼 없이 음역을 바꿔 가며 전쟁터의 장군과 군인, 자녀를 잃은 어머니 등을 연기했어요. 무대에서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계속 노래하는 게 옳은지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왔죠.” 그는 2019년 복귀까지 약 3년의 공백기 동안 자신을 찬찬히 돌아봤다. 그는 “어렸을 땐 ‘내 소리 대단하지?’라며 무조건 내질렀다. 그런데 긴 시간 무대에서 혼자 수백 명의 관객을 이끌어가기 위해선 체력의 한계를 알고 에너지를 분배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소리꾼을 비롯해 판소리를 만드는 작창가, 밴드 보컬, 작가까지 도전한 그는 이제 판소리를 하는 소시민을 그린 영화를 만들고 싶단다. 클라이맥스 장면을 무엇으로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클라이맥스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장면은 있어요. 공연을 마친 소리꾼이 분장실로 돌아와서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바나나를 입에 문 채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그게 영화의 끝이었으면 좋겠어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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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꾼 이자람, 오른쪽 청력 잃고도 무대 다시 선 이유

    판소리를 시작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힘든 법을 몰랐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심청가’를 4시간 완창해도 힘들지 않았기에 ‘춘향가’ 8시간 완창에 도전했다. 스무 살 되던 해, 최연소 나이에 최장시간 춘향가 완창에 성공하며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 후 1년 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온 몸에 기운이 빠져 계단 한 칸 오르기 힘들었고, 매일 병든 닭처럼 졸았다. 20대 후반엔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과 ‘억척어멈과 그 아이들’을 각각 재해석한 창작 판소리 ‘사천가’와 ‘억척가’를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프랑스, 호주, 미국, 브라질, 루마니아 등 세계 순회공연을 다녔다. 하지만 사천가와 억척가를 다시는 부르지 않기로 결심하고 2017년 돌연 잠적, 2019년 말까지 무대를 떠났다. 그녀의 삶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다. 찬란함과 고통이 그의 삶에 왔다 떠나기를 반복한다. 20일 서울 영등포구 카페에서 만난 소리꾼이자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보컬 이자람(43) 이야기다. 이자람은 희극과 비극이 교차했던 삶을 담은 에세이집 ‘오늘도 자람’(창비)을 15일 펴냈다. “2020년 초부터 블로그에 ‘이득봉’이란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글을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에게 10년 전에도 책을 내라고 연락했던 편집자님이셨어요. 10년 전엔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포기했는데 이번엔 기회를 잡았죠.” 이자람 전에도 창작 판소리는 있었지만 사천가와 억척가처럼 대중적 인기를 끈 작품은 드물었다. 2007년 초연한 사천가는 사천에 사는 뚱뚱하지만 착한 ‘순덕’이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와 싸우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2011년 초연한 억척가는 위, 촉, 오 삼국시대에 전쟁을 겪으며 억척같이 살아간 여인의 인생을 다룬다. 해외에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유럽 관중들은 브레히트의 희곡이 한국 전통예술로 둔갑해, 한 사람이 수십여 명의 등장인물, 심지어 전쟁터 총성소리까지 연기해내는 장면에 충격을 받았다. 브라질 상파울루 극장 프로듀서는 공연 직후 무대로 뛰어 올라와 엎드려서 이자림의 구두에 입을 맞췄다. 미국 시카고 사천가 공연 중 한 여성이 벌떡 일어나 울면서 ‘브라보’를 외치기도 했다. “파리에서 첫 사천가 공연을 했을 때에요. 프랑스 유명 연극배우가 막이 내린 뒤에 절 찾아왔어요. ‘본인이 마리오네트가 되기도, 마리오네트에서 빠져나와 마리오네트를 조정하는 사람이 되더라. 이런 양식으로 브레이트 작품을 재해석하다니 믿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서사자와 등장인물을 동시에 연기하는 판소리의 스토리 텔링 양식에 충격을 받은 거죠,” 책은 예술가가 무대 위 혼을 쏟아 붓기 위해 철저히 그 부담을 홀로 짊어진 고독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자람은 수백 번의 무대를 거치며 ‘소리앓이’를 겪는다. 온몸의 근육과 에너지를 사용해 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신체적 이상이 찾아온 것. 이자람은 자신의 목소리로 인해 오른쪽 청력이 소실됐고, 무대에서 노래하다 허리가 삐기도 했다. 루마니아 한 공연에선 무대 위에서 심장이 죄어들어오고 숨이 막힌 적도 있었다. 2017년 돌연 무대를 떠나면서 사천가와 억척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도 소리앓이 때문이었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이런 예술이 만들어져도 되는 거였을까.’ “억척가는 2시간 40분 동안 전쟁터의 군인과 장군들, 그리고 자녀 셋을 잃은 어머니까지 몰아치는 장단 위에 쉼없이 음역을 바꿔가며 연기해야 했어요. 억척가 무대에 서기 전엔 늘 불안했어요. 무대 위에서 죽을 것 같은 감각으로 계속 노래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왔죠.” 이자람은 2017년부터 2019년 11월 ‘노인과 바다’의 첫 무대에 서기 전까지 2년 11개월 동안 겨울잠을 자며 쉼 없이 달려온 자신을 돌아봤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 목소리의 원천이 어디에 있으며, 그 목소리가 가닿는 곳이 어딘지”를 상상하는 ‘상상력 훈련’을 했다. 5km 밖 남산타워까지 목소리를 전달하고 싶은가, 10m 앞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은가에 따라 소리의 길이를 조절하는 연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고민한다. ‘죄다 늘어놓지 않아도 멋있을 수 있는 미덕은 더 철이 들어야 생기는 걸까.’ “소리앓이를 겪으면서 나의 오만을 다루기 시작했어요. 젊었을 땐 ‘내 소리 대단하지?’라며 무조건 내지르기만 했는데 긴 시간 무대 위에서 혼자 수백 명의 관객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내 체력적 한계점을 정확히 알고 에너지를 분배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죠. 소리꾼에서 직접 판소리를 만드는 작창가, 밴드 보컬, 에세이 작가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이자람은 영화를 만드는 게 다음 꿈이다. 판소리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판소리를 하는 소시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단다. ”만약 당신이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클라이막스 장면은 무엇일까요?“ 기자의 질문에 이자람은 한참을 고민하다 이렇게 답했다. ”클라이막스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엔딩신은 알겠어요. 무대를 마친 소리꾼이 분장실로 돌아와 한복을 벗고 추리닝으로 갈아 입은 뒤, 바나나를 입고 물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모습. 그게 영화의 끝이었으면 좋겠어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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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호복 입은채 손도 못잡고 임종 보는 가족… 마음 아팠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한창이던 지난해 1월, 해외에 살던 아들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급히 귀국했다. 2주간의 자가 격리 기간이 끝나기 며칠 전, 병원에서 어머니의 임종이 가까워진 것 같다고 알려왔다. 아들은 레벨D(마스크와 전신방호복, 덧신, 라텍스 장갑 및 고글 착용) 방호복을 입은 채 임종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도,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격리 기간이 끝나지 않아 환자를 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종실 문은 열어놔야 했고, 문 밖에서 의료진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코로나19는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것마저 가로막았다. 서울 노원구 원자력병원에서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한 권신영 강동대 간호학과 교수(49)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18명을 인터뷰해 코로나19로 달라진 호스피스 병동의 모습을 담은 ‘그래도 마지막까지 삶을 산다는 것’(클)을 11일 펴냈다. 서울 노원구 카페에서 18일 만난 권 교수는 “호스피스는 죽어가는 곳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에서 삶을 살아가는 곳이라고 환자와 가족에게 설명했는데, 정작 임종조차 제대로 함께하지 못하는 상황이 마음 아팠다”고 말했다. 가장 큰 변화는 병원 방문 제한. 환자의 상주보호자는 1인만 가능했고, 면회도 직계가족만 할 수 있었다. 만날 수 없는 가족이나 지인은 영상통화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손주 얼굴을 화상으로라도 보여주면 의식이 없던 환자의 미간이 떨리는 걸 보고 간호사들은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구나’라는 생각으로 환자를 돌봤다. 확진자 치료를 위한 병상이 필요해지자 입원형 호스피스가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전환됐다. 이에 따라 환자들이 병원을 옮겨야 하는 상황도 생겼다. 올해 1월 기준으로 전국의 입원형 호스피스 88곳 중 21곳이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운영됐다. 병원을 옮기라는 지침에 “어떻게 하면 임종을 빨리 할 수 있느냐”고 묻는 보호자도 있었다. 권 교수는 “옮길 병원을 알아보던 도중 환자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중환자실에서 임종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간호사들은 호스피스 간호의 본질을 고민했다. 마스크를 쓴 환자의 표정 변화를 읽기 위해 더 세밀하게 관찰했다. 병원에 오지 못하는 가족에게 환자 상태를 정확히 알리기 위해 ‘가래가 많아졌네’ 정도로 넘겼던 증상도 ‘가래 끓는 소리는 어떻게 변했는지’ 신경 썼다. 권 교수는 앞으로 의료진이 환자의 집을 찾아 돌보는 ‘가정형 호스피스’가 확산될 것으로 내다봤다. 코로나19로 입원 절차가 까다로워져 집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할머니 댁에서 임종을 지킨 이야기를 한 간호사에게서 들었는데 참 따뜻했어요. 할머니가 평생 산 시골 온돌방에서 창호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평소 입었던 한복과 버선 차림으로 돌아가셨거든요. 가정형 호스피스를 통해 집에서도 평온하게 가족을 보내드릴 수 있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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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 꺼져가는 어머니 손도 못잡아…코로나가 바꾼 호스피스 병동 모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확산이 한창이었던 지난해 1월, 해외에 거주하던 아들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2주 간의 자가격리가 끝나기 전 어머니의 상태가 위독해졌다. 아들은 레벨D(마스크와 전신방호복, 덧신, 라텍스 장갑 및 고글 착용) 방호복을 입은 채 임종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숨이 꺼져가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도,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도 없었다. 격리를 마치지 않아 환자를 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종실 문은 열어놔야 했고, 문 밖에서 관할 보건소 직원, 감염관리팀 직원, 의료진이 마치 감시하듯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코로나 19는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는 것 마저 가로막았다. 서울 노원구 원자력병원에서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로 일한 권신영 강동대 간호학과 교수(49)는 전국 각지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18명을 인터뷰해 코로나 19로 변화한 호스피스 병동의 모습을 담은 ‘그래도 마지막까지 삶을 산다는 것’(클)을 11일 펴냈다. 18일 서울 노원구 카페에서 만난 권 교수는 “호스피스는 죽어가는 곳이 아닌, 죽어가는 과정에서 삶을 살아가는 곳이라고 환자와 가족에게 설명했는데 정작 임종조차 제대로 함께하지 못하는 상황이 마음 아팠다”고 말했다. 현장 간호사들이 입을 모으는 가장 큰 변화는 병원 방문제한이다. 환자의 상주보호자는 1인만 가능해졌고, 면회도 직계가족으로 제한했다. 만날 수 없는 가족이나 지인들과는 영상통화로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했다. 어린 손주 얼굴을 화상 너머라도 보여주면 의식이 없던 환자의 미간이 떨리고 입가에 미소가 띄어지는 걸 보고 간호사들은 ‘이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구나’라는 생각으로 환자를 돌봤다. “환자에게 가족보다 더 소중한 지인이 있을 수 있어요. 내가 용서하거나 용서받아야 할 대상,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거든요. 그들과의 만남이 아예 불가능해 진거죠. 호스피스 환자들은 기력이 없기 때문에 유선전화나 화상통화로 제대로 소통하기도 힘들어요. 직접 와서 안아주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죠.” 코로나 19 확진자 치료를 위한 병상이 필요해지자 입원형 호스피스가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전환됐다. 이로인해 기존의 호스피스 입원 환자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올해 1월 기준 입원형 호스피스 88곳 중 21곳이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병원을 옮기라는 지침에 ‘이 병원에서 임종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임종을 빨리 할 수 있느냐’고 물은 보호자도 있었다. 권 교수는 “옮길 수 있는 병원을 알아보던 중 환자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일반병동이나 중환자실에서 임종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책에는 간호사들이 느끼는 무력감도 드러나 있다. 호스피스 간호는 큐어(Cure·치료)가 아닌, 케어(Care·돌봄)가 목적인만큼 환자와, 환자 가족들에게 정서적 버팀목이 돼 주는 것도 중요하다. 코로나 19로 대화와 신체 접촉을 기피하게 되면서 환자, 가족들과 교감을 나누는 것이 어려워진 것. 권 교수는 “보호자가 자신을 안으려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적이 있어 너무 죄송했다는 간호사도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 19 이후 호스피스 미래는 어떨까. 권 교수는 ‘가정형 호스피스’의 확산을 들었다. 가정형 호스피스는 의료진이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집을 방문해 돌보는 의료서비스다. 코로나 19로 유전자증폭(PCR) 검사 등 입원절차가 까다로워지면서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 권 교수는 “‘반드시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다’는 공식이 깨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됐다”고 말한다. “인터뷰한 호스피스 간호사 한 분이 할머니 댁에서 임종을 지켰던 경험을 듣는데 그 과정이 너무 따뜻했어요. 할머니가 평생을 산 시골 온돌방에서 창호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맞으며, 평소 입었던 한복과 버선 차림을 갖추고 돌아가셨거든요. 가정형 호스피스를 통해 집에서도 평온하게 가족을 보내드릴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된 건 장점이에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간호사들은 호스피스 간호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마스크를 끼고 있는 환자의 표정 변화를 더 잘 읽기 위해 환자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가족이 오지 못해 속상해하면 옆에서 위로해준다. 환자 상태에 변화가 생겼을 때는 코로나 19로 병원에 오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빨리 알려야 하기 때문에 예전엔 ‘가래가 많아졌네’ 정도로 넘겼던 증상도 ‘가래 끓는 소리는 어떻게 변했는지’까지 신경쓴다. “의료행위의 목적은 환자를 치료해서 병을 낫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죽음을 앞둔 환자가 여생을 잘 마무리하도록 돕는 것도 아주 중요해요. 마치 갓난아이가 칭얼대면 불편한지 살피고 돌아 눕히는 것처럼,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마음으로 환자들을 더 세심하게 돌보는 게 호스피스 간호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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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사람 만나는 게 두렵던 내향인, 사람 속으로 뛰어들다

    식당에서는 반드시 구석 자리에 앉는다. 어느 모임에 가든 가장 먼저 자리를 뜬다. 여러 사람이 쳐다보면 말을 하다가 머리가 하얘진다. 갖은 핑계를 대 약속을 취소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라면 ‘내향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 책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스물두 번째 생일날 대학 친구들이 그의 방에 몰래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나타나 깜짝 파티를 열었을 때 울음을 터뜨렸다. 인사만 주고받던 친구들까지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는 상황이 공포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가 감동을 받아 우는 줄 알았지만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이 사람들 도대체 언제 나가지?’ 책은 극심한 내향인인 저자가 1년간 ‘외향인으로 살기’에 도전한 이야기다. 저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데다 친한 친구마저 타지로 이사를 가 삶의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철저한 고독에 휩싸인 그는 내향적 성향 탓에 과거에 잃었던 수많은 기회를 돌아보게 된다. 비행기 옆자리의 두 남성이 가벼운 잡담을 하다 비행기에서 내릴 즈음 서로의 생일파티로 초대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비행 6시간 만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나를 스친 수백 명을 무시하며 얼마나 많은 걸 놓쳤는가.’ 외향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저자가 벌인 행동은 황당무계하다. 처음 시도한 건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것. 초밥집 옆자리에 앉은 프랑스 남성, 버스 안에서 스무고개를 하고 있는 할머니와 아이, 길거리에서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주인 등 대상은 다양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처음 만난 이들과 맥주를 마시고 전시회도 간다. 낯선 이와의 대화가 어느 정도 편해지자 그는 대규모 코미디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스탠드업 코미디까지 자처한다. 그의 개그에 아무도 웃지 않던 아찔한 순간도 웃으며 곱씹을 수 있는 추억이 됐다. 책은 일종의 심리치료서이기도 하다. 저자가 외향인이 되기 위해 자문을 한 심리치료사, 언어치료사, 심리학 교수의 조언은 실용적이다. ‘무작정 정면 돌파’가 아닌 이론에 근거한 치료법이기에 내향적 독자들이 실천해 보기도 좋다. 그중 가장 도발적인 시도는 노출 치료. 관계불안을 겪는 환자를 거절당할 게 분명한 최악의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는 심리치료다. 저자는 교수 지침에 따라 영국 런던 한복판에서 아무나 붙잡고 “영국에 여왕이 있나요? 있다면 이름이 뭐죠?”를 묻는다. 책장을 넘기며 이런 황당한 행동보다 더 놀라운 건 저자와 마주친 사람들의 반응이다. 길거리에서 붙잡고 영국 여왕이 누구냐고 물어도, 지하철에서 불쑥 ‘재킷 어디서 샀느냐’고 말을 걸어도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한 이는 아무도 없다. 저자는 외향인이 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을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과 관계를 맺을 준비가 돼 있다는 결론을 몸소 도출한다. 저자는 말한다. ‘누구도 먼저 손을 흔들진 않아요. 하지만 상대방이 손을 흔들면 모두가 손을 흔들어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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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시대 극단 선택, ‘이대녀’ 가장 많이 늘어”

    “청년자살자 증가는 직업, 주거, 인간관계에서 청년들이 다른 연령대보다 취약한 데 따른 것이다.” 최근 팬데믹 이후 청년자살자가 늘어난 원인에 대해 ‘가장 외로운 선택’(북하우스·15일 발간)을 쓴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서울시 자살예방센터장)와 이현정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팬데믹이 본격화된 2020년 20대 사망자 중 54.3%가 스스로 생을 마쳤다. 그해 20대 자살 사망자는 1471명으로 직전 해에 비해 12.6% 늘었다. 전체 연령층 가운데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2020년 우리나라 전체 자살 사망자 수는 전년 대비 4.4% 감소했다. 두 사람은 인간 삶을 지탱하는 직업, 주거, 인간관계가 팬데믹으로 인해 모두 불안해졌는데, 이 세 요소에 있어 청년층이 다른 연령대보다 더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로 자영업자들이 가게 문을 닫을 때 청년 알바생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해고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대부분 1인 가구로 원룸, 고시원, 반지하 등에 거주하는데 실업으로 월세를 내지 못해 주거 위기까지 맞게 됐다는 것. 직업을 잃고, 주거도 불안정한 상황에서 관계의 단절까지 겹쳤다. 거리 두기로 인해 친구나 친척들을 만날 기회가 크게 줄었다. 다른 연령층에 비해 친구 관계에 더 의존적인 청년층의 정서적 박탈감이 심화됐다. 김 교수는 “한국은 식당, 카페 외에 사람들이 모일 공간이 마땅치 않기에 거리 두기로 서로 만나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청년자살자 중 여성 증가율이 두드러진다. 2020년 상반기(1∼6월) 20대 여성 자살자 수는 296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43% 늘었다. 전체 성별 및 연령별 사망자 수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이는 직업, 주거, 인간관계에서 20대 여성의 타격이 가장 컸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이 교수는 “남성은 교통, 경찰 등 위기 상황에도 반드시 유지돼야 하는 필수인력 종사자 수가 여성에 비해 많다”며 “저임금 직군에 종사하는 비율도 여성이 더 높아 코로나19로 인해 생활고를 겪는 위험도 그만큼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대안으로 위기를 견딜 자원이 부족한 청년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일부 국가들은 전염병으로 인한 록다운(도시 봉쇄) 시 청년 해고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2019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신저에 자살 위기 청년을 위한 상담창을 개설했다. 김 교수는 “국가재난 발생 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대를 잘 가려내 선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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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당한 빅토리아 시대 여성 주인공… 흥미로운 상상”

    2006년 1편이 발표된 추리소설 ‘에놀라 홈즈’ 시리즈의 주인공은 셜록 홈즈(홈스)의 여동생이다. 2년 전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제작한 1편 ‘사라진 후작’은 그해 넷플릭스 영화 세계 2위에 올랐다. 올해 말 2편 ‘왼손잡이 숙녀’가 영화로 나온다. 이 작품은 에놀라 홈즈가 오빠인 셜록, 마이크로프트와 함께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 7편 ‘검은색 사륜마차’(북레시피)가 4일 국내에 출간됐다. 이 시리즈를 쓴 미국 소설가 낸시 스프링어(74)를 13일 서면으로 만났다. 그는 “에놀라 홈즈가 성공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에놀라 홈즈 캐릭터를 구상한 건 ‘잭 더 리퍼’ 시대의 음침한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써보라는 편집자의 조언이 계기가 됐다. 잭 더 리퍼는 1888∼1891년 영국 런던에서 11명의 여성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어린 시절 셜록 홈즈 시리즈를 즐겨 읽은 그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런던을 배경으로 한 원작에 착안해 에놀라 홈즈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역사소설을 써 본 적이 없던 그는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 고증을 위해 자료를 치밀하게 조사했다. 영국 배우 제러미 브렛이 주연을 맡은 ‘셜록 홈즈’ 영화 시리즈를 반복해 보며 배경을 세밀히 살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과 드레스를 담은 컬러링북을 색칠하고 이 시대 종이인형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그는 영국 민담에 등장하는 로빈 후드의 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로언 후드 이야기’를 2001년 발표했다. 로빈 후드에 이어 셜록 홈즈까지, 기존 남성 캐릭터의 여성 가족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그는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스스로 여성임을 자랑스레 여기고 당당히 살아가는 인물을 상상하는 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흥미롭다”고 답했다. 시리즈 1∼6편에서 에놀라와 셜록이 주로 대립구도를 펼친 데 비해 7편에서는 남매가 본격적으로 협력한다. 신작에서는 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동생이 형부인 백작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셜록 남매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남매는 죽은 언니가 검은색 사륜마차에 실려 가는 걸 봤다는 목격담을 단서로 범인을 추적한다. 그는 “10년 만에 펴낸 7편은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라며 “영감의 원천은 에놀라 그 자체다. 그녀는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강인하게 살아 숨쉰다”고 했다. 8편 ‘Elegant Escapade’(우아한 장난)는 올 9월 미국에서 출간된다. 총 60여 권의 소설을 발표한 그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지친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지금도 소설을 집필 중이에요. 펜을 잡을 수 있는 순간까지 계속 글을 쓸 겁니다. 글쓰기는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죠. 펜을 놓는 순간 내 활동적인 두뇌는 점점 시들기 시작할 거예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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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셜록 오빠 비켜!…“여동생 ‘에놀라 홈즈’ 성공, 상상도 못해”

    세계적인 추리 소설 ‘셜록 홈즈’는 영화, 드라마, 게임, 뮤지컬 등에서 수많은 버전으로 재해석됐다. 하지만 셜록 홈즈가 아닌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핀오프’는 2006년 나온 추리소설 ‘에놀라 홈즈’가 처음이다. 소설은 셜록 홈즈의 가상의 여동생 에놀라 홈즈가 첫째 오빠 마이크로프트, 둘째 오빠 셜록과 미제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렸다. 미국 소설가 낸시 스프링어(74)는 2011년까지 6편을 냈고, 지난해 미국에서 발표한 7편 ‘검은색 사륜마차’(북레시피)가 4일 국내 출간됐다. 2020년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제작된 1편 ‘사라진 후작’은 공개 직후 세계 넷플릭스 영화 순위 1위에 오르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 기세를 이어 제작된 2편 ‘왼손잡이 숙녀’는 올해 가을 넷플릭스에 공개될 예정이다. 13일 스프링어는 본보와 인터뷰에서 “에놀라 홈즈가 성공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밝혔다. 그가 에놀라 홈즈라는 캐릭터의 영감을 얻은 건 친한 편집자의 제안 덕이었다. 편집자는 스프링어에게 “잭 더 리퍼 시대의 어둡고 음침한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써 보라”고 제안했다. 잭 더 리퍼는 1888~1891년 영국 런던 빈민가에서 발생한 11건의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연쇄살인범. 유년시절 셜록 홈즈를 즐겨 읽었던 스프링어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셜록 홈즈에 착안해 에놀라 홈즈를 창조해냈다. 역사 소설을 써 본 적이 없던 그는 19세기 중후반 빅토리아 시대의 고증을 위해 치밀한 자료조사를 거쳤다. 그는 “제러미 브렛이 주연을 맡은 셜록 홈즈 영화를 반복해서 보며 영화 속 배경들을 세밀히 살폈다. 빅토리아 시대의 집, 건축물, 드레스 등 주제의 컬러링북을 직접 색칠하면서 데이터들을 내면화했다. 빅토리아 시대 종이인형까지 참고했다”고 말했다. 스프링어는 영국 민담 속 영웅 로빈 후드의 가상의 딸 로완 후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로완 후드 이야기’를 2001년 출간한 바 있다. 이처럼 유명한 남성 캐릭터의 여성 가족을 창조해 내 그들의 성장을 그린 소설을 내는 이유에 대해 “나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에게 역할을 부여하거나 능력을 인정하지 않던 역사적 시기에, 여성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히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마치 퍼즐을 맞춰가는 것처럼 흥미롭다”고 말했다. 1~6편에서 에놀라와 셜록이 반목했다면, 검은색 사륜마차는 둘 간의 협공에 초점을 맞춘다. 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생은 언니의 남편인 백작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에놀라와 셜록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두 사람은 의뢰인의 언니가 검은색 사륜마차에 실려가는 걸 봤다는 목격담을 단서로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스프링어는 “6편이 나온 뒤 10년 만에 7편을 내게 됐다. 7편으로 새로운 시리즈의 막이 열린 것”이라며 “끝없는 영감의 원천은 에놀라 그녀 자체다. 그녀는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강인하게 살아 숨쉰다”고 말했다. 스프링어는 8편 ‘Elegant Escapade’ 집필을 마쳤고, 올해 9월 미국에서 출간된다. 지금까지 60여 권의 소설을 낸 스프링어는 “지친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한다. “쓰는 것은 내 존재의 이유기 때문”이란다. “지금도 새로운 소설을 집필 중이에요. 펜을 잡을 수 있는 순간까지는 계속 글을 쓸 겁니다. 글을 쓰는 건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죠. 펜을 놓는 순간 나의 활동적인 두뇌는 점점 시들기 시작할 겁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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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자 고통에도 연명치료… 죽음의 가치관 바뀌어야”

    전공의 2년 차 때 말기 신부전 환자의 심정지가 발생했다. 당직 중이던 전공의들은 중환자실로 모여들었다.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담당하는 박중철 교수(47·사진)도 그중 하나였다. 그를 포함한 전공의들은 돌아가며 심폐소생술을 했다. 40분간 지속된 심장 마사지에 흉곽은 주저앉았고, 압박할 때마다 입에 꽂혀 있는 호흡관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결국 환자에게는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다음 날 비참하게 망가진 아내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환자의 남편은 “사람을 이렇게 끔찍한 몰골로 죽게 만들었어야 했느냐”며 울부짖었다. 박 교수는 10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이후 의학의 목표가 과연 사람의 행복인지, 기술의 실현인지 혼란이 생겼다”고 했다. 5일 출간된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홍익출판미디어그룹)는 그가 20여 년간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느낀 한국 의료 시스템의 문제점을 담은 책이다. 그는 의학기술의 발달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 그 과정에서 연명치료로 인해 환자가 고통받는 시간이 늘어나는 문제를 지적했다. 환자가 고통스러워도 연명치료를 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에 대해 그는 “우리 사회가 생명 가치만을 절대 추앙하는 ‘생의 전체화’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의학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매체는 중증환자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려내는 의사들을 영웅으로 그립니다. 생명 가치에만 집착하면 환자도 죽음을 재앙으로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의학의 힘을 빌려 싸우게 됩니다. 의사들도 이길 수 없는 싸움에 함께하며 비극을 만듭니다.” 그가 생각하는 ‘친절한 죽음’은 무엇일까. 그는 의료진이 객관적 의료지침에 충실한 것만이 의학적 최선이라고 여기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환자의 삶과 가치관, 나아가 정체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서사적 생명윤리’가 필요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두렵고 떨릴 때 가족과 의료인이 위로해주고 응원해주는 문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친절한 죽음입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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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분 심폐소생술 끝에 끔찍한 몰골로 죽은 환자…‘친절한 죽음’이란 무엇일까

    전공의 2년 차 때 말기 신부전 환자의 심정지가 발생했다. 당직 중이던 전공의들은 중환자실로 모여들었다.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담당하는 박중철 임상조교수(47)도 그중 하나였다. 그를 포함한 전공의들은 돌아가며 심폐소생술을 했다. 40분간 지속된 심장 마사지에 흉곽은 주저앉았고, 압박할 때마다 입에 꽂혀 있는 호흡관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결국 환자에게는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다음 날 비참하게 망가져 있는 아내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환자의 남편은 “사람을 이렇게 끔찍한 몰골로 죽게 만들었어야 했느냐”며 울부짖었다. 박 교수는 10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이후 의학의 목표가 과연 사람의 행복인지, 기술의 실현인지 혼란이 생겼다”고 했다. 5일 출간된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홍익출판미디어그룹)는 그가 20여 년간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느낀 한국 의료 시스템의 문제점을 담은 책이다. 그는 의학기술의 발달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 그 과정에서 연명치료로 인해 환자가 고통 받는 시간이 늘어나는 비인간성을 지적했다. 현행법상 심장이 뛰고 있는 상태에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경우는 뇌사 판정 후 장기기증을 결정했거나, 임종 과정에 들어섰다고 판단되는 경우다. 임종과정이란 ‘회생 가능성이 없고,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에 임박한 상태’다. 임종 과정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어려워 대부분 의료진은 의료과실에 대한 처벌을 우려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 환자를 살린다. 박 교수는 “생존했을 때 더 큰 고통과 비극에 처한다면 그 생존에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 혈압이 떨어지면 앞뒤 따지지 않고 승압제를 사용하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면 인공호흡기를 다는 사건 대응적인 의학은 환자의 행복에 기여할 수 없고, 심지어 삶을 망가뜨리는 해로운 의학”이라고 지적했다. 환자가 고통스러워도 연명치료를 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에 대해 그는 “우리 사회가 생명 가치만을 절대 추앙하는 ‘생의 전체화’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의학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매체는 중증환자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려내는 의사들을 영웅으로 그립니다. 의대 교육도 죽음과 맞서는 전사들을 양성해내고 있고요. 생명 가치에만 집착하면 환자도 죽음을 재앙으로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의학의 힘을 빌려 싸우게 됩니다. 의사들도 이길 수 없는 싸움에 함께하며 비극을 만듭니다.” 그가 그리는 ‘친절한 죽음’은 무엇일까. 그는 의료진이 객관적 의료지침에 충실한 것만이 의학적 최선이라고 여기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환자의 삶의 맥락과 가치관, 나아가 정체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서사적 생명윤리’가 필요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두렵고 떨릴 때 가족과 의료인이 위로해주고 응원해주는 문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친절한 죽음입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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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세 여동생이 본 빈센트 반 고흐를 읽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남동생 테오는 각별한 사이였다. 테오는 괴팍하고 충동적인 고흐에게 모두가 등을 돌렸을 때 고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빈센트의 임종을 지킨 것도 테오였다. 빈센트가 죽고 불과 6개월 뒤 테오 역시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빈센트의 뒤를 따라갔다. 둘은 같은 장소에 나란히 묻혔다. 빈센트와 테오의 관계는 숱하게 조명됐지만 빈센트에게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저자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고흐의 세 여동생 안나, 리스, 빌레민과 빈센트가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들을 바탕으로 빈센트의 삶을 재구성했다. 반 고흐 가문 자녀들은 일과 학업을 위해 각각 런던과 파리, 브뤼셀 등으로 흩어진 뒤 서로 마음이 담긴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세 여동생과의 관계를 통해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인물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빈센트는 자신처럼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았고 사회의 관습과 체제에 반감이 컸던 막내 여동생 빌레민과 가장 가까웠다. 둘은 종교와 미술, 문학에 심취했다는 공통점도 지녔다. 빈센트가 빌레민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불안했고, 동시에 가족에게 의지하고 싶어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사랑하는 동생아… 네가 겪었다고 언급한, 지금 내가 다시 경험하고 있는 이 우울한 상태일 때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우리처럼 기질적으로 불안한 사람을 지탱하는 데에 항상 효과적인 것은 아니야.’ 빈센트는 보수적이었던 목사 아버지를 잘 따랐던 첫째 여동생 안나와는 끊임없이 반목했다. 안나는 아버지의 죽음이 빈센트 때문이라고 여겼다. 아버지 장례 후 안나는 빈센트에게 집을 나가라고 압박했고, 작업실로 거처를 옮긴 빈센트는 테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안나는 자기가 내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집을 나가기로 마음먹은 거다.’ 빈센트가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은 예술가가 아닌 인간 빈센트 반 고흐의 모습을 보여준다. 테오 외 가족들과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살았던 빈센트가 평생 어머니와 막내 여동생 빌레민을 그리워했다는 대목은 가슴 아프다. 빈센트는 사망 한 달 전인 1890년 6월, 빌레민에게 ‘언젠가 정말이지 네 초상화를 그려 보고 싶구나’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가 그토록 그리고자 했던 빌레민의 초상화는 못 다 이룬 꿈으로 남았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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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안에 툰베리 있다… 국가 이기주의 버리고 환경 지켜야”

    2100년 프랑스 파리, 105세 과학자 막시밀리안은 6명의 동료 과학자와 함께 2025년을 회상한다. 당시 지구온난화가 심각해지자 미국, 중국, 러시아는 육류 소비 감축, 자동차 주행거리 제한과 같은 강력한 규제를 발표한다. 이에 브라질이 강력 반발하고, 미-중-러와 브라질 간 싸움을 조장해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은 브라질에 강력한 무기를 지원한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독일 작가 디르크 로스만(76·사진)의 공상과학(SF) 스릴러 소설 ‘문어의 아홉 번째 다리’(북레시피) 줄거리다. 이 책에는 기후변화를 둘러싼 선·후진국 간 갈등의 현실이 반영돼 있다. 실제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선언하자 인도, 브라질 등이 “선진국 발전의 대가를 개도국이 질 수 없다”며 반발했다. 저자 로스만은 세계 4100개 매장을 가진 헬스·뷰티숍 로스만그룹의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3일 서면 인터뷰에서 “나는 사업가이기 전에 자식과 손자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다. 기후변화는 현실이다. 즉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설 집필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신작에서 브라질에 무기를 지원하려는 세력의 음모를 폭로해 전쟁을 막은 이는 평범한 요리사 히카르두 다 실바다. 그는 식당 손님인 FC 상파울루 회장 엔리케 자코브 데 수르포에게 폭로 쪽지를 전달한다. 로스만은 “수줍어 보이는 한 소녀가 2018년 8월 스톡홀름 의회 앞에서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이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를 했다. 소녀는 그레타 툰베리”라며 “우리 안에는 히카르두나 툰베리가 있다. 육식을 줄이고 비행기를 덜 타는 소비 생활을 통해 환경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소설에서는 2025년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2100년 현재의 이야기도 진행된다. 파리에 모인 과학자 중 한 명인 자이츠는 자신이 개발한 인공 다리를 문어에게 붙여 다리가 아홉 개인 문어를 선보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로스만은 “문어는 그 자체로서 완벽하기에 더 이상의 다리가 필요하지 않다.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욕심을 비판하고자 문어를 소재로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후변화에 대처하려면 자국 이기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2020년 기준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중국이 31%로 가장 많고 미국, 인도, 러시아 순으로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소설에서처럼 미국, 중국, 러시아가 주도하는 강력한 기후 동맹이 필요합니다. 기후변화는 국가 간 경계를 뛰어넘기에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문제 해결에 어떤 이견도 없어야 합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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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상처투성이 과거를 치우고 현재를 돌려주는 일이란

    누렇게 바랜 침실 벽을 타고 흐르다 마른 갈색 액체, 얼룩진 카펫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 파리가 우글거리는 냉장고 안…. 사람이 산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이 공간은 성범죄자 셰인의 집이다. 여성과 단둘이 있는 것이 금지된 그의 집에 아무렇지 않게 발을 들인 여성 샌드라 팽커스트. 그는 호주의 특수 청소회사 STC 서비스의 대표다. 살인 자살 약물중독 학대 등 재앙이 휩쓸고 간 자리를 치워온 그에게 셰인의 집은 특별할 것이 없다. 다목적 세제와 병원용 소독제를 섞어 침실 문과 욕실 바닥의 얼룩을 지우고, 포르노 잡지 더미를 가리키며 셰인에게 묻는다. “이것들 중 버려야 할 게 있나요?” 샌드라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이자 한때 생계를 위해 성매매를 하기도 했던 성노동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폭행을 당한 강력범죄 생존자이기도 하다. 호주의 논픽션 작가인 저자는 4년 동안 샌드라와 함께 특수 청소 현장을 찾아가 샌드라의 삶과 일을 책에 담았다. 샌드라는 자살현장이나 정신질환 또는 육체적 장애로 오랫동안 방치된 집들을 청소한다.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청소하는 샌드라의 삶도 트라우마 덩어리였다. 샌드라를 입양한 양부모는 아들을 낳은 뒤 샌드라에게 “너를 입양한 건 실수였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내뱉었다. 알코올의존자(알코올중독자)였던 양아버지는 일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샌드라를 향해 손찌검을 하고 발길질을 했다.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한 그에겐 세상 역시 냉혹했다. 여장을 하고 성매매를 했던 샌드라는 소수자 중 소수자였다. 길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이 경찰에 발각되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유년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학대, 사회에서 성소수자로서 겪은 폭력은 오히려 샌드라에게 포용력을 길러줬다. 그는 밑바닥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간에게 따뜻한 유대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저자는 성폭행의 상처가 아직도 몸에 아로새겨져 있는 샌드라에게 성폭행 전과가 있는 셰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괜찮겠냐고 묻는다. 이에 샌드라는 이렇게 답한다. “고객의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난 그 이면을 봐요.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냥 정신질환의 증세일 뿐이에요.” 오물이 카펫을 뒤덮어 악취가 코를 찔러도 샌드라는 결코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집주인들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죽은 쥐 수십 마리를 모으는 동물 조련사의 집부터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숨진 35세 여성의 집까지…. 샌드라와 저자가 함께 다녔던 공간들은 이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들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돌봐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샌드라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발판 삼아 기꺼이 타인의 트라우마 속으로 들어간다. 불결함과 추악함으로 찬 공간을 깨끗이 청소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샌드라는 자신을 쓰레기 더미 속에 놓아 버린 이들의 마음 깊은 곳 상처까지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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