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

김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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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취재하는 방송·영화 담당 기자입니다. 재미를 주는 콘텐츠를 더 재밌는 기사 안에 담겠습니다.

jetti@donga.com

취재분야

2024-04-08~2024-05-08
문화 일반52%
인물/CEO10%
산업3%
검찰-법원판결3%
패션3%
음악3%
사회일반3%
인사일반3%
기타20%
  • “죽음은 백지 한 장 너머에”…유언장 같은 아홉 번째 시집

    올해 여든의 노시인은 이번 시집을 마지막이라고 여겼다. 이 다음은 없을지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펜을 잡았다. 죽음과 가까이에서 쓴 글은 마치 유언장과도 같았다. 불시에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세 딸들이 시집을 보며 그가 삶의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도록. 최문자 시인(79)은 4일 나온 그의 아홉 번째 시집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민음사)에 삶과 죽음, 청춘과 늙어감, 사랑과 후회에 대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2019년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민음사) 후 3년 만이다. 산문집을 낸 것도 ‘생에 단 한 번’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시인이 산문을 쓰는 건 ‘외도같이 느껴져’ 고집스럽게 시만 썼던 그는 14일 첫 산문집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난다)를 통해 유년시절, 고통스러웠던 순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도 담았다. 21일 서울 동작구 카페에서 만난 그는 마지막을 각오하고 글을 썼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청춘 같은 에너지를 뿜었다. “그 전에는 쓰고 싶어도 참은 것들이 있었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아무 제재 없이 막 쏟아냈어요. 바람처럼 쓰러지는 죽음도 있거든요. 나도 그렇게 죽을지 몰라. 어떤 조짐 같은 걸 미리 써야겠다, 라는 생각이 있었죠.” 마지막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 건 별안간 죽음을 봤기 때문이었다. 2014년 건강검진에서 폐암 2기를 선고받았다. 수술을 1주일 앞두고 46년을 함께한 남편을 심장마비로 잃었다. 최 시인은 남편의 장례식 직후 수술대에 누웠다. 부작용으로 진통제도 맞을 수 없어 폐의 3분의 1을 잘라낸 고통을 맨 정신으로 받아냈다. 불과 3개월 안에 일어난 일련의 비극들을 통해 최 시인은 “죽음은 백지 한 장 너머에 있다”는 것을 통절했다. 이 깨달음은 그의 시집과 산문집에 담겼다. ‘아무도 부르지 말고 피자 꽃피자/아침에도 수선화는 그냥 그렇게 피었던 거야/격렬한 신념 같은 거 없이/이런 흰 꽃이 죽어라고 피면 죽음도 그칠 줄 알았나?…꽃꿈은/설렘이 아니고 새파란 공포인거야.’(‘수선화 감정’) 산문집엔 중환자실에서 ‘아카시아꽃’을 부르짖다 숨이 멎은 한 환자에 대한 회고도 적혔다. ‘’꽃‘자 발음을 끝까지 내지 못하고 힘없이 병상에서 미끄러지는 여자를 들어올리며 간호사는 응급이 터졌다고 소리를 질렀다… 가시가 수없이 박힌 가지에 달린 아카시아꽃을 생각하며 나는 통증을 핑계로 소리내어 울었다.’ 죽음을 가까이 두니 삶을 성찰하게 됐다. 삶에 대한 성찰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회고와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최 시인은 “두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는 ‘완성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라고 했다. 산문집엔 사랑했던 것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혹시 사랑이라고 해도 사랑을 발굴하지 않았다. 다 파내고 파헤쳐진 흉터 같은 폐허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누군가 총을 겨눠도 어떤 감정은 죽지 않고 푸르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에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담겼다. ‘그해/죽은 해바라기 옆에 채송화를 심고 히말라야로 갔지’. “부모님은 나한테 기대가 컸어요. 해바라기 같이 크고 빛나는 사람이 되라 하셨죠. 근데 채송화만도 못하게 됐어요. 대학 자퇴를 했고, 가출도 했고,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도 했죠. 내가 아이 셋 키우면서 시도 못쓰고 최악의 시기를 지날 때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해바라기가 되는 걸 끝내 못 보시고. 여전히 부채의식이 있죠.” 일평생 후회하는 사랑만 했다는 그는 청춘에게 아낌없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단순히 사람을 향한 사랑만이 아니다. 사물이나 일, 이상향, 또는 신을 향한 사랑이 될 수도 있다. ‘한창 뜨거울 때, 한창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울 때 이 뜨거움과 부드러움의 힘으로 누군가를 힘껏 사랑하고 힘껏 돕고 힘껏 녹여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일이다. 평생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 되어보지 못했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 “산문집 제목처럼 우린 늘 사랑하는 대상을 밖에다 세워놓고 끝을 맺어요. 깊이 사랑할수록 더 깊이 두려워하는 게 인간 본성인가봐요. 근데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 사랑은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돼 있거든요. 밖에 세워 놓은 사랑이 떠나면 전부 후회되는 거죠. 이별과 맞닥뜨렸을 때 안타깝지 않도록, 후회하지 않도록 내 안에 다 받아들이고, 나도 누군가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번 시집이 마지막이라도 아쉬움은 없다던 그는 인터뷰 말미에 ‘만약’이라고 운을 뗐다. “만약 또 한 번의 시집을 낸다면, 아주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어요. 이번에 쓴 것처럼 갈등으로 가득한 것 말고. 근데 그건 내 희망사항입니다. 그런 기회가 올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죠.” “봉지에 덜렁 넣어오기 뭐해서 오는 길에 예뻐 보이는 가방 하나 샀어요.” 시집과 산문집을 넣은 베이지색 에코백을 그가 건넸다. 올해 6월 영어로 번역된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를 들고 혼자 미국으로 떠난다며 설레어하는 그는, 늙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며 눈을 빛내던 그는, 여전히 청춘이었다.김재희기자 jetti@donga.com}

    •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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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피카소의 뮤즈’가 아닌, 불꽃 같은 예술가를 만나다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그와 공식적인 연인관계였던 여성만 7명. 그중 유명한 이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9년간 피카소와 함께했던 도라 마르(1907∼1997)다. 연인의 초상화도 다수 그렸던 피카소는 마르를 뮤즈 삼아 ‘우는 여인’(1937년)이라는 유명한 작품도 남겼다. 마르는 당시 패션과 광고사진으로 이름을 알린 사진작가였고, 다양한 그림을 남긴 화가였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작가’보단 ‘피카소의 연인’으로 더 유명해졌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열정과 광기, 공허함으로 점철됐던 마르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재조명한다. 저자가 마르의 발자취를 추적하게 된 계기는 한 권의 다이어리였다. 남편이 아끼던 에르메스 다이어리를 잃어버린 저자는 이와 가장 비슷한 중고 제품을 이베이에서 주문했다. 배송된 다이어리 안주머니에 샤갈, 라캉, 자코메티 등 예술가들의 주소록 수첩이 끼워져 있었던 것. 이 수첩이 마르의 것임을 확신한 저자는 2년 동안 수첩에 적힌 이름과 관련된 자료, 기사를 뒤졌고 생존 인물을 직접 찾아다녔다. 책은 마르가 누군가의 뮤즈가 아닌 예술가로 인정받고자 노력한 과정을 따라간다. 마르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스페인과 영국의 가난한 동네를 다니며 실업자, 기형의 몸을 가진 사람 등 사회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로 평가받는 그의 대표작 ‘무제’(1933년)는 거대한 소라에서 매니큐어를 칠한 손이 뻗어 나오는 모습을 담았다. 몽환적이고 기이한 마르의 몽타주 작품들 역시 실험성과 참신함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예술가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사랑을 갈구했던 한 여자로서의 삶도 그려진다. 피카소를 비롯한 연인들과의 관계에서 마르는 늘 감정에 솔직했고 적극적이었다. 때때로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은 광기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가 피카소와 만나기 전 연애했던 프랑스 시나리오 작가 루이 샤방스가 마르에 대해 남긴 시는 불같은 마르의 성격을 추측하게 한다. ‘그대 이제 흔들리는구나. 신경질 가득한 미친 여인…내가 바친 사랑의 대가로 내 배를 걷어찼지.’ 처음 피카소와 만난 카페 되 마고에서 마르는 피카소의 시선을 끌기 위해 손가락 사이로 칼을 내리꽂았고, 마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피카소는 그를 카페에 데려온 시인 폴 엘뤼아르에게 이렇게 묻는다. “저 이상한 여자를 압니까?” 유명 예술가의 삶에는 늘 영감의 원천이 되는 뮤즈가 존재했다. 근대조각의 시조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아내였던 에밀리 플뢰게가 대표적이다. 클로델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뮤즈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조각에 천재적 재능을 드러냈던 조각가였다. 플뢰게 역시 바람둥이 클림트가 유일하게 평생 사랑했던 여성으로 유명할 뿐, 오스트리아 유명 패션디자이너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르의 삶은 누군가의 뮤즈이기 이전에 한 명의 예술가로서 창작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사랑에 늘 솔직했던 한 주체적인 여성이 있음을 몸소 증명한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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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와 조카 잃은 후 1000일 하고도 68일…여전히 악몽의 웅덩이

    [안인득 방화살인, 그 후 1068일의 기록]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2/jinju)를 방문해 보세요.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다큐멘터리 일러스트 형식으로 금세은 씨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이 또 늘었다. 금세은 씨(43)는 매일 10가지의 신경정신과 약 22알을 복용하고 있다. 추가된 약은 항우울제 0.5알과 불안, 경련을 완화하는 약 3알. 이제 하루에 알약 26개를 삼켜야 한다. 지난해 12월 30일 경남 진주시 경상국립대병원 신경정신과 진료실에서 세은 씨는 주치의 김봉조 교수와 마주 앉은 채 얼굴을 감싸 쥐었다. 2019년 11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우울증 진단을 받은 지 2년 4개월. 알약 2만 개가 그의 몸 안에 쌓였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그날’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이내 그를 덮친다. 약은 순서를 바꿔가며 찾아오는 전신 떨림, 두통, 호흡곤란, 불면증을 잠시 멎게 하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불면증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약을 한꺼번에 다 먹었어요.”(세은 씨)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괴로우니 그렇지. 근데 약 한꺼번에 먹으면 절대 안 돼요.”(김봉조 교수) 세은 씨는 오늘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듣지 못했다. 진료실을 나온 그는 병원 1층 약국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멍한 눈으로 약사로부터 A4 용지 네 장에 달하는 복약지도서와, 약 봉투가 가득 담긴 검은색 비닐봉지를 받아 들었다.악몽 같은 3년… “안인득 방치한 국가, 왜 책임지지 않습니까” ○ 10분 만에 달라진 삶1000일 하고도 68일 전, 2019년 4월 17일 전의 세은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치위생학과를 나와 스물세 살 때부터 시작한 치위생사 일이 잘 맞았다. 환자 상담까지 도맡았다. “예전엔 사람 만나는 데 대한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싫고 눈도 잘 못 마주치겠어. 예전의 내 모습이 그리워요.” 3남매를 위해 집안일만 하며 살았던 어머니가 나이 들어서는 손에 물 묻히지 않고 편히 사는 게 세은 씨 소원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마흔 살까지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며 졌던 집안 빚도 갚아가고 있었다. 매일 알약 26알로 버티는 생존자빗물만 봐도 ‘그날 핏물’ 트라우마… 20년 일했던 치위생사 결국 관둬“숨져가던 엄마 모습 아직도 생생” “가족 위해서 고생만 했던 우리 엄마 이제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좋은 옷 입고 편하게 살길 바랐지. ‘엄마, 이제 (통장) 플러스 된다. 쪼매만 기다려라’ 했는데….” 자칭 ‘일벌레’이자 효녀였던 세은 씨는 2019년 4월 17일, 180도 다른 사람이 됐다. 그날 오전 4시 25분, 경남 진주시 A아파트 303동. 조현병을 앓던 이 아파트 406호 주민 안인득(45)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미리 준비한 흉기를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휘둘렀다. 화재경보음에 잠에서 깨 비몽사몽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주민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고작 10분 만에 5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숨진 5명 중 2명은 세은 씨의 가족이었다. 그는 불과 10분 사이 어머니 김모 씨(당시 65세)와, 딸처럼 예뻐했던 조카 금지윤(가명·당시 12세) 양을 잃었다. 세은 씨는 진주 방화·살인사건의 생존자이자 유가족이다.○ 웅덩이에 빠진 날세은 씨는 3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사건 당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머니와 맥주 한 잔을 하고 오전 3시쯤 잠에 든 세은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의 소란에 눈을 떴다. “살려주세요!” 올케 차모 씨(44)의 비명이 들렸다. 세은 씨 오빠 금민수(가명·47) 씨 부부와 딸 지윤 양도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놀란 어머니가 복도로 뛰쳐나갔다. 5분 정도가 지나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세은 씨도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뿌연 연기가 복도에 가득했다. 복도를 지나 방화문을 열자 얼굴에서 피를 흘리는 경비원이 “수건 달라”고 외쳤다.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가 수건을 챙겨 현관문을 다시 열자 바로 앞에 올케 차 씨가 서 있었다. “지윤이랑 어머니 죽는다! 신고해야 된다!” 차 씨도 안인득에게서 딸을 보호하다 옆구리를 흉기로 찔린 상태였다. 세은 씨는 떨리는 손으로 112를 눌렀다. “지금 아파트가 피바다예요. 조카랑 엄마도 칼에 찔려서 피가 많이 나요. 빨리 와주세요!” 비상계단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주민들을 지나 1층으로 내려온 그의 눈에 어머니와 지윤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어머니도 손녀 지윤이를 지키려다 부상을 입었다. “엄마 지혈을 (소방대원이) 저보고 도와 달랬어요. 그래서 (엄마) 목을 받쳐갖고 지혈을 하는데 지혈이 안 돼. 다리며 이마며 피가 흥건해. 엄마 눈을 봤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야….○ 빗물은 핏물이 됐다 세은 씨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 민수 씨네 가족은 비 오는 날엔 늘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사건 이후 비 오는 날은 세은 씨에게 공포가 됐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만 봐도 그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어느 날 나가려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비가 와서 문 앞에 물이 가득한 거라. 그걸 보는 순간 그날 복도에 고여 있던 피 웅덩이가 바로 떠올랐지.” 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그는 20년간 했던 치위생사 일도 그만둬야 했다. 환자들을 치료할 때 나는 피 냄새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딸을 잃은 오빠 민수 씨의 삶도 여전히 2019년 4월 17일에 멈춰 있다. 안인득은 민수 씨와 같은 통로에 살았다. 사건 당일, 문틈을 넘어오는 매캐한 연기에 잠에서 깬 민수 씨는 아내와 딸 지윤이를 깨워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그러곤 옆집 문을 두드려 이웃들을 깨웠다. 이웃들을 뒤따라 내려가던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딸과 어머니를 마주해야 했다. “같이 내려갔으면 내가 죽었어도 아(딸)는 살렸을 거 아이가. 내가 왜 연기 빼고 불났다고 문 두드리고…. 그게 제일 큰 실수라. 내가 미친놈이지.”○ 원망할 수 없는 이유민수 씨가 유독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민수 씨는 안인득의 형과 고등학교 친구였다. 민수 씨는 빵을 사다 주기도 하며 친구 동생을 챙겼다. 안인득 역시 처음에는 평범한 이웃 아저씨였다. “가(안인득)가 애들 먹으라고 과자를 보따리로 사주고 한 놈이라. 조현병인 줄도 몰랐지. 그냥 낯을 좀 많이 가리는 줄 알았어. 근데 병이 심해지니 (지윤이를) 못 알아본 기라.” 약도 먹지 않고 입원도 거부하며 안인득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사건 수개월 전부터 주민들을 향해 폭언을 하고 오물을 던졌다. “모두가 피해자” 국가에 손배소송안인득 형, 동생 입원위해 백방노력… 檢-警-동사무소 모두 책임 떠넘겨“조현병 환자가 왜 밉노?… 방치돼 있었던기 잘못이지” 사건 약 한 달 전, 안인득은 흉기를 사용한 폭행사건을 일으켜 경찰에 입건됐다. 동생을 걱정한 안인득의 형은 경찰서에 전화를 해 “조현병 환자인 동생을 강제입원시킬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경찰은 “사건을 검찰에 넘겼으니 검사에게 문의하라”고 했다. 검찰청 민원실에선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법률구조공단은 “동사무소나 시청으로 가라”고 했다. 동사무소는 “강제입원은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조현병 환자였던 안인득, 그런 동생을 입원시키려 사방팔방으로 뛰었던 그의 형이자 자신의 친구. 민수 씨는 딸과 어머니를 잃고도 누구 하나 속 시원히 원망할 수 없었다. ○ 국가에 책임을 묻다 사건 뒤 어려워진 생계보다도 힘들었던 건 누구도 사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경남지방경찰청 진상조사팀이 조사를 벌여 경찰 조치가 미흡했다고 인정했지만 관련 경찰 5명을 경징계하고 2명을 경고 처분하는 데 그쳤다. 갈 곳 없는 분노와 원망은 스스로를 향했다. 불면증과 불안 증세로 약을 먹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술에 기대 하루하루를 보냈다.민수, 세은 씨 남매가 일상을 잃은 채 살아가던 2020년 봄, 전화 한 통이 왔다. 대한신경정신학회였다. 조현병 환자의 강력범죄사건이 매년 반복되면서 학회는 관련 법 개정에 나선 상태였다. 학회는 중증정신질환자는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법 개정을 위해 국가 대상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 달라고 했다. 소송을 위해 다시 사건을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남매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족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조현병 환자가 왜 밉노? 그 사람들도 아픈 사람이다. 방치돼 있었던기 잘못이지. 약만 먹으면 괜찮았을 사람이 범죄자가 되고, 그 사람 가족까지 죄인이 되는 기고. 안인득도, 안인득 형도 피해자다.”(민수 씨) 세은 씨와 민수 씨 가족은 지난해 11월 8월 대한민국을 피고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장을 행정법원에 제출했다. “조금 괜찮아져서 소송을 하게 됐느냐”고 묻자 민수 씨가 답했다. “괜찮아져서가 아니라 괜찮아지려고 소송을 하는 기다. 이렇게라도 해야 억울함이 풀릴 것 같으니까.” ○ 눈물의 웅덩이가 마를 때까지세은 씨는 매년 추석, 설날마다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를 찾는다. 어머니가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숨을 쉰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소장 제출 직후 아파트를 찾은 세은 씨는 아파트 정문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사건이 났던 303동을 향했지만 그 앞까지 가진 못했다. 검정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세은 씨는 한참 떨어진 309동 앞 벤치로 겨우 걸음을 옮겼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303동을 바라보던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한참 동안 사진을 쳐다봤다. “우리 엄마 예쁘죠? 이렇게나 사진이 많은데 그날 아파트 입구에 쓰러져 있던 사진은 없어. 찍어 놓을 걸…. 엄마 마지막 모습 기억하게….” 오늘도 세은 씨는 그날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다. 다른 누군가는 이들이 빠졌던 웅덩이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1068일분의 고통을 다져 길을 고르고 있다. ‘보호자 없는 정신질환자’ 관리 사각지대… “국가책임제 필요” 입원 거부자 경찰 호송 쉽지않고, 가족없는 1인가구는 더 어려워인권단체 “제도 개선 필요성 인정… 인권 살피고 예방 치료도 힘써야” 금민수(가명), 금세은 씨 가족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통해 경찰이 법에 명시된 정신질환자 대응 매뉴얼을 따르지 않아 범죄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차 공판 기일은 4월 21일로 약 한 달을 남겨두고 있다. 정신건강복지법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칠 위험이 큰 정신질환자를 본인 의사에 반해 입원시키는 ‘비(非)자의 입원’ 제도가 규정돼 있다. 하지만 금 씨 가족과 대한신경정신학회 등 관련 단체들은 이런 제도가 유명무실하다고 지적한다. 안인득은 △타인에게 위협을 가한 전력이 있고 △폭행, 욕설 등 공격적 성향이 지속된 경우로 비자의 입원을 충분히 검토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실제로는 입원하거나 치료받지 못했다. 비자의 입원 중 행정입원은 전문의 진단이 필수다. 하지만 정신질환자로 보이는 사람을 전문의에게 강제로 호송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응급입원은 상황이 급박해 다른 절차가 불가능할 때에만 가능하다. 경찰이 인권침해 논란을 무릅쓰고 절차를 밟기 어렵다. 이 때문에 가족에 의한 ‘보호입원’이 전체 비자의 입원 80%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안인득처럼 혼자 살며 직계혈족, 배우자가 없는 경우 보호입원이 불가능하다. 직계혈족, 배우자, 민법상 후견인 중 2명이 신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학회 법제이사는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정신질환자를 보살필 가족이 없어지고 있다. 국가책임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진국은 비자의 입원 신청 권한을 광범위하게 열어둔다. 미국 32개 주에서는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일본도 ‘정신장애인 또는 그 의심이 있는 사람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 신청 권한을 인정한다. 정신장애인 인권단체도 비자의 입원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극단적인 상황을 미리 방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박환갑 사무국장은 “상태가 악화되기 전에 미리 상담하고 외래치료를 받도록 하는 등의 환자 관리 시스템이 우선돼야 한다”며 “이송, 치료 과정에 인권침해 여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웅덩이: 1068일의 기록’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기사를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original.donga.com/2022/jinju)로 연결됩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김재희 남건우 신희철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 ▽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김태희 인턴 김신애 CDQR코드를 스캔하면 기사를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original.donga.com/2022/jinju)로 연결됩니다.}

    • 20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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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분 만에 죽은 엄마와 조카… 눈물의 웅덩이는 마르지 않는다

    [안인득 방화살인, 그 후 1068일의 기록]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2/jinju)를 방문해 보세요.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다큐멘터리 일러스트 형식으로 금세은 씨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이 또 늘었다. 금세은 씨(43)는 매일 10가지의 신경정신과 약 22알을 복용하고 있다. 추가된 약은 항우울제 0.5알과, 불안, 긴장, 경련 증상을 완화하는 약 3알. 이제 세은 씨는 하루에 알약 26개를 삼켜야 한다. 지난해 12월 30일 경남 진주시 경상국립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 진료실에서 주치의 김봉조 교수와 마주 앉은 세은 씨는 약을 늘리자는 김 교수의 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2019년 11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와 우울증 진단을 받은 그가 하루에 먹었던 알약은 20~30개 사이. 2년 2개월 동안 알약 2만 개가 그의 몸 안에 고스란히 쌓였다.베개에 머리만 대도 목 뒤까지 저릿해지는 편두통에 급격한 시력 저하까지 겹치면서 세은 씨는 며칠 전 같은 병원에서 뇌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다. “뇌에 문제는 없다”는 의사의 말에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2년 넘게 약을 먹었지만 ‘그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내 그를 덮쳤다. 약은 순서를 바꿔가며 찾아오는 전신 떨림, 두통, 호흡곤란, 불면증을 잠시 멎게 하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플 수 있어요? 이제 내 몸한테도 화가 나.” (세은 씨)“부작용 문제로 항우울제를 다 바꿨는데 2개월 넘게 기대하는 효과가 안 나와서…. 최근에 나온 약으로 바꿔 봅시다.” (김봉조 교수)“불면증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약을 한꺼번에 다 먹었어요.” (세은 씨)“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괴로운 게 해결이 안 되니 짜증 안 나는 게 이상하지. 근데 앞으로 그렇게 약 한꺼번에 먹으면 절대 안 돼요.” (김봉조 교수)세은 씨는 오늘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듣지 못했다. 진료실을 나온 그는 병원 1층 약국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검정색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약사로부터 A4 용지 네 장에 달하는 복약지도서와, 약 봉투가 가득 담긴 검정색 비닐봉지를 받아 들었다. “엄청 심각한 병 걸린 사람 같죠? 이게 2주치야, 2주치. 2주 뒤에 와서 이만큼 또 받아야 돼.”주치의도 그런 세은 씨가 안쓰럽다. 김봉조 교수는 “시기에 따라 환자를 심하게 괴롭히는 증상이 달라질 뿐 처음 진료 때와 비교해 나아진 점은 없다”며 답답해했다. “환자가 겪은 외상이 워낙 크다보니 장기간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고, 다른 PTSD 환자에 비해 증상도 다양하고 깊게 나타납니다. 예전엔 잠을 못 자는 증상이 심했고 최근에는 두통, 시야 가림 증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요. 약을 바꾸며 다양한 시도는 하고 있지만 환자나 의사가 기대하는 효과에는 아주 못 미치는 상황입니다.”10분 만에 달라진 삶2019년 4월 17일 이전의 세은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일 중독’이었다. 치위생학과를 나와 스물세 살 때부터 시작한 치위생사 일이 잘 맞았다. 환자들과 대화하는 것도 즐거웠다. 일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치과 원장은 그에게 환자 상담도 맡겼다. “사람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게 180도 변했어. 지금은 사람을 보자마자 꺼리기부터 하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싫고 눈도 잘 못 마주치겠고. 예전의 내 모습이 그리워요. 지금은 내 자신이 바보 같아.”‘엄마는 내 삶의 목표’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끔찍한 효녀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3남매를 위해 집안일만 하며 살았던 엄마가 나이 들어서는 손에 물 묻히지 않고 편히 사는 게 세은 씨의 소원이었다. 엄마를 위해 세은 씨는 스물세 살부터 마흔 살까지 17년을 한 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며 졌던 집안 빚도 다 갚아가고 있었다. “가족 위해서 고생만 했던 우리 엄마 이제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해외여행도 가고 좋은 옷 입고 편하게 살길 바랐지. 우리는 영세민이잖아. 빚 갚으면서, 그 와중에 되는대로 돈 모으면서 열심히 살았어. ‘엄마, 이제 (통장) 플러스 된다. 조매만 기다려라. 한두 달 안 남았다’했는데….”자칭 ‘일벌레’이자 효녀였던 세은 씨는 2019년 4월 17일, 180도 다른 사람이 됐다.그날 오전 4시 25분. 경남 진주시 A아파트. 조현병을 앓던 이 아파트 406호 주민 안인득(45)은 이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집 전체에 번지게 했다. 미리 준비한 흉기를 양손에 쥐고 비상계단에서 대기하다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휘둘렀다. 화재경보음에 잠에서 깨 비몽사몽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주민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얼굴, 목, 가슴 등에 상처를 입었다. 4시 32분, “누군가 흉기로 사람을 찌른다.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다”는 최초 112 신고가 접수됐다. 3분 뒤인 4시 35분 경찰 5명이 현장에 도착해 10분간 대치 끝에 안 씨를 검거했다. 5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친 뒤였다. 숨진 5명 중 2명은 세은 씨의 가족이었다. 그는 불과 10분 사이 ‘삶의 목표’였던 어머니 김모 씨(당시 65세)와, 딸처럼 예뻐했던 조카 금지윤 양(가명·당시 12세)을 잃었다. 세은 씨는 진주 방화·살인사건의 생존자이자 유가족이다.웅덩이에 빠진 날딸을 피지로 유학 보낸 세은 씨는 엄마와 함께 아파트 303동 304호에 살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엄마와 맥주 한 잔을 하고 17일 새벽 3시쯤 잠에 든 세은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의 소란에 눈을 떴다. 이내 “살려주세요!”라는 올케 차모 씨(44)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세은 씨 오빠 금민수 씨(가명·47)네 부부와 딸 지윤 양도 이 아파트 403호에 살았다. 놀란 엄마는 복도로 뛰쳐나갔다. 5분이 지나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세은 씨는 잠옷에 슬리퍼 차림으로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뿌연 연기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어렴풋이 들리는 듯 했다. 복도를 지나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방화문을 열자 경비원이 있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수건 달라”고 외쳤다. 경비원 뒤로 보이는 복도 계단이 피로 가득했다. ‘뭔가 사달이 났구나.’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가 화장실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수건을 여러 장 챙겼다. 다시 현관문을 열자 바로 앞에 올케 차 씨가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아비규환 속 차 씨의 울부짖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윤이랑 어머니 죽는다! 신고해야 된다!” 차 씨도 안인득에게서 딸을 보호하다 옆구리를 흉기로 찔린 상태였다. 세은 씨는 떨리는 손으로 112를 눌렀다.“지금 아파트가 피바다에요. 조카랑 엄마도 칼에 찔려서 피가 많이 나요. 곧 죽을 거 같아요. 빨리 와주세요!”신고를 마치고 비상계단을 정신없이 내려갔다. 3층과 2층 사이엔 507호 주민 조모 씨가 피를 흘린 채 누워있었다. 조 씨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3층을 지나 2층 계단으로까지 뚝뚝 떨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세은 씨는 몸에 수건을 덮어줬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몸을 전혀 움직이질 못했지. 그 상태로 나랑 눈이 마주친 거야.”1층으로 내려온 그의 눈에 엄마와 지윤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엄마도 손녀 지윤이를 지키려다 부상을 입었다. 2층 계단에 쓰러져 있던 두 사람을 민수 씨가 1층으로 옮긴 뒤였다. “우리 조카는 숨을 쉬고 있었어요. 근데 구조대원들이 지혈을 안 해. 지혈을 안 하니 피가 펑펑 나는 거야. 목에서도 나고 팔에도 나고. 내가 “지혈 안 하고 뭐 하냐”고 하니까 엄마 지혈을 (소방대원이) 저보고 도와 달래. 그래서 (엄마) 목을 받쳐갖고 지혈을 하는데 지혈이 안돼. 다리며 이마며 피가 흥건해. 엄마 눈을 봤는데 이미….”세은 씨는 지금도 자신의 손 안에서 온기를 잃어 가던 어머니의 피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빗물은 핏물이 됐다304호에 살았던 세은 씨와 엄마, 403호에 살았던 오빠 민수 씨네 가족은 1주일에 두 세 번은 함께 밥을 먹었다. 비 오는 날은 틀림없이 모였다. 땡초 넣은 ‘엄마표’ 된장찌개와 감자전, 삼겹살, 두루치기는 단골 메뉴였다. “비 오는 날 제가 ‘언니(올케), 비와요. 땡초전 묵으까?’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얼마 안 있어 새언니한테 전화가 와요. ”땡초 사오라.“ 그럼 퇴근길에 슈퍼 들러서 밀가루랑 땡초랑 맥주 사서 가요.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했는데…”가족들 맥주파티 하던 비 오는 날은 이제 세은 씨에게 공포가 됐다. 비 오는 날 물이 고인 웅덩이만 봐도 그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파트 복도에 창문이 없으니 비가 오면 다 들쳐요. 이사 오고 얼마 뒤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었어요.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 물이 가득한 거야. 그걸 보는 순간 그날 복도에 고여 있던 피 웅덩이가 바로 떠올랐어요.”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그는 20년 간 했던 치위생사 일도 그만 둬야 했다. 환자들을 치료할 때 나는 피 냄새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 냄새를 맡으면 우리 엄마 응급처치 하면서 피가 펑펑 나던 그 모습이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해.” 사건 직전이었던 2019년 초 한 모임에서 세은 씨와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 김진석 씨(가명)는 사건 직후부터 그를 곁에서 지켰다. 호흡곤란, 전신 떨림, 해리성 기억장애, 불면증, 극심한 두통을 달고 사는 세은 씨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불치병인 것 같아요. 100미터만 걸어도 숨 차하고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듯 놀라요. 식당 갔다 공황발작이 오기도 하고…. 당당하고 밝은 사람이었는데 모든 게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거죠.”김 씨는 세은 씨가 순간순간 기억을 잃는 증상을 가장 걱정한다. 주치의는 PTSD로 인한 해리성 기억장애라고 진단했다. 처음은 건망증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을 갔던 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지난해 8월에는 비 오는 날 한밤중에 두 시간동안 비를 맞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세은 씨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 한다. 자정 무렵 오빠 네에서 밥을 먹고 대리를 불러 집에 간다던 세은 씨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세은 씨 지인에게 연락을 돌리고 아파트 주변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새벽 두 시가 다 된 시간에야 집 근처에서 비를 맞으며 멍한 눈으로 걷는 세은 씨를 발견했다. “세은아!”라고 불렀지만 세은 씨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날 김 씨 부축을 받아 집에 돌아온 세은 씨는 목 놓아 울었다.“증거 남기듯 사진을 찍는 게 습관이 됐어요. 어디 갔었는지도 기억 못 할 때가 있으니까 사진 보여주며 ‘우리 여기 갔었잖아’ 하려고. 둘 다 사진 찍는 것 정말 싫어하는데 계속 연습을 해요.” (김 씨)바꾼 이름, 바뀌지 않는 삶세은 씨의 오빠 민수 씨와 그의 아내, 첫째 딸은 2019년 말 이름을 바꿨다. ‘이름이 잘못 돼서 온 가족에게 이런 비극이 닥쳤나’ 하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개명을 택했다. 늘 아빠 옆에서 잠을 자던 둘째 딸 지윤이,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 끓여놨다고 전화하던 어머니가 없다는 현실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이름은 바뀌었지만 민수 씨의 삶은 여전히 4월 17일에 멈춰 있다. 안인득은 그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다. 같은 층에 살았던 민수 씨네 집 현관으로 이내 연기가 슬금슬금 넘어왔다. 민수 씨는 아내와 딸 지윤이를 깨워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수영선수인 첫째 딸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해 집에 없었다.가족들을 내려 보낸 그는 옆집 문을 두드리며 사람들에게 대피하라고 알렸다. 다른 사람들 뒤를 따라 마지막에 내려왔다. 그리고 어머니와 딸이 피를 흘리며 2층 계단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이 나서 가족들을 내려 보냈는데 애하고 할매(어머니)가 누워 있어. 같이 내려갔으면 내가 죽었어도 아는 살렸을 거 아이가. 내가 왜 연기 빼고 창문 열고, 불났다고 문 두드리고…. 그게 제일 큰 실수라. 내가 미친놈이지.”언니 금모 양(19)은 사건 1년이 지나고서야 가족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차 씨가 금 양을 학교에 데려다 주려던 일요일이었다. 방에서 짐을 챙기는 금 양의 눈이 벌겠다. “울었나?” 묻는 엄마의 질문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차 안에서도 묵묵부답이던 금 양은 기숙사 앞에서 “도대체 왜, 뭐 땜에 그카노?”라는 엄마의 질문에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동생이 너무 보고 싶다, 엄마. 운동장 뛸 때도 생각나고, 수영할 때도 생각나고, 밥 먹을 때도 생각난다. 그래서 미치겠다. 너무 힘들고 너무 보고 싶다. 미치겠다, 엄마.”원망할 수 없는 이유민수 씨는 안인득의 형과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 진주는 동네가 좁아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았다. 민수 씨는 빵을 사다 주기도 하며 친구 동생을 챙겼다. 안인득 역시 처음에는 평범한 이웃 아저씨였다.“가(안인득)가 애들 먹으라고 과자를 보따리로 사 주고 한 놈이라. 그냥 낯을 좀 많이 가리는 줄 알았어. 내가 ‘밥 묵었나’ 하면 ‘예’ 하며 지냈어. 근데 조현병이 심해지니 (지윤이를) 못 알아 본 기라.”동생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안인득의 형은 민수 씨에게 ‘고함지르는 소리 안 들리드나?’ ‘시끄러운 일은 없었나?’라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술자리에선 “동생이 아픈데 약을 안 먹는다”며 걱정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엔 동생이 집에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내가 가면 문도 안 열어준다. 집에 있는지 확인해보고, 있으면 전화 좀 주라.” 형은 걱정을 하면서도 동생이 조현병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민수 씨는 “알겠다”고 하고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약도 먹지 않고 입원도 거부하는 동생을 두고 형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수개월 동안 주민들은 안인득의 오물투척, 폭행, 폭언 등으로 애를 먹고 있었다.안인득의 주요 타깃은 윗집인 506호 주민 최모 양(당시 19세)과 그의 숙모 강모 씨(57)였다. 안인득은 윗집에서 자신의 집에 벌레를 뿌린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2018년 9월부터 사건 전까지 다섯 번에 걸쳐 506호 현관문에 계란, 간장 등 오물을 투척했다. 직접 위협도 일삼았다. 2019년 2월 28일, 안인득이 출근을 하는 강 씨에게 계란을 던지고 욕설을 했다. 강 씨는 신고했지만 경찰은 “임대아파트라 이런 신고가 많다. 화해하라”고만 한 뒤 돌아갔다. 3월 10일, 안인득은 주차 시비가 붙은 사람의 얼굴을 가격하고 망치를 휘둘러 특수폭행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형은 경찰에 “동생이 정신병력이 있다”고 알렸지만 경찰은 별다른 조치 없이 안인득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3월 12일과 13일, 안인득은 이틀 연달아 최 양을 따라가며 욕을 했다. 집에 들어가는 최 양을 뒤따라가 초인종까지 눌렀다. 최 양은 1급 시각장애로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뇌병변 장애로 몸의 반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고등학생이었다. 13일 강 씨가 경찰에 재차 신고해 “안인득이 더 이상 이런 짓을 못 하게 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경찰은 안인득에 구두 경고를 주는데 그쳤다. 3월 말 안인득은 진주의 한 주방용품점에서 흉기를 샀다. 사건 당일 그가 주민들에게 휘두른 것과 같은 흉기였다.형은 연락이 닿지 않는 동생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걱정이 됐다. 4월 4, 5일 이틀에 걸쳐 안인득을 입건했던 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동생을 강제입원 시킬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경찰은 “사건을 검찰에 넘겼으니 검사에게 문의하라”고 답했다. 검찰청 민원실도 책임을 떠넘겼다. 직원은 “검사를 만나더라도 강제입원은 어렵다”며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법률구조공단은 “행정기관이 처리해야 한다. 동사무소나 시청으로 가라”고 했다. 동사무소에서는 “강제입원은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건 당일인 4월 17일, 자정이 넘은 시간 안인득은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샀다. 3시간 반 뒤, 안인득은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다. 안인득에게 집중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최 양은 그날 안인득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세은 씨의 조카이자 민수 씨의 딸도, 두 사람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잃은 대가, 5000만 원조현병 환자였던 안인득, 그런 동생을 입원시키기 위해 사방팔방 뛰었던 그의 형이자 자신의 친구. 민수 씨는 딸과 엄마를 잃고도 누구 하나 속 시원히 원망할 수 없었다. 분노와 설움은 스스로를 향했다. 하루에 소주를 6병 씩 비우는 날이 허다했다. 사건 직후 1년은 술과 정신과 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매일을 보냈다.사건 후 나라가 피해자이자 유족인 세은 씨와 민수 씨에게 진 책임은 치료비 5000만 원이 전부다. 방화죄, 살인죄, 상해죄 등 강력범죄피해자는 연 1500만 원, 총 5000만 원 한도에서 치료비를 받을 수 있다. 살해된 조카를 구하려다 칼에 맞아 중상을 입은 506호 강 씨는 수술과 재활치료가 이어져 이미 5000만 원을 다 썼다. 강 씨의 딸은 때때로 전화로 안부를 묻는 세은 씨에게 늘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저희 같은 사람들은 정신과 상담하고 약 먹으면 돼요. 근데 506호 살던 숙모는 뇌수술을 또 해야 할 수도 있고, 손에 감각이 안 돌아와서 재활치료도 계속 받아야 한대요. 그런 분들은 치료비를 평생 받을 수 있어야 하잖아요. 나라에선 그 조차도 안 된다고 하대요.”부족한 치료비, 어려워진 생계보다도 힘들었던 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왜 주민들의 신고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는지, 왜 안인득은 제때 치료받지 못했는지, 속 시원히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경남지방경찰청 진상조사팀이 사건 이후 조사를 벌여 경찰 조치가 미흡했다고 인정했지만 관련 경찰 5명을 경징계하고 2명을 경고 처분 하는데 그쳤다. 잊지 않으면 고통스러웠다. 잊을 수가 없어 술에 기댔다. 세은 씨와 민수 씨가 일상을 잃고 시간의 흐름도 잊어가던 2020년 봄, 그들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대한신경정신학회였다. 조현병 환자가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면서 학회는 관련 법 개정에 나선 상태였다. “지금 나라에서는 조현병 환자를 방치하고 있어요. 안인득처럼 치료를 거부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칠 가능성이 큰 환자는 경찰이나 지자체가 의사 판단을 받아 잠시라도 입원을 시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이런 사건이 또 나는 걸 막아야 합니다.”학회는 이들에게 국가 대상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 달라고 설득했다. 정신질환자를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1년을 꼬박 고민했다. 변호사에게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를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두려움이 앞섰다. ‘돈 때문에 소송 하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서웠다.하지만 금 씨 남매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족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조현병 환자가 왜 밉노? 그 사람들, 그냥 정신이 아픈 사람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방치돼 있었던 게 잘못이지. 약만 먹으면 괜찮았을 사람이 범죄자가 되고, 그 사람 가족까지 죄인이 되는 거고. 그걸 왜 못 막느냐는 거지. 안인득도 피해자다. 안인득 형도 피해자고.” (민수 씨)금 씨 남매는 국가에 책임을 묻기로 했다. 이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법률사무소 법과치유는 지난해 11월 8월 대한민국을 피고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장을 행정법원에 제출했다. 사건 발생 2년 7개월 만이다. 원고는 민수 씨 남매 세 명, 민수 씨의 아내 차 씨 등 4명이다. 소송의 요지는 경찰이 법에 명시된 매뉴얼을 따르지 않아 범죄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조금 괜찮아져서 소송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민수 씨는 말했다. “괜찮아져서가 아니라 괜찮아지려고 소송을 하는 기다. 이렇게라도 해야 억울함이 풀릴 것 같으니까.” 매뉴얼이 작동하지 않을 때정신건강복지법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칠 위험이 큰 정신질환자의 정신질환자를 자신의 의사에 반해 입원시키는 이른바 ‘비(非)자의 입원’을 허용하고 있다. 환자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조치인 만큼 엄격한 절차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이중 ‘행정입원’은 경찰이 정신과 전문의나 전문요원에게 요청해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 지자체장이 절차를 거쳐 최장 2주 간 입원시키는 제도다. 긴급한 상황에는 경찰관과 의사 동의 아래 최장 3일 간 환자를 입원시킨 뒤 계속 입원이 필요한지 결정하는 ‘응급입원’ 제도도 있다. 안인득은 △타인에게 위협을 가한 전력이 있고 △폭행, 욕설 등 공격적 성향이 지속된 경우로 행정입원이나 응급입원을 충분히 검토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인득은 어떤 조치도 받지 않았다. 안인득 본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정입원과 응급입원 모두 현장에서 무용지물이 됐다.비자의 입원 중 행정입원은 유명무실하다. 행정입원에는 전문의 진단이 필요한데 정신질환자로 보이는 사람을 전문의에게 강제로 호송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응급입원은 요건이 더 까다롭다. 자·타해 위험이 크고, 상황이 급박해 다른 입원절차가 불가능할 때만 가능하다. 당장 눈앞에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경찰이 인권침해 논란을 무릅쓰고 응급입원 절차를 밟기 어렵다.이동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족이 입원시키도록 하는 것이 논란을 피하는 길이기 때문에 행정입원은 입원시킬 가족이 마땅치 않은 경우로 제한된다. 응급입원도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해 활용이 어렵다”고 지적했다.까다로운 절차 탓에 현장에서는 대부분 ‘보호입원’이 활용된다. 가족에 의한 보호입원이 전체 비자의 입원의 80~90%를 차지한다. 보호입원은 가족 중에서도 직계혈족, 배우자, 민법상 후견인 중 2명이 신청하고 의사 진단이 있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안인득처럼 혼자 살며 직계혈족이나 배우자가 없는 경우 적용이 불가능하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한국 현실에서 점점 더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학회 법제이사는 “노부모 중 한 명과 살거나 직계 가족이 없는 조현병 환자들이 사각지대”라며 “1인 가구가 늘며 정신질환자를 보살펴줄 가족이 없어지고 있다.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책임을 가족이 아닌 국가가 지는 ‘국가책임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서는 비자의 입원을 신청할 수 있는 권한을 광범위하게 열어둔다. 미국 32개주에서는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자의 입원을 신청할 수 있다. 일본도 ‘정신장애인 또는 그 의심이 있는 사람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 신청 권한을 인정한다. 영국은 신청권자를 정신보건전문요원 또는 환자의 가족 또는 친지로 규정하는데 직계가족이나 동거인은 물론 형제자매, 조부모, 조카 등이 포함돼 있다.일반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면서도 정신질환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사법입원제도’ 도입을 제안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법원이 입원을 결정하기 때문에 독립성이 보장되고, 환자 본인이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의사를 법정에서 표현할 수 있는 절차도 포함돼 있다. 이동진 교수는 “비자의 입원은 강제조치인 만큼 국가가 책임을 지고 주도하고, 그 안에서 본인과 가족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래치료명령제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지자체장이 정신의료기관장의 청구를 받아 비자의 입원 환자가 퇴원하는 대신 최장 1년까지 외래치료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는 제도다. 퇴원한 환자가 아니더라도 의사 판단으로 위험한 환자는 외래치료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정신장애인 인권단체도 어쩔 수 없는 경우 비자의 입원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그런 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사전에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의 박환갑 사무국장은 “비자의 입원이 필요한 수준까지 상태가 악화되기 전에 미리 상담하고 외래치료를 받도록 하는 등의 관리가 필요하다”며 “상태가 악화된 환자를 입원시키는 조치는 필요하지만, 폭력적인 병원 이송 과정, 환자를 폐쇄병동에서 강제로 치료하는 방식 등 문제점이 먼저 개선돼야 한다” 지적했다.눈물의 웅덩이는 마르지 않는다물웅덩이만 봐도 그 날이 떠오르지만 세은 씨는 매년 추석, 설날마다 사건이 발생한 A아파트 3단지를 찾는다. 엄마의 숨이 멎은 곳이지만 엄마가 마지막으로 숨을 쉰 곳이기도 해서다. “추석, 설날 때마다 와요. 엄마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이니까…”지난해 11월 11일 아파트를 찾은 금 씨는 아파트 정문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사건이 발생했던 303동을 향했지만 그 앞까지 가진 못했다. “저 안에까지는 못 들어가요. 나 여기선 모자도 절대 안 벗어요.”시야를 차단하는 검정색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검정색 패딩 조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세은 씨는 303동과 한참 떨어진 309동 앞 벤치로 겨우 걸음을 옮겼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한동안 303동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그는 한참 동안 화면을 쳐다봤다. ‘그리움’이란 제목의 사진첩 폴더에 저장된 엄마의 생전 사진이었다. “우리 엄마 예쁘죠? 이렇게나 사진이 많은데 그날 아파트 입구에 쓰러져 있던 사진은 없어. 나라도 찍어 놓을 걸… 엄마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게 사진이라도 찍을 걸…”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피지로 유학을 간 딸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머리 많이 길었네. 이제 진짜 숙녀 같다, 숙녀. 다 컸네.”세은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깨를 훌쩍 넘긴 머리를 매만지는 딸의 모습이 세은 씨는 낯설면서도 대견하다. 어느덧 13살이 된 딸을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지만 현재 건강 상태로는 딸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세은 씨의 소원은 소박하다. 딸과 함께 살면서 좋아했던 치위생사 일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이다. “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라도 몸이 버텨줬으면 좋겠어. 지금 몸 상태로는 운전도 제대로 못 하니까.” 올해 2월 설 세은 씨는 아파트를 가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남긴 장소에 가면 병세가 악화될 수도 있다는 주치의의 말 때문이었다. 대신 엄마와 조카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는 진주 응석사를 세 번이나 찾았다.1000일이 지나도록 눈물의 웅덩이는 마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세은 씨에게는 키워야 할 딸이 있고, 서로 의지하고 보듬어야 할 가족이 있다. 오늘도 세은 씨는 그날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다. 다른 누군가가 이들이 빠졌던 웅덩이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1000일 분의 고통을 다져 길을 고르고 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웅덩이: 1068일의 기록’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기사를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original.donga.com/2022/jinju)로 연결됩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 김재희 남건우 신희철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 김충민 기자 ▽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김태희 인턴 김신애 CD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

    • 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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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르메스 수첩에 담긴 피카소 연인의 비밀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그와 공식적인 연인관계였던 여성만 7명. 그 중 유명한 이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9년 간 피카소와 함께 했던 도라 마르다. 연인의 초상화도 다수 그렸던 피카소는 마르를 뮤즈 삼아 ‘우는 여인’(1937년)이라는 유명한 작품도 남겼다. 마르는 당시 패션과 광고사진으로 이름을 알린 사진작가였고, 다양한 그림을 남긴 화가였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작가’보단 ‘피카소의 연인’으로 더 유명해졌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에르메스 수첩의 비밀’(복복서가)에서 열정과 광기, 공허함으로 점철됐던 마르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재조명한다. 저자가 마르의 발자취를 추적하게 된 계기는 한 권의 다이어리였다. 남편이 아끼던 에르메스 다이어리를 잃어버린 저자는 이와 가장 비슷한 제품을 이베이에서 주문했다. 배송된 다이어리 안주머니에 샤갈, 라캉, 자코메티 등 예술가들의 주소록 수첩이 끼워져 있었던 것. 이 수첩이 마르의 것임을 확신한 저자는 2년 동안 수첩에 적힌 이름과 관련된 자료, 기사를 뒤졌고 생존 인물을 직접 찾아다녔다. 책은 마르가 누군가의 뮤즈가 아닌 예술가로 인정받고자 노력한 과정을 따라간다. 마르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스페인과 영국의 가난한 동네를 다니며 실업자, 기형의 몸을 가진 사람 등 사회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로 평가받는 그의 대표작 ‘무제’(1933년)는 거대한 소라에서 매니큐어를 칠한 손이 뻗어 나오는 모습을 담았다. 몽환적이고 기이한 마르의 몽타주 작품들 역시 실험성과 참신함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예술가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사랑을 갈구했던 한 여자로서의 삶도 그려진다. 피카소를 비롯한 연인들과의 관계에서 마르는 늘 감정에 솔직했고 적극적이었다. 때때로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은 광기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가 피카소와 만나기 전 연애했던 프랑스 시나리오 작가 루이 샤방스가 마르에 대해 남긴 시는 불같은 마르의 성격을 추측케 한다. ‘그대 이제 흔들리는구나. 신경질 가득한 미친 여인…내가 바친 사랑의 대가로 내 배를 걷어찼지.’ 처음 피카소와 만난 카페 되 마고에서 마르는 피카소의 시선을 끌기 위해 손가락 사이로 칼을 내리 꽂았고, 마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피카소는 그를 카페에 데려온 시인 폴 엘뤼아르에게 이렇게 묻는다. “저 이상한 여자를 압니까?” 유명 예술가의 삶에는 늘 영감의 원천이 되는 뮤즈가 존재했다. 근대조각의 시조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아내였던 에밀리 플뢰게가 대표적이다. 끌로델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뮤즈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조각에 천재적 재능을 드러냈던 조각가였다. 플뢰게 역시 바람둥이 클림트가 유일하게 평생 사랑했던 여성으로 유명할 뿐, 오스트리아 유명 패션디자이너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르의 삶은 누군가의 뮤즈이기 이전에 한 명의 예술가로서 창작에 혼신을 다하고 사랑에 늘 솔직했던 한 주체적인 여성이 있음을 몸소 증명한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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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 침공 피해, 우크라 알고 싶어” 역사서적 판매량 3배 껑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와 전쟁사를 다룬 책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 17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관련 책 28종의 판매량은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이 본격화된 올 1월 이후 평소에 비해 약 3배로 늘었다. 지난달 21일 발간된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글항아리)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역사와 문화, 종교, 국제관계를 다룬 ‘우크라이나의 역사 1·2’(아카넷) 등이 주목받고 있다. 일본 외교관이 우크라이나 역사를 개괄한 ‘유럽 최후의 대국…’은 15일 5쇄까지 찍었다. 전쟁사 책도 인기다. 올 1월 27일 나온 허버트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배틀 그라운드’(교유서가)는 이달 둘째 주 교보문고 정치·사회부문 11위에 올랐다. 이 책은 미국 러시아 중국을 중심으로 강대국 간 패권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지정학적 배경을 분석했다. 지난해 12월 나온 미국 작가 에릭 라슨의 ‘폭격기의 달이 뜨면’(생각의힘)은 같은 기간 교보문고 역사·문화부문 11위에 올랐다. 이 책은 윈스턴 처칠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습을 받은 영국 안팎의 정세를 세밀하게 담았다. 5년 전 발간된 벨기에 역사학자 자크 파월의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오월의 봄)도 같은 기간 교보문고 역사·문화부문 10위를 차지했다. 저자는 미국 정부가 대기업과 파워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고 주장한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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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익 없어도 포기않는 이유는”…피땀눈물 담긴 그들의 고군분투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작가를 꿈꿨다. 친구들은 승진을 하고 주택청약을 넣을 때 돈 안 되는 글을 계속 썼다. 펜을 놓으려던 서른한 살, 극적으로 등단했지만 프리랜서의 삶은 여전히 불안했다. “생업을 찾겠다”며 떠나는 선후배를 보면 마음이 쓰렸다. ‘피땀눈물, 작가’(상도북스)를 쓴 14년차 작가 이송현 씨(45) 얘기다. 네 번의 창업, 두 번의 폐업을 겪었다. 곧 폐업의 숫자에 1이 더해진다. 2020년 문을 연 포장마차가 이달 말 장사를 접게 되면서다. 네 번의 창업과 세 번의 폐업. 성공률은 25%. 남은 것은 제일 먼저 시작한 서울 성동구 이디야커피 둔촌점이다. ‘피땀눈물, 자영업자’를 쓴 12년차 자영업자 이기혁 씨(39) 얘기다. 지난달 25일 출간된 직업에세이 ‘피땀눈물’ 시리즈에는 평범한 이들의 ‘존버’(힘들게 버팀)가 담겨 있다. ‘무작정 존버’가 아니다. 마냥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대신 돌파구를 찾는다. 이송현 씨는 동화작가에서 방송작가와 등단 시인으로, 이기혁 씨는 카페사장에서 만화방, 포장마차 사장으로 끊임없이 변모했다. 살아남겠다는 치열함, 그 과정에서 이들이 흘린 피, 땀, 눈물이 200페이지 남짓의 책에 담겼다. 이어지는 시리즈에는 아나운서, 초등학교 교사 등 보통의 직업인들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과정이 소개될 예정이다. ● 펜 잡는 순간 돈과 멀어지지만… 신념으로 글을 쓴다 대학원 때 소설을 전공한 이송현 작가는 소설로 등단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딱 1년만 더’ 라는 생각으로 수익 없는 글쓰기를 계속 하던 서른 한 살의 2009년, “마해송문학상 원고를 받는데 지원해 보라”는 선배 동화작가의 말을 우연히 접했다. 반신반의하며 기존에 썼던 드라마 각본을 동화로 바꿔 ‘아빠가 나타났다!’(문학과지성사)를 제출했다. 뜻하지 않게 제5회 마해송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소설가에서 동화작가로 진로가 바뀐 순간이었다. 그 때부터 장르에 구분을 두지 말고 글을 쓰리라 다짐했다. 등단 직후엔 시트콤 작가의 길을 택했다. 학생 때 습작으로 썼던 시나리오를 우연히 읽게 된 김병욱 감독이 ‘면접을 보러 오라’며 전화를 한 게 계기였다. 그렇게 2009년 ‘지붕 뚫고 하이킥’(MBC)의 구성작가로 합류했다. 14일 서울 강남구 카페에서 만난 이 작가는 “소설 속 대사는 문어체라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트콤 대본을 쓰면서 입에 착 붙는, 날것 그대로의 대사를 쓰는 법을 익혔다”고 말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소재발굴부터 대본 작성까지 두루 경험한 그는 2010년 동시에도 도전했다. 다문화 가정 아이의 아픔을 다룬 동시 ‘호주머니 속 알사탕’으로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에 당선됐다. 동화작가에서 방송작가, 시인으로 끊임없이 외연을 넓혀 온 이 작가는 “전공만 판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장르는 다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이들의 삶을 재현하는 것은 똑같아요. 구현 방식만 다를 뿐이죠.”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라고 보일 수도 있는 삶의 경로가 부끄럽지 않다”는 그는 “글 쓰는 바닥에서 최고의 멀티플레이어가 되는 게 꿈”이다.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기에 ‘에이틴’ 같은 청소년 웹드라마나, 영화 ‘장화, 홍련’처럼 전래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상물을 만들고 싶다. 끊임없이 한계를 깨 왔지만 여전히 삶은 팍팍하다. 인세로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버겁다. 얼마 전 30대 후반의 한 후배는 “더 늦기 전에 작가를 접고 공무원 시험이라도 봐야겠다”고 했다. “펜을 잡는 순간 돈과 멀어지는 삶을 택하는 거 에요.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타인에게 좋은 기운을 전하는 일이에요. 그 사명감으로 버티는 거죠.” ● 네 번의 창업, 세 번의 폐업… 그럼에도 오늘도 앞치마를 맨다 이기혁 씨는 어학 연수차 떠난 과테말라에서 커피를 만났다. 매일 아침 홈스테이 주인 아주머니가 한 잔 가득 따라주는 커피의 향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이디야커피 둔촌점을 2011년 3월 차리며 카페 사장님의 꿈을 이뤘다. 10평 남짓의 공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14일 이디야커피 둔촌점에서 만난 이기혁 씨는 “‘저번에 녹차라떼 진하게 해 달라고 하셔서 이번에도 진하게 탔어요’라고 하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단골손님들을 챙겨 드린다. 동업하고 있는 친구는 이 건물 입주회사 부장님 아이의 옷도 사줬다”며 웃었다. 그렇게 그는 같은 자리를 11년 동안 지켰다. 12년차 베테랑 자영업자인 그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을 피해가진 못했다. 이디야커피 아래층에 차린 만화카페 ‘둔디야’는 코로나 19로 손님이 급감하면서 문을 닫았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2020년 여름 확진자수가 한자리대로 떨어졌다. 억눌렸던 소비심리가 분출될 것이라 확신했다. 폐업으로 서울 주요 상권의 공실도 많았다. 4명의 지인들과 그해 9월 홍대입구역 인근에 실내포차 ‘청포’를 열었다. 카페 마감 뒤 청포로 향한 그는 모두 잠든 새벽, 술과 안주를 나르고 그릇을 닦았다. 사활을 걸었지만 코로나 19는 또 다시 발목을 잡았다. 문을 연지 두 달 뒤인 11월 확진자 급증으로 영업 시간제한이 생긴 것. 적자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그는 청포에서의 경험도 자양분이 됐다고 말한다. “술집은 카페보다 손님 하나하나에 더 신경을 써야 해요. 카페는 음료가 나가면 끝이지만 술집은 수저부터 주류, 음식까지 계속 챙겨드려야 하니까요. 손님을 보는 눈이 더 밝아졌어요.” 코로나 19 확진자 급증에 더해 저가 커피 프랜차이즈들이 주변에 문을 열면서 매출이 30% 줄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도 이디야커피 둔촌점으로 향한다. 앞치마를 매고 커피머신 앞에 선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하는 것, 그가 4번의 창업과 3번의 폐업에서 배운 점이다. “조금만 매출이 떨어져도 ‘망하는 건가?’라며 마음이 조급해졌어요. 이제 저 자신과 가게에 대한 믿음을 갖고 버티는 게 정답이란 걸 알아요. 진심을 다하면 새로운 가게가 생겨도, 날씨가 궂어도 저희를 찾아주는 손님이 있거든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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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숭고한 희생, 책임감, 그리고 사랑의 기록

    2006년 5월 이라크로 파병된 미 육군 선임부사관 찰스 먼로 킹은 바그다드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악명 높았던 주르프 알 스카르에 배치됐다. 주둔지에서 약 15km 떨어진 지역에 정찰지를 마련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고민에 빠진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는 폭발물이 사방에 널려 있었기 때문. 결국 이동 중 폭발사고로 휘하의 병사가 목숨을 잃는다. 죽음을 목격한 그날 킹은 편지에 이렇게 적는다. ‘그 친구가 우리를 웃기려고 했던 우스꽝스러운 짓들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고 슬그머니 미소를 짓기도 했어. 웃음은 상처 난 영혼에 더할 수 없는 특효약이야.’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는 아들 조던을 향한 것이었다. 2005년 12월 배 속의 아들과 아내를 뒤로하고 이라크로 떠난 킹은 2006년 10월 전사하기까지 아버지 없이 살아갈 수도 있을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편지로 남겼다. 그는 전장 한복판에서 군인으로서의 사명과 가족을 향한 사랑을 매일 적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동료들은 그의 아내인 저자에게 편지를 전했다. 퓰리처상 수상자로 뉴욕타임스 기자인 그는 남편과 함께한 일상의 이야기를 편지와 함께 엮어 책으로 펴냈다. 킹은 운명처럼 서로 이끌린 아내와의 결실이 조던이라고 했다. ‘네 엄마는 아빠로 하여금 실패한 이전 결혼생활로 겪고 있던 좌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시간을 많이 들였는데 그런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글은 상처를 보듬는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운다. 저자는 남편이 보낸 첫 문자메시지부터 첫 데이트에서 샐러드를 시킨 것까지 킹의 생전 모습을 자세히 전한다. 아버지의 조언은 실질적이고도 생생하다. ‘남자도 얼마든지 울 수 있어. 울음만큼 고통과 압박감을 덜어낼 수 있는 것도 없지’ ‘누군가 너의 결정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힘으로 당당히 서도록 해. 너의 인생이지 그들의 인생이 아니니까!’ 저자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전쟁이 그 사람을 우리에게서 영원히 빼앗아간 게 아니란 걸 느꼈다”고 말한다. 부모여서 더 견디기 힘든 전쟁의 상흔도 담겼다. 킹은 처음이자 마지막 휴가 때 집에 돌아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그는 “이라크 아이들이 너무 많이 피를 흘렸다”고 울부짖었다. 부하들을 무사히 가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하루하루를 버틴 그는 ‘아빠가 여기서 겪은 어떤 경험들은 여기에 차마 쓸 수 없구나’라고 썼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전쟁이 인간의 삶에 남기는 처참한 흔적을 바라보는 요즘, 킹의 마지막 편지를 되새겨본다. ‘항상 가족을 돌보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라. 아빠는 너를 사랑하고, 너의 엄마를 사랑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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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마른 감정, 그림 보며 깨워보세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3B’를 즐겨 그렸다. 예쁜 사람(Beauty), 아기(Baby), 동물(Beast)이 그것. 와인과 포도가 올려진 테이블 주위로 남녀가 여유롭게 대화하는 ‘선상파티의 오찬’(1881년),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이들이 춤추는 ‘물랭 드 가레트의 무도회’(1876년)에서는 가난이나 슬픔은 찾아볼 수 없다. 정작 르누아르의 삶은 여유나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7일 만난 ‘마음챙김 미술관’(타인의사유)의 저자 김소울 미술치료사(38)는 “르누아르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궁핍했지만 행복하게 살기를 택했다. 고난이 닥쳐도 어떤 감정을 느낄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12일 출간되는 책은 그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다뤘다. 홍익대 미대를 나온 김 씨는 10여 년 전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치료를 공부했다. “대학 시절 힘든 일을 겪어 심리상담을 받았어요. 그때 위안을 얻어 그림으로 누군가를 치료해주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술치료연구소를 차릴 때 세무서 직원은 “누가 돈을 내고 미술치료를 받느냐”고 물었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내담자와 만나고 있어요. 성범죄 및 가정폭행 피해자, 우울증 환자, 진로 문제나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이 와요.” 그 역시 힘들 때마다 모네의 그림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교한 역사화가 주를 이룬 19세기 초반,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인상을 표현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붓질조차 서툰 아마추어의 그림”이라는 악평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 작품은 인상주의시대를 연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는 데 모네의 그림이 큰 힘이 된다”고 했다. 그는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그림으로 덴마크 화가 게르다 베게너(1886∼1940)의 ‘릴리 엘베의 초상’(1928년)과 ‘창문 앞 두 여성’(1920년대)을 추천했다. 베게너는 화가 릴리 엘베(1882∼1931)가 세계에서 처음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기 전 남자였을 때의 아내. 그는 엘베의 초상화를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자 했다. 화가의 삶을 알아야만 그림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감정 상태에 따라 똑같은 그림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를 통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했다.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을 정해 필요할 때마다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서른이 넘으면서 감정이 굳어버린 것 같다는 분들이 많아요. 누군가를 강렬히 사랑했던 감정, 미워했던 감정까지 다 묻어버리는 데 익숙해진 거죠. 그림을 통해 내 안의 잠든 감정을 깨워 보는 건 어떨까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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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 닥쳐도 어떤 감정 느낄지는 본인 선택…그림 통해 감정 깨워보세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3B’, 즉 예쁜 사람(Beauty), 아기(Baby), 동물(Beast)을 즐겨 그렸다. 와인과 포도가 올려진 테이블 주위에서 남녀가 여유로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선상파티의 오찬’,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이들이 함께 춤을 추는 ‘물랭 드 가레트의 무도회’ 등 그의 대표작들에는 가난이나 슬픔이 없다. 정작 르누아르의 삶은 여유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7일 만난 미술치료사이자 ‘마음챙김 미술관’(타인의사유)의 저자 김소울 씨(38)는 “르누아르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궁핍했고,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으며 지원해주는 가족도 없었지만 행복하기를 택했다. 고난이 닥쳐도 어떤 감정을 느낄지는 본인의 선택과 의지라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12일 출간되는 책은 화가의 삶이 투영된 그림들을 통해 어떻게 자아를 실현하고, 타인과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지 전한다. 김 씨가 석사에 진학했던 10여 년 전만 해도 미술치료는 비주류였다. 홍익대 미대를 나온 그가 미술치료를 공부하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반대했고, 미술치료연구소를 차릴 때 세무서 직원은 “누가 돈을 내고 미술치료를 하느냐”고 물었다. 김 씨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정교한 역사화가 주를 이뤘던 당시 빛과 그림자가 주는 인상을 표현한 ‘인상: 해돋이’를 보고 평론가들은 “붓질조차 서툰 아마추어의 그림”이라고 조롱했다. 이후 이 작품은 인상주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았다. “사람들이 미술치료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그만뒀다면 지금 제가 사람들과 그림을 통해 감정을 나누는 미술치료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비판이 두렵더라도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모네의 그림이 큰 힘이 됐어요.” 김 씨는 독자들도 그림을 통해 지친 마음을 달래길 바란다. 그는 게르다 베게너의 그림들을 추천했다. 베게너는 세계 최초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릴리 엘베의 연인이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베게너는 릴리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것을 넘어 릴리를 뮤즈 삼아 그의 초상화를 화폭에 담았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숨기는 내 진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단 한 명만 있으면 돼요. 나를 진심으로 지지해줄 단 한 명을 옆에 두는 것,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알았으면 합니다.” 화가의 삶을 알아야만 그림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똑같은 그림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해보는 것”을 추천했다.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을 정하고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는 것도 그림을 즐기는 방법이다. “서른이 넘으면서 감정이 멈춰버린 것 같다고 털어놓는 내담자들이 많아요. 그건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은지 오래됐다는 뜻이죠. 누군가를 강렬히 사랑했던 감정, 미워했던 감정, 무언가에 열정을 쏟았던 기억까지 모두 묻어버리는데 익숙해진 거죠. 그림을 통해 조금씩 내 안의 잠들었던 감정을 깨워보는 건 어떨까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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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이 보이지 않는 그들도 ‘그냥 엄마’입니다”

    만 세 살이 된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세 엄마가 있다. 한 엄마는 아이의 옷을 다 벗긴 뒤 자신의 옷도 벗는다. 옷에 이유식이 잔뜩 묻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또 다른 엄마는 아주 가벼운 플라스틱 숟가락을 사용한다. 아이가 음식을 다 먹었는지 숟가락의 무게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손으로 아이의 입을 확인하면서 이유식을 떠먹이는 엄마도 있다. 이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엄마다. 8일 만난 ‘그냥 엄마’(시공사·1만7000원)의 저자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윤소연 씨(36)는 “시각장애인 엄마들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아이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육아법을 찾는다”고 말했다. 4일 출간된 책은 시각장애를 가진 세 엄마가 자녀를 키우는 법, 장애 부모에 대한 편견 등을 담았다. 대학에서 유아교육 강의를 하고 있는 윤 씨는 박사논문 주제로 ‘시각장애인 엄마의 양육’을 정했다. 4개월간 각 가정을 여섯 번씩 방문해 3시간씩 이들을 관찰했다. 시각장애인 엄마들은 이유식 먹이기, 기저귀 갈기, 목욕시키기 같은 육아의 기본도 수백 번 반복해 손과 귀, 코 등의 감각으로 익혀 나갔다. 아이가 걷기 시작할 때는 넘어지거나 부딪힐까 걱정돼 목에 방울을 달았다. 윤 씨는 “외출할 때 아이 혼자 엘리베이터에 타게 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아이가 변기 만지는 소리까지 안방에서 들을 정도로 시각 외의 감각을 총동원해 아이에게 신경을 쏟는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대화다. 볼 수 없는 대신 말로 아이를 파악하는 것. 어린이집에 다녀와 머리핀이 없어졌으면 왜 머리핀이 없는지, 누군가와 싸우진 않았는지를 일일이 묻는다. “물 냄새는 어때?” “바람 소리를 들으니 뭐가 생각나?”같이 시각에만 한정짓지 않는 질문도 던진다. “세 가족의 공통점은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이는 아이들의 언어능력 향상으로도 이어집니다. 아이들은 ‘새가 있다’ 대신 ‘파란색 날개가 달린 새가 오른쪽으로 걸어가고 있어’라고 말해요. 부모의 장애가 오히려 아이의 강점이 되는 것이죠.” 책은 다음 달 오디오북과 디지털음성도서로, 8월경 점자책으로 각각 출간될 예정이다. 책 표지 제목 아래는 ‘그냥 엄마’가 점자로 표기돼 있다. 엄마 중 한 명은 제목을 확인하고는 눈물을 쏟았다. “이들도 앞이 보이지 않을 뿐 그냥 엄마예요. 아이와 엄마는 서로의 다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맞춰 나가는 존재죠. 앞이 보이지 않는 모든 ‘그냥 엄마’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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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빈 손예진 이정재 정우성 김우빈 등 1억씩 기부

    30일 결혼하는 배우 현빈과 손예진을 비롯해 김우빈 임영웅 김동욱 등 연예인이 경북·강원 지역 산불 피해 이재민 지원 성금을 8일 기부했다.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는 현빈과 손예진이 함께 2억 원을, 이정재 정우성 김우빈과 임영웅이 각각 1억 원, 배우 김동욱이 5000만 원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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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준엽, 대만 배우 쉬시위안과 결혼

    그룹 클론 출신의 구준엽(53)이 대만 배우 쉬시위안(徐熙媛·46)과 결혼한다. 구준엽은 8일 인스타그램에 “저 결혼합니다. 20년 전 사랑했던 여인과 매듭 못 지은 사랑을 이어가려 합니다”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과거 1년간 교제했다. 구준엽은 “그녀의 이혼 소식을 듣고 연락했다. 혼인신고만 하고 같이 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쉬시위안도 이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내가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게 해준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 썼다. 쉬시위안은 2011년 중국인 사업가 왕샤오페이와 결혼해 1남 1녀를 뒀으나 지난해 이혼했다. 쉬시위안은 대만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여주인공을 맡아 유명해졌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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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월든 호숫가를 거닐고 싶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전합니다

    1845년부터 2년 2개월 동안 미국 매사추세츠주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았던 미국 문인이자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 그의 행동은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은 꿈꿨을 ‘도피’다. 쏟아지는 업무, 경쟁에 지친 이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호숫가를 거니는 모습을 상상한다. 동시에 불필요한 소비와 탐욕에서 벗어나는 ‘무소유’의 삶도 갈망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나. 저자 역시 월든에서의 삶을 갈망했었다.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서의 삶을 기록한 책 ‘월든’은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완독에 번번이 실패했지만 그는 서랍 속에 월든 호숫가 사진을 넣어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꺼내 들었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짜리 원룸에 살게 된 후 인간의 행복과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 저자는 월든으로 떠난다. ‘소로의 모든 것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해’ 월든 투어를 떠났다는 저자는 소로가 살았던 오두막과 숲길, 호숫가를 거닐며 조화로운 삶, 탐욕에서 자유로운 삶, 최소한의 삶을 살아갈 방법을 풀어냈다. 저자는 소로가 호숫가 통나무집에서 영위했던 삶의 자취를 따라간다. 소로는 ‘하루 네 시간 이상 아무 목적 없이 자연과 오롯이 함께하는 산책을 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 없다’고 책에 썼고, 저자 역시 소로가 걸었던 산책길을 하루 종일 걸었다. 책상과 의자, 침대, 벽난로로만 채워진 그의 소박한 방을 둘러보면서 ‘내가 가지려 하던 것은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이었나’를 스스로 묻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로의 삶에 대한 통찰도 공유한다. 특히 자연 속에서 탐욕을 버리고 ‘무소유’를 실천한 그를 통해 우리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나간다. 돈이나 물건의 부족함을 콤플렉스로 여기지 않았던 소로는 유일하게 부족함을 느끼는 대상이 시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음껏 읽고 쓸 수 있는 시간을 갈망했다. 어떻게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지 알면 ‘누구에게도 고용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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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무슬림과 공존 해법 찾으려 사원 100곳 누볐죠”

    2018년 6월 예멘 난민들이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들어온 뒤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 공포증) 논란이 불거졌다. 이들 대부분이 무슬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예멘 난민 수용 반대 집회가 열리고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와 70만 명의 동의를 받았다. ‘타인을 기록하는 마음’(메디치)을 최근 펴낸 이수정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책임연구원(37)이 국내 이주 무슬림을 인터뷰하기로 작정한 계기다. 당시 그는 국내 이슬람 건축 디자인을 연구하기 위해 2018년 초부터 이슬람 사원과 예배소를 찾아다녔다. 거대한 돔이나 첨탑을 기대한 그가 맞닥뜨린 건 간판도 없이 옥탑이나 지하에 숨어든 예배소였다.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의 이슬람 사원인 서울중앙성원에서 만난 그는 “건축물 연구를 접으려던 차에 예멘 난민 사태가 터졌다”며 “다양한 국적이나 종교를 가진 이주민이 늘고 있는 한국에서 장소보다는 그 안에 사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 무슬림은 약 15만 명으로, 전국의 이슬람 종교시설은 150개가량 된다. 이 연구원은 2018년부터 2년간 이슬람 종교시설 100여 곳을 다니며 무슬림 이주자들을 인터뷰했다. 이들이 한국인과 겪는 갈등 혹은 차별의 경험, 무슬림과 공존해야 하는 이유를 신간에 담았다. 무슬림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에서 비롯됐지만 팬데믹으로 더 심화된 양상이다. 지난해 5월 강원 강릉시에서 라마단(이슬람 금식성월) 기간 식당에 모인 무슬림 사이에서 집단감염이 터진 뒤 주변 시선은 특히 곱지 않았다. “부산에 있는 공장에 다니는 무슬림 노동자가 ‘사택 밖으로 나가면 해고하겠다’는 회사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종교모임에 나가는 걸 막으려고 외출을 금지시킨 거죠. 경기도가 모든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코로나19 검사를 받도록 한 것에 억울함을 호소한 분도 있었어요.” 지난해에는 대구 경북대 앞에 이슬람 사원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빚어졌다. 경북대로 유학을 온 무슬림 학생들이 2014년부터 사원 설립을 추진했는데 인근 주민들이 소음과 지역 슬럼화를 이유로 반대에 나선 것. 주민들은 공사장 입구에 차를 세워 공사를 막았다. 충돌이 커지자 지방자치단체는 무슬림 학생들에게 주민들과 합의하라며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 연구원은 “정부가 갈등을 제대로 조율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럽에서는 이슬람 사원 설립을 놓고 갈등이 생겼을 때 정부 주도로 중재위원회가 구성된다고 한다. 관련 공청회와 토론회가 열린 영국 런던 킹스턴어폰템스 지역이 대표적이다. 독일은 이슬람 단체와 정부 간 소통기구인 ‘DIK’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유럽에서 중재위는 몇 년이 걸리더라도 토론회를 열어 합의점을 찾아간다. 한국도 양측의 의견을 조율하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주민을 우리가 양보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지 말고 협의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20년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넘어서는 ‘데드크로스’가 발생한 상황에서 이주민과의 공존은 필수가 됐다는 것. “이주 노동자들은 한국인이 기피하는 3D 업종을 채우는 필수 노동력이 됐어요. 무슬림이 유입돼 공실이 사라지고, 죽었던 상권이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이제는 ‘왜 이들이 여기 사는가’보다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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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장 여는 순간 보석 만난듯… 29번째 게이고 작품 번역”

    일본작가의 소설책을 즐겨 읽는 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 있다. 번역가 양윤옥(64·사진)이다. 국내에서 150만 부가 팔린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현대문학·2012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시리즈(문학동네·2009∼2010년) 등 일본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번역했다. 특히 추리소설계의 거장 게이고의 소설 중엔 양 번역가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다. 양 번역가가 15년간 번역한 그의 작품은 29편에 달한다. 양 번역가는 24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최근 번역한 ‘조인계획’은 1994년에 출간됐지만 한국엔 지금에서야 처음 소개되는 게이고의 초기작”이라며 “첫 장을 펼쳤을 때 ‘드디어 숨은 보석을 만났다’는 생각에 설렜다”고 말했다. 조인계획은 스키점프 유망주 살인사건을 통해 천재적 재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그린 작품이다. 양 번역가는 게이고의 문체에 대해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동작을 짧은 묘사로 켜켜이 쌓아가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틈에 정교한 대형 건축물이 머릿속에 출현하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게이고 문체를 잘 알기에 번역 과정에서 설명을 덧붙일까 고민되는 순간마다 ‘원문에 충실하기’를 따른다고 했다. 조인계획에서도 원문에 쓰인 ‘날다’(飛)와 ‘뛰다(跳)’라는 단어를 놓고 고민하다 결국 원래 단어의 뜻을 살린 ‘날아오르다’와 ‘뛰어들다’로 번역했다. “천재 스키점프 선수 ‘니레이’는 점프 순간을 ‘날다’가 아닌 ‘뛰다’로 묘사합니다. ‘천재란 비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를 밟아 도약하는 것’이라는 니레이의 생각이 담겨 있죠. 작가 의도를 전달하기엔 ‘날아오른다’, ‘뛰어든다’는 너무 평범한 것 아닌가 고민했습니다. 설명을 덧붙이고픈 욕심도 들었지만 독자들이 숨은 뜻을 알아줄 거라 믿었죠.” 원문에 손을 댈 때도 있다. 편견이 들어간 표현이 우려될 경우다.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문학동네·2014년) 중 ‘드라이브 마이 카’가 그랬다. 운전기사 ‘미사키’가 운전 도중 불붙은 담배를 창밖으로 튕겨버리는 장면에서 하루키는 ‘가미주니타키초에서는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는 것이리라’라고 표현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는 것이리라’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는 것인지’라고 애매하게 얼버무려 번역했어요. 가상의 지명이라도 온 동네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차 밖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는 곳’이라고 표현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문장을 수십 개로 쓰는 집요함도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 중 ‘예스터데이’에서 ‘후렴구를 그야말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불렀다’라는 문장은 12가지 버전으로 써보며 고민했다. ‘쩌렁쩌렁한’의 원문은 ‘목욕탕적인, 잘 들리는’이다. ‘가장 신나는 부분을 그야말로 목욕탕적으로, 구성지게 뽑아냈다’, ‘가장 고조되는 부분을 욕실 스타일로, 구성지게 뽑아냈다’ 등이 후보였다. 그는 “문장은 쉽고 편하게 느껴져야 한다는 생각에 책에 나온 최종 문장으로 선택했다.” 양 번역가는 번역가를 ‘구로고(黑衣)’에 비유한다. 구로고는 일본 전통연극 가부키에서 관객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온몸에 검은 천을 둘러쓰고 무대 진행을 돕는 이다. “번역자는 원작자의 ‘구로고’입니다. 원작을 최대한 우리말로 매끄럽게 소개하는 것이 할 일이지요. 번역자가 자기주장을 하거나 얼굴을 내밀 일은 없어야 합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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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조선통신사의 눈에 비친 400년 전 일본 풍경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와, 그의 아들 히데요리(1593∼1615)를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7년간 지속됐던 전란 후 약 10년 뒤인 1607년부터 다시 일본에 파견되기 시작했던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신유한이 1719년에 쓴 사행록에는 ‘히데요시가 오사카에 살면서 싸움을 즐기고 사치하고 백성의 고혈을 긁어다 욕심을 채웠다’는 기록이 있다. 1607년 4월 9일 도요토미 가문의 본거지 오사카에 도착한 사행원 경섬은 ‘해사록’에 히데요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풍악을 폐하지 않았고, 오직 호화와 사치를 스스로 즐겼으며, 일의 처리가 많이 유약하므로 왜인들이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다고 한다.’ 히데요리가 패망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뒤 조선 후기 문화를 연구해 온 저자는 1607년부터 1764년까지 총 11차례에 걸쳐 에도 막부에 파견됐던 통신사행들이 관찰한 오사카, 교토, 나고야, 에도 등 일본 주요 도시에 대한 기록을 탐구했다.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때, 조선인들은 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와, 그를 물리친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의 에도 막부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통신사행의 여정은 오사카항 하구에서부터 시작됐다. 오사카 시내 나루터 주변의 인가를 묘사한 기록은 생생하다. 1719년 신유한은 이렇게 글을 남겼다. ‘모든 집의 담과 벽이 다 화려하게 색칠을 하였다. 낮고 습해서 거처할 수 없는 곳에는 푸른 풀로 금빛 방죽을 만들었는데 깨끗하여 침도 뱉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잡초가 난 곳조차 관리가 잘돼 있었다니, 청결을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가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님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편 조선인들은 실권이 없는 일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로 인해 벌어질 위험을 우려했다. 원중거는 “일왕을 끼고 쟁탈을 도모하는 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저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면 변방의 교활한 무리가 반드시 기회를 타서 우리 땅을 노략질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실제 에도 막부가 무너진 뒤 일본은 조선 침탈에 나섰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인 ‘피로인’에 대한 기록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여준다. 1636년 통신사행들이 지나갈 때 ‘자주 눈물을 닦으며 번거로이 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피로인들이었다’는 기록이 그렇다. 책의 묘미는 통신사행들이 남긴 상세한 기록을 통해 400여 년 전 일본 문화와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늦은 저녁 배를 타고 가다 강물에 놓인 다리를 본 조명채는 1748년 ‘공중에 밝게 빛나는 불 구슬이 문득 가까워져 오고, 만 길 뻗은 무지개가 뱃머리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고 적었다. 불 구슬은 다리 위에 밝힌 등불이고, 무지개는 다리였다. ‘여인들이 한가로운 도회의 자태를 더하고 분칠을 낭자하게 하여 눈을 현란하게 하였다’는 1764년 원중거의 교토 방문 기록도 흥미롭다. 통신사행들의 글을 따라가며 그들이 걸었던 길을 머릿속에서 함께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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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 겪고 파견된 조선통신사가 본 일본 그리고 일본인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아들 히데요리를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7년 간 지속됐던 전란 후 약 10년 뒤인 1607년부터 다시 일본에 파견되기 시작했던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신유한이 1719년에 쓴 사행록에는 ‘히데요시가 오사카에 살면서 싸움을 즐기고 사치하고 백성의 고혈을 긁어다 욕심을 채웠다’는 기록이 있다. 1607년 4월 9일 오사카 하구에 도착한 사행 중 한 명이었던 경섬은 ‘해사록’에 히데요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풍악을 폐하지 않았고, 오직 호화와 사치를 스스로 즐기었으며, 일의 처리가 많이 유약하므로 왜인들이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다고 한다.’ 히데요리가 패망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뒤 조선 후기 문화를 연구해 온 저자는 1607년부터 1764년까지 총 11차례에 에도 막부에 파견됐던 통신사행들이 관찰한 오사카, 교토, 나고야, 에도 등 일본 주요 도시에 대한 기록을 탐구했다.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때, 조선인들은 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와, 그를 물리친 도쿠가와 이에야쓰 휘하의 에도 막부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통신사행의 여정은 오사카항 하구에서부터 시작됐다. 오사카 시내 나루터 주변의 인가를 묘사한 기록은 생생하다. 1719년 신유한은 이렇게 글을 남겼다. ‘모든 집의 담과 벽이 다 화려하게 색칠을 하였다. 낮고 습해서 거처할 수 없는 곳에는 푸른 풀로 금빛 방죽을 만들었는데 깨끗하여 침도 뱉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잡초가 난 곳조차 관리가 잘 돼 있었다니, 청결을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가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님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편 조선인들은 실권이 없는 일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로 인해 벌어질 위험을 우려했다. 원중거는 “일왕을 끼고 쟁탈을 도모하는 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저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면 변방의 교활한 무리가 반드시 기회를 타서 우리 땅을 노략질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실제 에도 막부가 무너진 뒤 일본은 조선 침탈에 나섰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인 ‘피로인’에 대한 기록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여준다. 1636년 통신사행들이 지나갈 때 ‘자주 눈물을 닦으며 번거로이 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피로인들이었다’는 기록이 그렇다. 책의 묘미는 통신사행들이 남긴 상세한 기록을 통해 400여 년 전 일본 문화와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늦은 저녁 배를 타고 가다 강물에 놓인 다리를 본 조명채는 1748년 ‘공중에 밝게 빛나는 불 구슬이 문득 가까워져 오고, 만 길 뻗은 무지개가 뱃머리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고 적었다. 불 구슬은 다리 위에 밝힌 등불이고, 무지개는 다리였다. ‘여인들이 한가로운 도회의 자태를 더하고 분칠을 낭자하게 하여 눈을 현란하게 하였다’는 1764년 원중거의 교토 방문 기록도 흥미롭다. 통신사행들의 글을 따라가며 그들이 걸었던 길을 머릿속에서 함께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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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지친 마음 다독다독… 일상 접목 철학책 ‘인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철학서가 인기를 끌고 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어크로스)처럼 출간된 지 1년이 다 돼 가는 철학서가 최근까지 베스트셀러 순위에 드는 철학서의 ‘스테디셀러화’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4월 출간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교보문고 1월 종합 월간 베스트 8위, 인문 분야 월간 1위에 오르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말에 나온 신간도 인기다. 11월 출간된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인플루엔셜)는 1월 인문 분야 기준 교보문고 6위, 예스24 3위다. 12월에 나온 ‘데일리 필로소피’(다산초당)는 교보문고 13위, 10월 출간된 ‘필로소피 랩’(윌북)은 예스24 20위다. 철학서의 판매량과 출간 종수도 늘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철학·사상 분야 도서 연간 판매량은 2020년 전년보다 23.8% 감소했지만 지난해에는 60.7% 증가했다. 신간 출간 종수도 2020년 206종에서 지난해 290종으로 늘었다. 철학서의 인기 비결로는 일상과의 연결고리를 포착해 진입장벽을 낮추고, 지친 마음을 달래는 점이 꼽힌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등 어려운 철학적 사유를 일상에 접목했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는 파스칼, 프로이트 등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해 욕망, 사랑 등 나이가 들면서 포기하게 되는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최근 인기 있는 철학서들은 어려운 철학 지식을 설명하는 교양서가 아니라, 철학 지식과 통찰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마음의 휴식을 얻는 자기계발서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팬데믹 장기화의 영향도 있다. 지속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마음을 달랠 책을 찾는 것이다. 박숙경 예스24 과장은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는 ‘불안한 날들을 위한 철학’(다산초당·2022년),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복복서가·2022년)은 행복을 탐구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을 접목했다”고 설명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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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린 흥행 날개 달고, 그때 그 소설 다시 날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지 오래된 외국 원작들이 영화 흥행에 힘입어 뒤늦게 빛을 보고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나일강의 죽음’(1937년)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년)이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939년)에 비해 그동안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소설은 신혼부부가 탄 나일강의 호화 여객선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그렸다.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9일 개봉 후 엿새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면서 소설도 주목받고 있다. 21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2013년 ‘애거사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황금가지)에 묶여 출간된 소설은 월간 기준으로 판매량이 약 500권 수준에서 영화 개봉을 전후해 5000권가량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문학동네·2014년)도 영화 덕을 봤다. 소설은 갑작스레 아내와 사별한 남자가 여성 운전사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는 지난해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이어 올해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이에 힘입어 지난달 22일 기준 원작 소설의 한 달 판매량은 직전에 비해 약 5배로 늘었다. 중국 소설가 옌롄커의 대표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웅진지식하우스·2005년)도 23일 동명의 영화 개봉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달 셋째 주 알라딘 소설·시·희곡 부문 14위에 올랐다. 소설은 중국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사단장 아내와 젊은 사병의 불륜을 통해 마오쩌둥 이념을 풍자했다. 이 밖에 다른 소설 원작 영화들도 개봉을 앞두고 있어 출판계가 마케팅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은 2018년 국내에 출간된 데이비드 그랜의 ‘플라워 문’(프시케의숲)이 원작이다. 1920년대 미국 중남부에서 벌어진 인디언 살인사건을 다룬 논픽션이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7’(가제)도 에드워드 애슈턴의 공상과학(SF) 소설 ‘미키7(Mickey 7)’을 원작으로 제작됐다. 국내에 아직 출간되지 않은 이 책은 복제인간이 다른 복제인간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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