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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할머니’라고 있다. 그를 모르면 북한에선 간첩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의 실제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자도 모른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투표를 위해 남포시 강서구역 태성리를 찾은 김일성에게 마을의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했다. “수상님, 얼굴이 많이 축간 것 같은데 너무 근심 마십시오. 종파놈들이 인민생활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도 다 잘살게 되었으니 일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기지 종파놈들이 이기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우리는 수상님을 지지합니다.” 당시 소련파와 연안파의 도전으로 큰 정치적 위기에 처했던 김일성은 훗날 “그 말에 큰 힘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그 할머니는 이후 영화의 주인공이 됐고 노동당 강연에도 수없이 등장하며 교과서에도 올랐다. 덕분에 태성리 인근 협동농장 고위 간부는 그 할머니 자손들이 대대로 물려받아 맡고 있다. 태성리는 물론 인근 농가들도 2층짜리 호화 저택으로 바뀌었다. 김일성 시대에 태성할머니가 있었다면 김정일 시대엔 정성옥이 있다. 1999년 스페인 세계육상선수권 여자마라톤에서 우승한 정성옥은 우승 소감을 묻는 질문에 “결승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 불러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고 대답했다. 이 말에 감동한 김정일은 정성옥에게 ‘공화국영웅’ 칭호와 벤츠500, 평양의 고급주택을 하사했고 우승 상금 6만 달러도 모두 갖게 했다고 한다. 북한에선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에겐 공화국영웅보다 낮은 노력영웅 칭호와 우승 상금 일부만 준다.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5개나 딴 유도 스타 계순희도 노력영웅에 불과하다. 정성옥은 선군 시대의 영웅으로 정신적 풍모의 귀감으로 떠올랐다. 그런 정성옥이 몇 년 뒤 조선신보에 “애인이 직접 채워 준 손목시계를 보며 힘을 내 우승했다”고 털어놓았다. 어쨌거나 정성옥 이후 국제경기에 나온 북한 선수들은 “장군님을 생각하며 힘을 짜냈다”는 상투적 대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같은 말에 특허료가 두 번 지불될 리 만무하다. 태성할머니와 정성옥 외에도 북한엔 말 한마디로 가문의 운명이 완전히 바뀐 사례가 많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신세를 한탄할 때 “우리 집안에는 왜 말 잘한 사람도 없냐”고 푸념한다. 하지만 이들은 집안에 말 잘한 사람보단 말 잘못한 사람이 없는 걸 큰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른다. 말로 팔자 고친 사람보다 목숨 잃은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북에서 살 때 기자의 동창 중에 ‘말반동’의 손자가 있었다. 1970년대에 할아버지가 재혼할 때 결혼식장에서 술에 취해 “재간도 좋다”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수령님도 두 번 갔잖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할아버지는 보위부 차에 실려 어디론가 영영 사라졌다. 자식들이 함께 끌려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손자는 태어날 때 반동의 자손이라는 굴레를 쓰고 나와야 했다. 그런 북한을 탈출해 마음껏 말할 수 있는 남쪽에 오니 행복했다. 하지만 요샌 말 한마디에 운명이 뒤바뀌는 북한의 비정상을 마냥 비난하는 게 찜찜하다. “‘각하 빅엿’ 한마디로 꼴찌 판사가 국회의원이 되고, 지난 총선에서 저질 막말로 논란을 일으킨 한 후보가 44%를 넘는 지지를 받은 남쪽은 그럼 정상이냐”고 되물으면 할말이 없다. “그래도 죽이진 않잖아” 이렇게 대답해야 하나.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명왕성의 다섯 번째 위성이 발견됐다. 12일 외신에 따르면 미국 과학자들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허블 우주망원경을 이용해 명왕성에서 9만3000여 km 거리의 둘레를 도는 지름 10∼24km의 위성을 발견했다. 너무 작은 데다 둥근 모양이 아닌 삐죽삐죽한 형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돼 반사되는 빛만으로는 현재 정확한 크기를 추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 발견한 위성에 P5라는 이름을 달았다. 명왕성의 가장 큰 위성인 카론은 반지름이 603∼606km로 1978년에 발견됐다. 이어 2006년 허블 망원경으로 두 개의 작은 위성 닉스와 히드라를 발견했다. 지난해 발견된 네 번째 위성은 P4로 명명됐다. 명왕성에 가장 가까운 위성은 카론이며 이어 P5, 닉스, P4, 히드라 순으로 회전궤도가 자리 잡고 있다. 과학자들은 반지름이 달(1738km)보다 작은 1151km에 불과하고 질량도 달의 6분의 1밖에 안 되는 명왕성이 이처럼 많은 위성을 거느릴 수 있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또 과학자들은 “명왕성의 모든 위성은 명왕성이 수십억 년 전 다른 큰 천체와 충돌할 때 형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P5는 이러한 명왕성의 형성과 진화 이론을 설명해줄 새로운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30년에 발견된 명왕성은 태양계의 9번째 행성으로 많은 연구의 대상이었지만 2006년 8월 국제천문연맹(IAU)이 행성분류법을 바꾸면서 왜소행성으로 격하됐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각종 생산단위의 생산물 정부 수매가격을 시장가격에 맞추고 협동농장의 말단 생산단위인 분조(分組)의 구성원을 기존 10∼25명의 3분의 1 수준인 4∼6명으로 줄이는 것을 뼈대로 하는 새로운 경제개혁 조치를 내부에 공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장과 기업소의 경우에도 국가가 원자재와 기계 등을 먼저 투자하고 생산물이 나오면 판매수입을 국가와 생산단위가 일정 비율로 나눠 갖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전문인터넷매체인 ‘데일리NK’는 10일 북한이 지난달 말 ‘우리식의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른바 ‘6·28방침’을 내놓고 10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올해 초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지시로 내각 산하 소조가 농업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혁 방안을 연구해 왔다. ‘6·28방침’은 북한이 2002년 7월 1일 시작했던 ‘7·1경제관리개선조치’만큼 획기적인 것은 아니지만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발표된 첫 개혁조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부 수매가격을 시장가격에 맞추면 생산자들이 생산품을 몰래 시장에 내다 파는 대신 정부에 판매해 국영상점 등이 물품을 풍부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분조 구성원을 줄이면 생산을 위한 의사소통이 빨라지고 추가 생산품에 대한 개인 분배 비율이 높아져 전반적으로 생산 의욕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 북한은 군(郡) 밑에 바로 리(里)를 두고 있으며 리마다 보통 협동농장 하나가 있다. 농장 안에는 부락 단위로 작업반이 있다. 한 개 작업반은 다시 5, 6개의 분조로 구성된다. 하지만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경제난 이후 대부분의 생산 기반을 잃은 북한 당국이 수많은 공장 및 농장에 생산시설과 원자재를 공급할 능력이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미국의 억만장자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사진)이 19억 달러(약 2조1707억 원)를 자선재단에 9일 기부했다. 2006년 자신의 재산 440억 달러 중 99%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한 약속에 따른 것이다. 기부 선언 이후 버핏 회장은 매년 7월 자신의 재산 중 5%를 기부해 왔다. 나머지 재산은 버핏 회장이 세상을 뜬 뒤 한꺼번에 기부된다. 버핏 회장은 버크셔해서웨이의 클래스B 주식 2240만 주(19억 달러)를 올해 기부금으로 내놓았다. 이 중 15억 달러(약 1조7137억 원) 상당의 1840만 주는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설립한 자선 단체인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에 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수기에는 강제북송 당시 중국 돈 200위안(약 3만6000원)을 숨긴 사연이 여러 번 등장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끝까지 돈을 챙겨야 했던 애착 때문인 듯하다.“조선말을 아는 중국 여군이 여자들의 옷을 몽땅 벗기고 수색했다. 내가 늙은이여서 그런지 몸수색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200원(위안)을 감출 수 있었다. 꼬깃꼬깃 접어 비닐에 싸서 언제나 손에 쥐고 다녔다.”“압송 도중 벌판에서 소변을 보다가 그만 떨어뜨렸다. 발로 밟았다. 여군이 보고 있었다. 신발을 고쳐 신는 척하면서 얼른 돈을 쥐었다. 밤에 여군이 나를 툭툭 건드렸다. 돈을 내놓으라는 눈치여서 하는 수 없이 돈을 주었다. 그는 다시 적당히 접더니 내 손에 쥐여주었다. 눈물이 났다. 북송시키는 중국 정부는 증오스러웠지만 그 여군의 인도주의적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나의 심장을 울려줄 것 같다.”“북한 보위부가 6명씩 불러 옷을 몽땅 벗기고 ‘앉았다 섰다’를 50회 시키면 무엇이든 빠져나온다. 은밀한 곳에 돈을 숨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기에… (그대로) 따라 하지 않은 덕분에 돈을 살릴(챙길) 수 있었다.”“나는 이 돈을 마지막까지 살렸다. ○○집결소에서 찾아온 ○○가 옆을 슬며시 지나갈 때 던져 그 어려운 ‘보관’을 끝냈다. 그는 그 돈으로 쌀 10kg을 샀고 나에게도 밥을 지어 왔다.”}
박인숙 씨의 문학적 감수성과 다재다능한 면모는 수기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월남자의 딸에겐 이런 재능은 고뇌의 깊이만 더할 뿐이었다.“○○가 집에 왔었다. ‘걜 공부시켜 성공 못합니다. 체육을 시키시오.’ 나는 도(道) 스케이트 대회 인민학교(초등학교) 속도경기(스피드스케이팅) 500m 부문에서 공화국(북한) 기록을 세우며 1등을 했다. 친척들은 ‘신금단(북한 여자중거리육상 스타)이는 체육을 너무(많이) 해서 아이를 못 낳는다’며 (나에게도) 체육을 그만하라고 했다.”사실 박 씨의 천부적 재능은 음악 분야에 있었다. 그는 최승희무용학교 음악과에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출신 성분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 신세였다.“아들이 여섯 살 때 음악선생이 바이올린을 배워(가르쳐)주었다. 나는 말렸다. 나처럼 가슴 아프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닮아 청음 능력이 남다른 것이 선생으로 하여금 (아들 음악교육에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금성고등에 추천받았으나 외할아버지 문제로 불합격됐다.”박 씨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살리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았다. “군대에 보냈다. 제대군인증과 당원증이라도 있어야…. 13년이라는 긴 세월을 군에서 보내야 했다.” 그 덕분에 아들은 어머니의 꿈이었던 평양음악대학을 나온 뒤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박 씨 자신은 한국에 온 뒤에야 음악을 통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북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세계(정상)급 오페라단과 교향악단의 연주를 보면서 아들을 생각했다. 꿈만 같았다. 음악을 사랑하는 동료들과 외국 음악이 들어 있는 카세트를 듣다가 곤욕을 치렀던 나는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수기 앞부분에는 박 씨 필체의 노래 가사와 악보들이 적혀 있다. 한 음악전문가는 “음표 표기가 전문가 솜씨”라고 평가했다. 박 씨는 자신의 탈북으로 촉망받는 음악가에서 추방돼 농민이 된 아들에게 견디지 못할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박 씨는 아들을 살리려고 재입북을 선택했다. 그런 박 씨의 마음속엔 아들을 통해 음악가의 꿈을 대리 실현하려는 모성애가 깔려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헤어진 후 박인숙 씨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졌다. 월남자의 딸은 아무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인민학교 5학년 때 군(郡) 수학 올림픽에서 1등을 하였지만 약속된 상품은 나오지 않았다. ‘월남쟁이’ 딸이 1등을 해 떠들썩한 게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다음 날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쟤는 아무리 잘해도 쓸데없다’라고.” “1957년 인민학교를 졸업하면서 최승희무용학교 음악과에 추천받았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아버지였건만 나에게는 아버지란 존재가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내 맘대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어머니에게 왜 아버지를 붙잡지 못하고 잃어버렸느냐고 철없이 엉엉 울었다.” 그런 박 씨에게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너는 알아야 한다. 남이 한 발자국 걸어갈 때 너는 열 발자국 뛰어야 한다는 것을….” “(중학교) 졸업식 날. 최우등생 호명과 상장 수여식이 있었다. 수상자 3명 중 나는 없었다. 나는 8학년까지 한 번도 최우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성분이 나쁘다고 억지로 빼놨던 것이다. 눈물이 났다. 눈물이 안 나는데 엉엉 운 적은 많았어도 눈물이 나는데 울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반동일지라도 (내가) 최우등이야. 그렇지 않은가.” “이사할 때 아이들이 기차를 따라오며 소리쳤다. ‘잘 가라. 다시 만나자. 인차(곧) 오너라.’ 며칠 뒤 ○○이가 왔다. 그날 밤 일로 학교 민청총회에서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열아홉 살까지 한마을에서 살던 죽마고우와 헤어지며 우는 것도 반당적 행위라니….” “졸업생 3분의 1이 대학에 갔지만 나는 1인자였어도 추천을 못 받았다. 어머니 몰래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는 마치 자기가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곤 하였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지난달 28일 북한에 돌아가 남쪽을 비난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한 박인숙 씨(67)의 삶은 말 그대로 남북 분단으로 빚어진 우리 민족 비극의 축소판이다. 그가 한국에 남겨두고 간 수기엔 6·25전쟁 당시 피란 도중 뜻하지 않게 이산가족이 된 순간부터 반동으로 몰려 핍박을 받아야 했던 월남자 가족의 설움, 북한 식량난에 따른 대량 탈북과 중국에서 체포된 뒤 강제 북송돼 고문 받은 내용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 남북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의 정서적 차이와 재산권 문제로 인한 갈등도 고스란히 들어 있다. 동아일보는 박 씨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 꼼꼼히 기록한 수기와 수첩 내용이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를 포함해 우리 국민 전체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판단해 수기 내용을 상·하로 나눠 소개하기로 했다. 다만 그의 한국생활과 친척 이야기는 관련 당사자의 신변안전과 명예를 고려해 쓰지 않기로 했다. 》 “내 유년기 기억의 첫 장을 꽉 채워 줬던 이 이야기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1950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박인숙 씨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네 아이들과 줄넘기를 하던 그는 어른들이 무리 지어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다.“군대들이 줄지어 앉은 멋진 자동차가 서서히 들어오고 큰 길 량(양) 옆에는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있고,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엉거주춤 서서 흔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불안한 몸가짐을 하고 한 줄로 서 있었다. 그것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든 전쟁의 시작이었음을 내 어찌 알았으랴!”그가 처음 본 국군의 인상은 공포였다. 박 씨의 할머니는 누군가의 집을 묻는 국군에게 부지깽이로 방향을 가리켰다는 이유로 총살될 뻔했다.“국방군 2명이 할머니를 밭에 세워놓고 권총을 겨누고 노발대발하지 않는가!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쳐 왔다. 나는 달려가 할머니를 붙잡고 ‘우리 할머니 죽이지 마세요’라고 애원했다. 동네 어른들이 나와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사경에서 구원됐다.” 박 씨는 당시 할머니에게 달려가다 넘어져 생긴 상처를 볼 때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떠올리곤 했다.평생 잊지 못할 국군도 있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긴 박 씨를 ‘하나도 따갑지 않게 해 주겠다’고 능청스럽게 속이고 물집을 터뜨린 뒤 성냥불로 지져 치료했다. 기절초풍하며 울었지만 효험이 있었는지 그날부터 박 씨는 뛰어다닐 수 있었다. 그는 과자와 사탕을 주기도 했다.“나는 오빠가 마냥 좋았다. (그는)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하늘을 쳐다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도 나를 불러 노래도 배워(가르쳐) 주었다. 그 노래는 아버지와 이(북)쪽과 저(남)쪽으로 갈리어 그리울 때마다 혼자 애달피 부르곤 하던 노래였다.”서로 다른 얼굴의 군인이 공존하는 전쟁은 어른들에겐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세상이 바뀌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었다.“네 분이 모여서 무슨 논쟁을 그렇게 하시는지 위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끝날 줄 몰랐다…. ‘엄마 이겨라, 아빠 이겨라. 엄마 이기면 내 가운뎃손가락에 딱 붙어라’ 추워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동생은 이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옆집 동원이 아버지가 달려와 ‘아이구, 박 의사님, 어째 이러구들 있습네? 온 동리가 다 떠나가는데 빨리 가시기우!’”논의 끝에 박 씨 가족도 피란길에 올랐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기다리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피란민 행렬에 묻혀 떠밀려 갔다. “식구들을 잃을까 봐 두리번거리면서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할머님에게 칭찬받기를 좋아했던 나는 발구에 타지 않고 그냥 걷겠다고 떼를 써 얼마쯤 가다가 지쳐 아버님의 등에 업혀 갔다. 그때 일곱 살이었던 내가 악돌이였다고 후에 할머님이 회고하시는 것을 들었다.”짧았던 피란길은 어느 강 앞에서 끝났다.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어 가까이 가 보니 작은 배에 수십 명이 타고 강을 건너려는 것이었다. 맨 마지막이 우리 차례였는데 워낙 식구가 많아 절반밖에 탈 수 없었다. 나눠 타고 가면 되지 않겠냐는 말에도 아버님이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헤어질 수야 없지 않나. 모두 그 배를 타고 갔더라면 아버님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을….”배는 돌아오지 않았고 강을 건너지 못한 박 씨 가족은 다시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때 마주친 피란민 행렬 속에서 누군가 달려 나와 “아이구, 이게 박 의사 아닙니까?” 하고 알은체했다. 그 말을 마침 주위에 있던 국군 헌병이 들었다.“‘박 의사란 게 누군가’ 하면서 헌병이 총탁(총의 개머리)으로 아버지를 밀쳤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우성치며 쫓아가려 하였으나 사람들을 헤치고 나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울고 있었다. 남쪽으로 다시 가면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것이 (아버지와) 영영 이별이었다.”아버지를 찾으려고 고향으로 가는 길 대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박 씨 가족을 산에서 내려온 누런 군복의 군인(인민군)들이 막아섰다.“‘여러분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인민군과 중국지원군이 재진격했습니다.’ 밤새 세상이 또다시 바뀌었다. 아버지를 어데 두고 시체들을 넘고 넘어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박 씨는 탈북한 뒤 2006년 8월 서울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찾았지만 이미 정신을 잃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가 찾아뵌 지 20여 일 만에 그의 아버지는 딸이 온 사실도 모른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등졌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박인숙 씨의 조부모는 늘 남쪽으로 간 아들을 그리워했다. “쉴 참이면 할머니는 각담(돌무더기)에 올라 앉아 노래를 부르다가 슬피 우셨다. 그 모습이 그리도 처량할 수 없었다. 장마당에서 사온 쌀로 이밥(쌀밥)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밥이 네 식기(그릇)가 있고 거기에 보자기를 덮어 놓았다. 내가 물으면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네 애비, 삼촌들이 올 것 같아서…. 집 나간 사람들은 꼭 온단다.’” “깊은 밤에 자다가 깨어보면 할아버지가 자그마한 밥상에 무엇인가 올려놓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도 그것이 아들들의 명복을 비는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박 씨는 자신의 나쁜 성분에도 불구하고 정을 나눴던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 추억의 첫머리엔 사람 찾기 계주를 했던 인민학교 시절의 일화가 적혀 있다. “뛰어나가 쪽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달리시오.’ 젠장, 하필이면(남쪽으로 가신 아버지와 함께 달리라는 쪽지가 나오나)…. 눈물이 왈칵했다. 나에게 어디 아버지가 있는가! 쪽지를 던지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질하며 울었다. 주석단에 계시던 교장선생님이 달려와 나의 손목을 이끌고 달렸다. 비록 1등은 못했지만 교장선생님이 고마웠다.” “아버지의 조수였던 황학룡 선생이 어머님을 육아원에 입직(취직)시켰다. 반동의 처인데…. 아버님과 제자의 의리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좋은 아버지인데 우리는 갈라져 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박 씨를 챙겨주던 친구도 있었다. “기술 학교에 다닐 때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고 다녔다. 점심때 나는 슬며시 나무숲에 가서 책을 보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사연을 알게 된) 내 옆에 앉은 강은산이 늘 도시락을 2개 싸왔다. (나중에) 남편을 잃은 은산이가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삶 자체가 쌀을 구하기 위한 투쟁이었던 그때 나를 찾아오기 미안했을 것이다. 살기 힘들다고 의리까지 저버린 내가 죄스러웠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조선중앙TV는 지난달 28일 박인숙 씨가 평양 중심부의 고급 아파트에서 아들 내외와 함께 살게 됐다고 선전했다. 박 씨가 자기 집 고급 장롱을 열어보는 장면도 방영했다. 북한의 파격적인 선전으로 미루어볼 때 박 씨가 받은 ‘혜택’은 김정은의 승인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별한 잘못이 없는 한 박 씨 가족은 계속 평양에서 거주할 가능성이 높다. 박 씨를 처벌하면 전 주민을 대상으로 선전한 ‘김정은 은덕정치’가 결국 ‘보여주기 쇼’였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박 씨는 앞으로 북한 전국을 순회하면서 김정은의 배려를 선전하고, 한국으로 향한 탈북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증언하는 강연자로 활동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박 씨와 유사한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1996년 한국에 입국했다가 2000년 북한으로 되돌아갔던 탈북자 남수 씨는 “그를 용서해주라”는 ‘김정일 방침’에 따라 고향에서 목욕탕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전국을 돌면서 탈북을 막는 강연을 했지만 2003년 아들을 데리고 재탈북해 한국에 돌아왔다. 1996년 탈북한 최승찬 씨는 한국의 한 은행에서 대리로 일하다가 2005년 재입북한 후 용서를 받고 개성컴퓨터센터에 취직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일성대 졸업·2001년 탈북)}

《 부푼 꿈을 안고 찾아온 땅에서 그녀는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월남한 아버지가 재력가라는 소식에 목숨 내걸고 탈북했지만 와보니 아버지는 병상에서 의식을 잃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복형제는 그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던 때 북에서 청천벽력이 날아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부부와 손녀가 어머니의 탈북 사실이 드러나 평양에서 황해북도의 한 오지 농장으로 추방돼 전기도 없는 토굴 같은 집에서 보위부원의 철통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을 위해 강제북송과 고문 등을 이겨내며 탈북해 한국에 왔고 아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한 푼 두 푼 돈을 벌던 그녀는 절망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외롭고 병든 몸과 눈물뿐이었다.북한으로 돌아가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연 탈북여성 박인숙 씨의 이야기다. 동아일보는 박 씨가 서울에서 노트와 수첩에 자필로 남긴 수기와 일기, 사진 등을 최근 단독 입수했다. 》박 씨의 수기엔 아들에 대한 죄책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너(아들)에게 죄 짓는 내 인생을 용서해라. 중국에 와서 아버지 만나 돈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그만 이성을 잃고 넘어왔다… 혈육을 다 버리고.” “내 아들(을) 망가뜨려 놨는데 사돈께 미안하고 며느리와 분이(손녀로 추정)에게 지은 죄, 눈물이 바다가 된다.”박 씨는 입국한 2006년부터 아들의 추방소식이 전해진 2008년까진 자신을 희생해 아들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아들을 지옥에 둔 어머니에겐 더이상 천국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천국, 아들의 곁을 찾아 다시 떠났다. 자신이 북한 당국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아들이 복권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재입북이 아들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목숨을 내건 것이다.수기를 보면 그의 재입북은 일각의 주장처럼 보위부의 협박에 따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수기엔 2010년부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준비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한국 자살률 세계 1위…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결과’ ‘내 집 마련 11.7년’ ‘한강 투신자살 매일 2.4명’ ‘장군님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았다’ 등 북에 돌아가 한국을 비난하고 북의 지도자를 찬양할 내용을 정리해 두었다. 실제로 그는 이번 기자회견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그의 결단 뒤에는 월남자의 딸로 살면서 북한 체제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개인적 과거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수기는 1950년 눈 내리는 겨울 아버지와 헤어지던 장면부터 시작됐다.박 씨의 아버지는 광복 전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였다. 광복 후 청진의과대학장이던 박 씨의 아버지는 1950년 당시 6세이던 박인숙을 등에 업고 피란길에 올랐다가 국군에 강제 징집돼 가족과 헤어졌다. 가장을 잃은 박 씨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박 씨의 수첩을 보면 ‘아버지를 잃게 한 미국’을 증오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역설적으로 아버지와 함께 월남한 박 씨의 맏오빠는 미국에서 교수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박 씨의 아버지는 남쪽에서 국군 군의관으로 시작해 서울에서 유명 의대 학장을 지냈다. 북에 5남매를 남겨두고 온 그는 남쪽에서 재혼해 다시 2남 2녀를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에서 낳은 막내아들은 3선의 박모 전 국회의원이다.북에 남은 박 씨의 가족은 월남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갖은 박해와 차별을 받았다. 박 씨는 학교에서 8년간 최우등생이었고 군 수학올림픽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만 대학은커녕 야간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음대에 가고 싶어 평양음대 학장까지 찾아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 씨는 1964년부터 함북 청진 나남제약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을 낳아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하지만 2001년 남편이 사망하고, 아들은 13년간 군 복무를 마친 뒤 박 씨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평양음대에 입학하자 박 씨는 남쪽의 아버지와 오빠를 찾아 아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해 탈북했다. 그의 일기장 첫 장에는 ‘남행열차’ 가사와 악보가 적혀 있어 남쪽으로 오려는 강한 열망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가 만난 아버지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딸이 찾아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20여 일 뒤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 씨는 “실현가능성조차 희박한 사선의 길을 넘어 아버님을 찾아왔건만 한마디 말조차 나누지 못한 채 하늘과 땅으로 서로 갈리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자신을 외면하는 이복형제를 대상으로 부친 소유의 재산분할 소송도 생각했지만 국회의원인 이복동생이 피해를 볼까봐 행동에는 옮기지 않았다고 했다.박 씨는 서울 송파구의 한 임대주택에서 살면서 지하철 청소원, 노인 간병인 등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다. 지난해 2월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에 중상을 입었지만 다리를 절면서도 90세 노인의 간병을 다녔다. 외롭고 쓸쓸한 그는 고향과 아들이 그리웠다. “나는 잘 먹고 산다. 그러나 내가 두고 온 땅 공기 물 친척 거리 모두 함께 숨쉬던 것들이 다 북에 있다. 그로부터 오는 ○○감!” 그가 남긴 수첩 속 한 대목이다.북한은 박 씨의 귀환을 ‘김정은식 은덕정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주민들의 탈북 의지를 꺾을 좋은 호재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평일에 불과 6시간 방영하는 조선중앙TV를 통해 무려 1시간 13분간 박 씨의 기자회견을 내보내는 파격을 선보였다.북한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도 1일 그를 ‘돌아온 탕자’에 비유하면서 “극적인 인생과 더불어 만인의 심금을 울려주는 저 화폭 앞에서 감히 누가 북 인권에 대해 떠들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장에는 아들과 딸도 함께 복권돼 참석했다. 박 씨의 모험은 그가 북한의 선전용 제물이 되면서 일단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기자는 박 씨에게 피해가 갈 우려 때문에 취재한 상세한 내용 중 민감한 대목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일성대 졸업·2001년 탈북)}

세상을 바꾸는 정보기술(IT) 혁명의 불길이 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북한에도 거세게 불고 있다. 휴대전화가 100만 대 이상 팔리는 등 각종 최신 문명 기기들이 빠르게 보급되며 북한 사회가 서서히 변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27일 북한 IT 실태를 보여주는 사진들을 단독 입수했다.대북 소식통들과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에는 최근 ‘삼지연’이라는 독자 브랜드의 태블릿PC가 보급됐다. 이 태블릿PC는 인터넷에 접속할 수는 없지만 백과사전, 외국어사전, 게임, e북, 지도서비스 등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부품을 수입해 북한에서 조립한 것인지, 중국 기업이 제조해 북한에서 소프트웨어(SW)만 내장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주체(主體)’를 강조하는 북한이지만 이 태블릿PC에 내장된 소프트웨어 명칭은 모두 영어다. 한 탈북자는 “북한의 IT 용어는 거의 다 영어로 쓴다. 남쪽에 와서 오히려 전문 분야 SW가 한국말로 돼 있어 낯설었다”고 말했다.한 컴퓨터 매장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미국의 HP와 델은 물론이고 대만의 에이서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HP 컴퓨터의 경우 판매가격은 61만5000원이다. 이는 북한 암시장 환율로는 150달러에 해당한다. 북한 돈 60만 원은 북한 일반 노동자 100년 치 공식 월급보다 많은 액수다. 그럼에도 평양시민의 절반 이상은 이 정도의 구매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기능의 컴퓨터가 현재 한국에서 55만∼65만 원 선에 판매되고 있다. 북한 모 대학 강의실 사진을 보면 학생들의 책상에 LG전자가 생산한 모니터 수십 대가 놓여 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에서 한국 브랜드의 TV나 컴퓨터는 더이상 낯선 제품이 아니다.북한이 2010년 말 도입한 전자결제카드는 한국의 현금카드와 유사한 기능으로 집적회로(IC) 칩과 카드번호 등이 국제사회에서 흔히 쓰는 것과 동일하다. 정식으로 보급한 제품은 아니지만 MP4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중국산 휴대용 DVD 재생기기도 전기 공급이 제한적인 북한에서 한 번 충전으로 영화 한 편 이상을 볼 수 있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당국의 불시 가택수색을 피해 숨기기 쉬워 한국 드라마 등 외국 영상물 보급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각종 IT 기기의 유입은 ‘조선이 없는 지구는 없다’는 북한 당국의 주장과 달리 북한도 결국은 지구의 한 국가임을 보여주는 사례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우리가 아는 평양은 출신 성분이 좋은 충성계층이 모여 사는 도시이다. 평양에는 배급과 전기 공급, 살림집 건설 등 지방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특혜가 집중돼 왔다. 북한은 ‘평양공화국’과 그들을 먹여 살리는 ‘지방공화국’으로 나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굶주린 지방에서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도 평양시민들은 정권에 충성을 다할 것이고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나도 평양은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외부에서 바라보는 상식이다.과연 그럴까. 과거엔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평양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변하고 있다.평양의 생활수준은 지방에 비해 매우 높다. 배급제 붕괴 후 대외무역과 뇌물 상납으로 부를 쌓은 사람들이 평양에 모여 있다. 이는 사회주의 제도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이 더 부패해지길 바라고 배급제 시절로 돌아가길 가장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평양시민들이다.평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려면 컴퓨터, 휴대전화, DVD플레이어가 필수적이다. 이런 기기들은 정보 유통을 가속화하고 외부 문명을 빠르게 보급시킨다. 북한에서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가장 많이 보급되고 한국 문화를 가장 많이 모방하고 있는 곳이 바로 평양이다.해외에 나가는 외화벌이 노동자의 80% 이상도 출신 성분이 좋은 평양시민 중에서 뽑힌다. 지난해 중국을 방문한 북한 주민 15만 명의 대다수는 평양시민들이다. 외부세계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전근대적 시스템에서 살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깨닫게 된다.당국의 통제가 가장 먹히지 않고 가장 자유분방한 도시도 다름 아닌 평양이다. 생활총화나 강연회 같은 과거 주민 세뇌를 위한 회의들도 평양에선 이미 돈만 내면 쉽게 빠질 수 있는 형식상 의례가 된 지 오래다. 주민 수탈이 가장 어려운 곳도 평양이다. 과거 김정일이 지시했다는 각종 ‘수탈 금지 방침’을 방패처럼 내밀며 저항하는 데다 권력층이 많아 강제로 빼앗기도 어렵다.하지만 지방의 변화는 평양에 비하면 매우 굼뜨다. 평양에 살다 몇 년 전 지방으로 이주했던 한 탈북자는 “배급이 끊긴 지 오랜 지방에서 오히려 과거 사회주의적 시스템이 더 잘 유지되는 데 깜짝 놀랐다”라고 말했다. 회의가 꼬박꼬박 열리고 각종 노력동원과 무리한 수탈도 큰 반항 없이 집행되고 있었단다. 아마 평양에서 그랬다면 당장 거센 반발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지방 주민들에겐 외부세계가 어떻게 사는지 깨달을 수단과 능력도, 자신을 억누르는 간부들에게 맞서 반항할 힘도 없다. 그저 3대 세습은 당연한 일이고 대를 이어 충성해야 하며 정권에 불만을 터뜨리면 당연히 감옥에 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북한에선 진짜 공산주의자는 농촌에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긴 당장 내일 굶어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겐 먹을 것 이외의 생각은 사치다.위의 탈북자는 “내가 본 평양시민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살길을 찾아 도망갈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지방 사람들이 나라를 지킨다며 목숨 걸고 싸울 것 같았다”라고 고백했다. 평양의 충성심은 역설적으로 평양에 베풀어진 과도한 특혜가 좀먹어 버리고 있다. 최근에도 북한은 해외에 대규모 인력파견을 시작했다. 이 역시 최대 수혜자는 평양시민들이 될 것이다. 충성심이 사라진 평양의 다음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북한 김정은 정권이 경제개혁을 위해 내각에 특별조직을 신설하고 부총리급 인사를 책임자로 임명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정은 정권이 2000년대 초 ‘경제관리 개선조치’와 같은 비중 있는 경제개혁을 시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가속화하는 첫 경제개혁 준비중국의 정통한 대북 소식통들은 25일 “북한 김정은(노동당 제1비서)의 특별 지시에 따라 올해 초 내각 산하에 ‘경제관리방식 개선을 준비하는 소조’(개선소조·추정 명칭)가 꾸려졌고 노두철 부총리(사진)가 조장”이라며 “북한 내부에서는 이르면 8, 9월에 경제개혁 방안이 나온다는 기대가 높다”고 밝혔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은 경제문제 해결에 적극적 자세를 갖고 있다”며 “경제와 관련해 내각의 권한과 책임이 대폭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주중 한국대사관의 분석 결과 올해 1∼5월 5개월 동안 최영림 내각 총리는 41회의 경제 관련 시찰을 다녔다. 지난해 같은 기간(9회)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 이에 앞서 13일 조선중앙TV는 평양에 있는 인민대학습당에서 26일 오후 4시 ‘사회주의 경제관리 방법을 개선하는 데서 나오는 몇 가지 문제’라는 주제로 김일성종합대 염병호 박사의 강의가 열린다고 보도했다. 특히 북한은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나흘밖에 되지 않아 국상(國喪) 기간이었던 지난해 12월 21일 무려 7개의 경제법령을 개정했다. 이 법령은 외국인 투자유치 정책에 관한 것들이다. 개선소조 조장에 임명된 노 부총리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2003년 북한 다른 간부에 비해 비교적 젊은 나이인 59세에 부총리로 발탁됐다. 2009년에는 국가계획위원장까지 겸직해 사실상 경제담당 부총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노 부총리는 북한에서 실력파 간부로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경제개혁 책임자로 발탁된 것은 경제 분야를 총괄하면서 쌓은 경험을 평가받은 것으로 보인다. ○ 농업개혁이 핵심북한 경제개혁의 출발점이자 핵심은 무엇보다 농업분야다. 이 때문에 경제개혁 방안을 마련 중인 개선소조는 농업개혁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농민이 다수인 농업국가”라며 “경제개혁 중 농업개혁, 특히 농지의 사적 소유를 어디까지 인정해 농민의 자발성을 이끌어낼지가 핵심”이라고 밝혔다.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 농업개혁 시나리오는 크게 3가지다. 먼저 현행 협동농장을 유지하면서 생산 과정 및 생산물 처리 등의 자율성을 크게 보장하는 것. 즉 국가는 협동농장에 과제로 할당한 생산물만 요구할 뿐 나머지는 농장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다.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개선조치’를 농촌으로 연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당시 이 조치는 공장 및 기업소에 경영 자율성 부여 및 수익에 따른 분배 차등화, 임금 인상 등의 개혁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나타난 생산 증가 효과는 크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나마도 곧 조치 자체가 유야무야됐다.두 번째는 협동농장 대신 20명 안팎의 농장원으로 구성된 분조나 5, 6개 분조로 구성된 작업반 단위로 생산단위를 더 작게 나눠 자율성을 주는 것이다. 협동농장 책임제보다는 증산효과가 커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마지막은 중국과 같은 개인농 허용이다. 북한 일각에서는 부분적인 개인농 허용에 대해서까지 논의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중국도 개혁개방을 시작할 당시 농업국가였고 서서히 농지의 사적 소유라는 모험을 시작했다”며 “북한 내부는 파격적인 개혁정책을 기대하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많은 북한 전문가는 개인농 허용이 전면 도입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급격한 정치사회적 파장을 북한체제가 흡수하기 어렵고 공동소유인 농기계, 소와 같은 생산도구에 대한 분배도 어렵다.북한이 농업개혁을 실행에 옮긴다면 이는 북한체제에 커다란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0년 전의 7·1경제관리개선조치는 공장 기업소에 경영 자율성을 부여한다고 했지만 북한의 거의 모든 공장 기업소가 가동을 멈춘 상태에서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농업의 경우 땅과 인력만 있으면 생산물이 나오기 때문에 자율화를 어느 정도 보장하면 당장 생산물 증산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한 북한 전문가는 “아무리 낮은 수준의 조치가 취해진다 해도 변화를 갈망하는 북한 주민의 희망이 일부분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신석호 채널A기자 kyle@donga.com}

미국 개신교계의 최대 교파인 남침례교가 167년 교단 역사에서 처음으로 흑인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또 교단 이름에 ‘남부’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도 함께 내렸다. 이 같은 조치는 ‘백인’과 ‘남부’로 표현되는 교단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적극적인 변화와 개혁을 이루겠다는 선언으로 풀이된다. 남침례교는 20일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에서 연차 교단 대의원총회를 열고 흑인인 뉴올리언스 소재 애버뉴 침례교회 프레드 루터 담임목사(55·사진)를 새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침례교회 내 남부파가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북부와 결별하고 남침례교단을 조직한 1845년 이래 흑인이 수장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루터 목사는 총회장 수락연설과 기자회견에서 “소수인종에게 문을 활짝 열어 다 함께 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총회는 또 ‘남침례교’라는 교단 명칭을 ‘큰사명침례교’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각 교회에 부여하는 안건도 통과시켰다. 백인 중심의 보수적이고 배타성이 강한 ‘남부’의 부정적 이미지를 감안한 결정으로 보인다. 남침례교는 신자가 약 2000만 명으로 미국 개신교계 최대 교파다. 지난 10년간 개신교 내 다른 교파의 신자 수가 준 데 비해 남침례교는 오히려 신자 수가 늘어났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올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꾸란을 태웠다가 현지의 대규모 항의시위를 촉발시켰던 미군 병사 7명이 형사 판결이 아닌 가벼운 행정 처벌만 받을 예정이다. 단순한 실수였다는 조사 결과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어서 아프간 주민들의 분노가 이번 판결을 계기로 또다시 터져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AP통신 등 미국 언론들은 19일 미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미군 수사당국이 사건에 연루된 육군 6명과 해군 1명에 대해 징계 처분을 권고했다고 보도했다. 조사 결과에 대한 최종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지만 형사고발은 하지 않고 임금 삭감과 추가 업무수행 제한 등의 행정 처벌만 받게 될 것이라는 것. 이 병사들은 2월 아프간 카불 북부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도서관의 낡은 책들을 폐기 처분하던 중 4권의 꾸란도 함께 소각장에 넣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분개한 아프간 주민들은 전국적인 항의시위를 벌였고 미군 병사들에 대한 공격도 잇따랐다. 그 결과 최소 6명의 미군 및 군사고문, 수십 명의 아프간 병사가 숨졌고, 시위대 수십 명도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직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각 군 사령관이 수차례 사과성명을 신속하게 발표했다. 그럼에도 미 당국은 이 사건이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현지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실수에 불과하다는 방침을 견지했고 관련자 처벌에서도 그러한 방침을 고수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7일 실시된 그리스 2차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한 신민당의 안도니오 사마라스 당수는 20일 “신민당과 사회당, 민주좌파 등 3개 정당이 연합해 내각 구성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신민당의 129석과 사회당의 33석, 민주좌파의 17석을 합하면 새 정부는 총 179석을 확보해 전체 의석 300석 중 과반을 차지하게 된다. 사마라스 당수는 이날 오후 4시 카롤로스 파풀리아스 그리스 대통령과 만나 정부 구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음을 보고한 뒤 총리로 공식 임명됐다. 사마라스 신임 총리는 연정 구성이 타결된 뒤 가까운 시일 내에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과의 구제금융 조건 재협상을 공식 요청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그리스 연립 정부 구성 소식에 뉴욕 증시 등 세계 주요 증시는 일제히 상승세를 나타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유럽 5개국 순방에 나선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66)가 14일 첫 방문지인 스위스에서 기자회견 도중 탈진해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회견장을 떠났다. 이날 디디에 부르크할터 스위스 외교장관과 함께 기자들과 만나 웃음 띤 표정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하려던 수치 여사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며 “4시간 반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책상 아래로 허리를 숙여 달려온 보좌관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그는 기자회견을 중단했다.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회견장을 떠난 수치 여사는 이날 저녁에 예정된 만찬도 취소했다. 하지만 수치 여사는 15일 오전 스위스 연방의회를 방문하는 등 예정된 일정을 다시 시작했다. 수치 여사는 3월에도 총선 유세 중 탈진과 구토증세를 보여 3일 동안 집에서 쉬었다. 수치 여사는 14일부터 2주간의 일정으로 스위스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를 방문한다. 그가 유럽을 찾은 것은 24년 만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시리아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학살이 갈수록 잔혹해지고 확산되면서 학살의 행동대로 나선 친정부 민병대 ‘샤비하’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민간인을 상대로 AK-47소총을 난사하고 날이 넓은 칼인 마체테를 휘둘러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샤비하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보호를 위해 육성된 친위 민병대 조직으로 약 6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지난달 25일 어린이 49명을 포함해 민간인 108명이 학살당한 ‘훌라 대학살’ 직후 생존자들이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이 정부군이 아니라 군복에 하얀 운동화를 신은 민병대 샤비하라고 전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시사주간 타임에 따르면 샤비하는 시리아 내 소수 종교분파이자 알아사드 가족이 속해 있는 알라위파 젊은이들로 구성돼 있다. 알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 집권 시기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 초 서부 라타키아 지방에서 마약, 디젤차량, 전자기기 등의 밀수업을 통해 성장한 조직으로 상인들에게 보호세 명목으로 돈을 강탈하는 등 지역 마피아로 악명을 떨쳤다.샤비하라는 이름은 유령이라는 뜻의 아라비아어 ‘샤바’에서 유래했다. 고급 외제차가 드물던 당시 시리아에서 ‘샤바’라는 별칭으로 불린 독일 고급 승용차 ‘메르세데스벤츠 600’을 몰고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슬람 수니파가 다수인 시리아에서 소수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는 전체 인구의 12%에 불과하다. 이들은 서부 산악지대에서 가난하게 살며 수니파에게 멸시와 학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를 점령한 프랑스가 수니파의 반란을 막기 위해 알라위파를 군에 대거 기용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당시 군 요직에 진출한 하페즈 전 대통령도 이를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후 알아사드 정권은 다수 수니파를 통제하기 위해 샤비하를 정권의 비호세력으로 키웠다. 미국 오클라호마대의 시리아 전문가 조슈아 랜디스 씨는 “이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로 천대받다가 알아사드의 대리인이 돼 지금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며 “어느 누구도 대들 수 없다”고 설명했다.영국 텔레그래프가 입수한 샤비하 사진을 보면 이들은 대부분 근육질의 건장한 남성들이다. 라타키아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모사브 아자위 씨는 “그들은 마치 괴물 같다. 대부분 거대한 근육과 턱수염을 가졌으며 키가 크고 위협적이다. 이들은 근육을 키우기 위해 스테로이드 약품을 복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검은 티셔츠와 군복바지 차림인 이들 중에는 알아사드 대통령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겨 충성을 보이는 남자들도 있다.주애진 기자 jaj@donga.com}

탈북자들에 대한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 여직원들의 욕설과 반말 파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현지 외교관과 국가정보원도 이미 그 같은 실태를 일부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지난해 5월 태국 이민국 수감시설 내의 탈북자들 감방에서 방장을 맡았던 A 씨는 13일 동아일보 기자에게 “지난해 6월 한국에 도착해 (국정원)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태국에서 여직원들에게 당한 수모와 현지 감방 실태에 대해 얘기해줬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에 태국 감방에 있었던 탈북자 B 씨는 “지난해 5월 대사에게 항의 편지를 썼다. 그후 현지에 파견돼 있는 정보기관원이 찾아왔다. 그는 사과를 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그런 고발을 한 이후에도 여직원들의 폭언은 계속 이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해외공관 직원들이 탈북자들에게 폭언을 하거나 무성의하게 대한다는 폭로는 수년 전부터 국군포로 출신을 비롯해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탈북자들의 입을 통해 간헐적으로 제기돼왔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문제의 여직원들은 스스로를 ‘선생님’이라고 지칭하면서 사실상 ‘간수’처럼 탈북자들을 징벌했다는 증언들도 잇따르고 있다. 외교통상부는 13일 여직원들의 업무는 탈북자 신원조사와 한국어 통역 지원에 국한돼 있다고 밝혔지만 이들이 부여된 업무 이상의 권한을 행사해온 것으로 보인다.지난해 12월 태국 수감시설에 있었던 C 씨는 “여직원들이 나타나면 누워있던 할머니를 비롯해 모든 여성이 꼿꼿이 정좌자세를 취해야 했고 목욕하다가도 황급히 뛰쳐나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 앞에서 태도가 불손하다’고 나이를 불문하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주장했다.탈북자 D 씨는 “한국에 입국해서 하나원에 입소한 뒤 앞짐을 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면서 “태국에서 그 여직원들 앞에서 차렷 자세로 있지 않고 앞짐을 지면 욕설을 들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선 앞짐이 욕을 먹는 일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수감시설에 있었던 E 씨는 이 여직원들이 탈북자들이 맨발로 생활하는 감방에 신발을 신고 드나들었다고 주장했다.태국 이민국에선 남성 탈북자와 여성 탈북자가 분리돼 있는데 간혹 3일에 한 번 돌아오는 쇼핑날에는 수감시설 내 슈퍼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E 씨는 “한번은 아들과 함께 왔다 분리 수감된 한 어머니가 슈퍼에 갔다 아들을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단지 멀리서 지켜봤다는 이유로 여직원이 그 여성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연대 책임으로 함께 왔던 여성들까지 늦게 한국에 보내겠다 위협했다”고 증언했다. 감방에 많을 때는 200여 명 넘게 수용돼 있다 보니 누울 자리조차 없어 탈북자끼리 자리싸움을 벌이고 감정이 격해지는 일도 많다. 2010년 여름 탈북여성끼리 싸우던 중 한 여성이 거울조각을 들고 다른 탈북자를 찔러 사망하게 한 일도 벌어졌다. 이때 피가 감방 벽과 천장에 튀었는데 1년 넘게 지난 지난해 12월 당시까지 피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기자가 인터뷰한 탈북자 가운데 8명이 주장했다.E 씨는 “탈북자들 사이에선 ‘그걸 쳐다보고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해 지우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여직원들이 실제로 그런 지시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