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주성하]이런 통일항아리는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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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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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국제부 기자
주성하 국제부 기자
제가 1951년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러니까 제 나이는 80세가 넘습니다.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거죠. 그동안 열심히 살아 크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재산도 모았습니다. 평소 신념대로 자식에게는 재산을 적당히만 물려주고 나머지는 훌륭한 일에 쓰고 싶습니다.

남들처럼 대학에 기부하고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명 대학을 알아보았지만 제 기부금은 학벌 좋은 교수 몇 명에게 연봉을 주면 끝이네요. 그러려고 수십 년 억척스레 모은 것은 아닌데…. 좀 아깝습니다. 그렇다고 건물을 기부할 정도는 아닙니다. 재정이 어려운 대학을 알아보니 요즘 학력 과잉, 대학 구조조정 이런 말이 나오는데 과연 이 기부가 옳은 것인지 확신이 없습니다.

자선단체를 찾아보았습니다. 젊어서 온갖 고생을 다 겪어온 제 입장에서 볼 때 진정 도와주고 싶은 취약계층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정부 지원으로 먹고사는 건 해결됐을뿐더러 복지 예산은 앞으로 계속 늘어난답니다. 혹 정부 지원이나 기부에 익숙해진 수혜자나 자선단체가 빈손으로 시작해 모은 이 돈을 ‘코끼리의 비스킷’처럼 써버리진 않을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면 선뜻 기부할 곳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아마 마음속에 진정으로 유산을 쓰고 싶은 곳이 정해져 있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그곳은 불행히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곳입니다. 혈육을 두고 온 북녘 고향이거든요.

북에선 몇억 원이면 학교 하나를 번듯하게 지을 수 있답니다. 병원도 세울 수 있고요. 제 유산으로 두고 온 고향, 혈육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을 그 고향에 학교와 병원, 보육원 이런 것을 짓고 싶습니다.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 어린이도 도와주는 세상인데 혈육이 사는 가난한 고향에 학교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학교가 지어지면 그냥 제가 남긴 것이라는 기록이나 남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학교와 더불어 고향마을 사람들에게 “남쪽에 가서 자수성가한 아무개가 죽을 때까지 고향을 잊지 않고 좋은 일을 했다”고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라도 저 때문에 월남자 가족이라고 온갖 박해받았을 혈육들에게 속죄하고 싶고, 죽어서라도 선산(先山)에 떳떳이 돌아가고 싶습니다. 고향 혈육의 자식의 자식이라도 그 학교와 병원에서 공부하고 치료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 이런 생각은 현실에선 꿈에 불과합니다. 제가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추석에 임진각 망배단에서 선조 대대로 살아온 북녘 고향을 향해 절을 올리는 일뿐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고향에 투명하게 학교나 병원을 지을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언제일지 모르는 훗날에 누군가가 제가 지금 남긴 유산과 뜻을 이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고 유산을 맡길 만한 곳은 그래도 정부밖에 없습니다. 요즘 통일항아리라는 용처가 두루뭉술한 모금이 한창인데, 저처럼 용처가 분명한 유산도 관리해 주면 어떨까요. 개인의 유산이든, 여럿이 뜻을 모은 유산이든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 뭉클한 사연까지 북녘 방방곡곡에 함께 전해줄 수 있는 통일항아리 아닐까요. 실향민이 고향을 위해 유산과 유언을 남기면 언젠가 ‘때’가 됐을 때 정부가 꼭 유지(遺志)를 이어주었으면 정말 두 눈 편히 감겠네요. 한때 남쪽엔 800만 실향민이 살았습니다. 이를 역사책 속에만 남기고 말 건가요.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통일항아리#실향민#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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