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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다보탑이나 석가탑 해체보수 때에도 느끼지 못한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실수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4일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 해체보수 현장. 석탑 1층 기단 위에서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탑의 중심 기둥 돌)을 바라보던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6)은 떨리는 목소리로 7년 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발견 당시를 회고했다.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담은 항아리(사리호·舍利壺), 사리를 모시게 된 경과를 기록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물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배 소장이 “여기서 희대의 유물이 나오리라고 생각도 못했다”며 옛 기억을 되짚는 동안 현장 인부들은 쉴 새 없이 목봉(木棒)을 내리쳐 상층 기단부의 흙을 다지고 있었다. 2009년 1월 14일 오전에도 이곳은 해체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번째 심주석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린 순간 배병선(당시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과 연구원들은 저절로 ‘동작 그만’이 됐다. 살짝 벌어진 심주석 틈 사이로 1370년 동안 갇혀 있던 황금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사리장엄구였다. 통상 심주석 아래 심초석(心礎石)에 들어 있는 사리장엄구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배병선은 유물 촬영 사진을 들고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허겁지겁 올라갔다. 최맹식 당시 고고연구실장(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이난영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관(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이규식 보존과학연구실장(문화재보존과학센터장) 등 전문가 29명으로 ‘유물 수습팀’이 구성돼 현장에 급파됐다. 심주석 안 26.5cm 깊이의 구멍(사리공)에는 금으로 만든 사리호가 온갖 구슬들에 파묻힌 상태였다. 첫눈에 봐도 지금껏 발굴된 백제 금속 유물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수습팀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유물을 꺼내는 순서를 정하는 일이었다. 사리공에는 사리호, 금으로 만든 사리봉영기, 은으로 만든 관식(冠飾), 청동합(靑銅盒), 금 구슬, 유리구슬, 유리판 등 9900여 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안치된 순서와 반대로 유물을 꺼내야 손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워낙 좁은 공간에 유물들이 밀집해 있다 보니 굴절거울 등을 동원해도 안치된 순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사리호와 사리봉영기 가운데 무엇을 먼저 꺼낼지 의견이 엇갈렸다. 배병선은 고민 끝에 사리호부터 꺼내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 “사리봉영기가 사리공 벽면에 걸쳐 있어서 밑이 살짝 뜬 상태였어요. 금판에 새긴 글자 위의 주칠(朱漆·붉은색 옻칠)이 떨어져 나갈까 봐 몹시 조심스러웠습니다. 사리호랑 직접 붙어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어요.” 금 구슬을 꺼낼 땐 떨어뜨릴 것을 우려해 핀셋 대신 양면 접착테이프를 붙인 막대기로 하나씩 건져 올렸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외부 공기에 노출된 유물의 손상을 막으려면 신속한 수습이 필요했다. 이틀에 걸쳐 밤을 꼬박 새우면서 강행군을 벌였다. 배병선은 발견부터 수습 완료까지 사흘 동안 6시간만 자고 버텼다. 사리봉영기의 명문은 백제사에 대한 해석을 바꿨다. 특히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내용은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의 건립 연도와 발원 주체를 확인시켜 줬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명문을 근거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잘못이며, 선화공주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선화공주 실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륵사가 ‘3탑 3금당’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사찰이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중앙 목탑 터에 선화공주의 사리봉영기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학)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보고서’에서 “조성 연도가 확인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구는 다른 백제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거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익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이 부왕의 3년상을 마친 이후인 415년 건립했으며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호우)도 이를 기념한 물품이라는 견해가 제시됐다. 비 건립 시기를 414년으로 보는 학계의 오랜 통설을 부인하고 교과서가 바뀔 수도 있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전 한국고대사학회장)는 최근 한국목간학회에 발표한 ‘광개토왕비와 장수왕’ 논문에서 광개토대왕비를 건립자인 장수왕의 시점에서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주 교수는 특히 “그동안 광개토대왕비의 건립 시점을 무조건 414년으로 단정하고 이를 의심 없이 받아들여왔다”며 “그러나 전후 맥락에 닿게 (비석의) 문장을 엄밀히 음미하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곧바로 드러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415년에 제작된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의 명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건립 시기에 대한 이견은 비석 내 특정 문장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학계는 ‘갑인년(414년) 9월 29일에 (시신을)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라고 해석하는 반면에 주 교수는 이 문장 뒷부분의 어시입비(於是立碑)를 끊어 읽어 “갑인년 9월 29일 산릉으로 시신을 이장했다. 이에 비석을 (나중에) 세웠다”라고 본다. 문맥상 ‘어조사 이(以)’가 가리키는 문장은 산릉까지로 한정된다는 게 이유다. 주 교수는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왕릉에 매장한 뒤 비석을 세우는 데 최소 4∼5개월이 소요됐을 것”이라며 “이를 감안하면 비석을 세운 시점은 이듬해인 415년 1∼2월로 추산된다”고 설명했다. 그가 비석 건립에 수개월이 소요된다고 보는 근거는 매장 직후에도 묘 앞에서 각종 제사가 이어진 당시 풍습과 더불어 수묘자(守墓者·묘지기) 관련 내용이 비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다. 길이가 50m 안팎에 이르는 거대한 고구려 적석총을 관리하는 데 적지 않은 수묘자가 필요했는데 이를 지정·관리하는 것은 장례의 마무리 절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를 전제하면 41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호우)의 의미도 달라진다. 장수왕이 415년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동시에 이를 기념한 물품으로 배포한 게 호우총 청동그릇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청동그릇 밑바닥에 새겨진 명문(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 가운데 ‘십(十)’자는 같은 종류의 기념품을 여러 개 제작한 것으로 해석됐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 건립과 동시에 기념품을 여럿 만들어 신라에까지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장수왕이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주 교수는 “광개토왕비가 국내용 기념물이라면 청동그릇은 신라 등 멀리 있는 속민(屬民)들에게까지 선왕의 업적을 과시한 것”이라며 “광개토대왕 시대를 마감하면서 장수왕 시대의 새로운 출범을 대내외에 선언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학계는 415년 건립설의 근거가 되는 주 교수의 명문 해석에 이견이 있지만, 장수왕 중심의 접근법은 의미가 적지 않다는 반응이다. 최연식 동국대 교수는 “광개토대왕비 해석에서 그동안 그늘에 가려진 장수왕의 의지를 강조한 시각은 참신하고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본 나가사키(長崎) 현 쓰시마(對馬) 섬에서 도난당한 뒤 한국에 들어온 금동관음보살좌상(사진)에 대해 한국 문화재청이 “왜구의 약탈 개연성은 높으나 이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조사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11일 NHK에 따르면 2012년 10월 한국 절도단이 훔쳐 한국에 들여온 금동관음보살좌상에 대해 문화재청은 “왜구의 약탈에 의한 국외 반출 사실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절도단은 금동관음보살좌상 등 2개의 불상을 훔쳐 한국으로 가져온 뒤 2013년 1월 경찰에 체포됐다. 그 직후 충남 서산 부석사는 “14세기에 한국에서 제작돼 부석사에 봉안돼 있던 것을 왜구가 약탈했다”며 불상을 일본으로 돌려줄 수 없다는 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한일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됐다. 부석사는 가처분 신청 후 3년 동안 본안 소송을 내지 않았고 이에 따라 한국 검찰은 2월 26일부터 가처분취소 신청을 할 수 있는 상태다. 일부에선 검찰이 조만간 가처분취소 신청을 내고 불상을 돌려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김상운 기자}
일본 나가사키(長崎) 현 쓰시마(對馬) 섬에서 도난당한 뒤 한국에 들어온 금동관음보살좌상에 대해 한국 문화재청이 “왜구의 약탈 개연성은 높으나 이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조사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11일 문화재청과 NHK에 따르면 2012년 10월 한국 절도단이 훔쳐 한국에 들여온 금동관음보살좌상에 대해 문화재청은 “왜구의 약탈에 의한 국외반출 사실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절도단은 훔친 두 불상을 한국으로 가져온 뒤 2013년 1월 경찰에 체포됐다. 그 직후 충남 서산 부석사는 “14세기에 한국에서 제작돼 부석사에 봉안돼 있던 것을 왜구가 약탈했다”며 불상을 일본으로 돌려줄 수 없다는 이전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한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문화재청의 보고서는 검찰이 가처분 신청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 2014년 말 제출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자문의견서 작성을 위해 불상 전문가들에게 해당 불상의 약탈 여부에 대한 고증을 의뢰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약탈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사료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출몰 기록이 있어 약탈 가능성은 있지만 이 불상과 관련된 기록은 찾지 못했다”며 “검찰이 요청한 자문의견서의 성격상 문화재 전문가들의 사실 고증 위주로 구성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함께 도난당했다가 지난해 7월 반환된 동조여래입상에 대해서도 “왜구의 약탈에 의한 국외반출 사실을 찾기 어렵다”며 “한일 불교문화 교류 차원에서 일본에 전래돼 봉안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불상이 안치됐던 간노지(觀音寺)는 지난 달 한국 법무부, 외교부, 문화재청에 불상 조기 반환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부석사는 가처분 신청 후 3년 동안 본안 소송을 내지 않았고 이에 따라 한국 검찰은 2월 26일부터 가처분취소 신청을 할 수 있는 상태다. 일부에선 검찰이 조만간 가처분취소 신청을 내고 불상을 돌려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도쿄=장원재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망망대해 위로 띠배(볏짚으로 만든 모형 배)를 끌고 가는 어선이 수평선을 향해 나아간다. 구름에 해가 가려 사위는 약간 어둑한 이 순간 편안함이 전해온다. 액(厄)을 가득 실은 띠배를 버리기 위해 먼바다로 나온 때문일까. 어부들의 뒷모습마저 편안해 보인다. 고(故) 김수남 사진작가(1949∼2006)가 1985년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찍은 흑백 사진이다. 위도의 전통 띠배굿을 수상에서 포착했다. 전시장 한쪽을 가득 채운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관람객의 가슴을 꽉 채우는 묘한 매력이 있다. 오랜 옛날부터 선조들이 굿판을 벌인 것도 결국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을 채우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국립민속박물관이 이달 6일부터 ‘김수남을 말하다’ 특별전을 열고 있다. 지난해 작가의 유족이 기증한 17만여 점 가운데 대표작 100점을 엄선해 전시장에 내놓았다. 민속박물관이 사진작가의 작품 아카이브를 통째로 기증받아 디지털 작업을 거쳐 특별전을 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작가 김수남이 우리 민속 분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동아일보 사진기자 출신인 김수남은 1973년부터 국내 각지의 전통 굿판을 돌아다니며 사진작업을 벌였다. 경제발전과 근대화로 점점 사라져가는 전통 무속문화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발단이었다. 그는 단순히 사진만 찍은 게 아니라 김인회 연세대 명예교수, 황루시 가톨릭관동대 교수와 팀을 이뤄 지방별 굿판을 체계적으로 기록, 정리했다. 10여 년에 걸친 이 방대한 작업은 ‘한국의 굿’(전 20권·열화당) 완간으로 꽃을 피웠다. 김수남 사진의 매력은 굿판에 참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충실히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82년작 ‘여씨할망당 영등굿’에서 잘 드러난다. 제주시 구좌읍에서 촬영한 이 연작(連作)에서는 구삼싱할망(제주 토속신앙에서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신) 역할을 맡은 심방(무당을 이르는 제주 방언)이 동네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장면과 삼신할망(자식을 점지해주고 보살펴주는 신)의 호령으로 마을 밖으로 쫓겨나는 모습이 해학적으로 표현됐다. 특히 쫓겨나는 구삼싱할망이 지팡이를 짚고 언덕을 넘는 장면은 넓은 허공과 오버랩되면서 구도자의 느낌마저 준다. 6월 6일까지. 02-3704-3248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나라가 없어도 돈은 있어야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년)에서 1930년대 만주를 떠도는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 분)의 대사다. 독립투사로 각인된 만주 조선인들의 기존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다. 이른바 ‘만주 웨스턴’ 장르로 분류되는 이 영화에서 만주는 서양 같기도 하고, 동양 같기도 한 묘한 장소다. 일본과 러시아의 패권 경쟁은 만주를 다양한 ‘문화 용광로’로 이끌었다. 실제로 만주국은 한족과 만주족, 일본인, 조선인, 몽골인의 협력을 강조한 오족협화(五族協和)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 책은 냉전 이후 우리 기억 속에서 한동안 잊혔던 만주를 역사의 중심으로 불러내고 있다. 특히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를 1930년대 만주의 사회 변화와 연결지어 해석한다. 일제 식민통치에서 경제발전의 요인을 찾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차별화된 접근법인 셈이다. 물론 이 시기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정부였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저자는 국가가 중심이 돼 강력하게 목표를 밀어붙이는 불도저식 정책이 만주국의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젊은 시절 만주국에서 활동한 박정희 등 군부 지도자들의 경험은 이후 한국 근대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만주의 인적 유산이 소수 엘리트에게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광복 무렵 만주와 일본에 살았던 조선인은 약 400만 명으로 당시 한반도 인구의 20%에 달했다. 특히 1930년대 부산에서는 매년 100만 명의 조선인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향했다. 만주국의 경제 시스템도 한국의 중공업화 노선과 관련이 깊다. 일제가 만주에 세운 공업단지는 당시로선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소련이 2차 세계대전 직후 수만 명을 동원해 각종 생산, 발전 시설을 해체해 자국으로 옮길 정도였다. 만주 공업단지는 전후 중국의 중공업화 노선에 공헌하기도 했다. 저자는 만주국과 근대화의 연관성을 설명하면서 편협한 민족주의 시각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식민 경험은 오로지 고난의 시기였던 것만이 아니라 훗날 식민 지배자를 능가할 모방, 차용, 변형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복궁 등 4대 궁궐의 현판 24개가 글씨 색과 바탕색이 뒤바뀌는 등 원형을 잃은 것으로 조사됐다. 일제강점기 사진을 통해 고증이 가능한 조선시대 궁궐 현판 넷 중 하나는 엉뚱한 모습으로 둔갑한 것이다. 특히 이 중에는 왕이 정사를 보는 핵심 전각으로 창덕궁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 등 국보, 보물 6곳이 포함돼 광화문 현판 논란 못지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광화문은 상징성은 있지만 국보나 보물이 아닌 비지정 문화재다. 문화재청이 최근 발간한 ‘궁궐 현판 고증조사’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현판을 촬영한 일제강점기 사진 95건과 현재 모습을 비교 분석한 결과 24개 현판에서 30건의 원형 훼손이 발견됐다. 문제의 24개 현판에는 창덕궁 편전인 선정전(宣政殿·보물 제814호)과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明政殿·국보 제226호)을 비롯해 창덕궁 돈화문(敦化門·보물 제383호), 인정문(仁政門·보물 제813호), 주합루(宙合樓·보물 제1769호), 경복궁 향원정(香遠亭·보물 제1761호) 등 국가지정문화재 6개가 포함돼 있다. 현판들의 원형 훼손 양상은 글씨 색과 바탕색이 잘못된 경우가 15건으로 가장 많았고 △테두리 형태가 바뀐 게 5건 △단청이나 장식 오류 9건 △설치 위치 오류 1건으로 각각 나타났다. 예컨대 경복궁의 양의문(兩儀門)과 응지당(膺祉堂), 함홍각(含弘閣), 건순각(健順閣) 등 10개 전각의 현판은 일제강점기 사진에는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였지만, 현재는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 글씨로 채색돼 있다. 바탕색과 글씨 색이 서로 뒤바뀐 셈이다. 고종의 글씨가 새겨진 경복궁 향원정 현판은 사진상으로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이지만, 보수 과정에서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바뀌었다. 보고서는 “고종의 어필이 새겨진 현판이라는 이유로 글자를 금색으로 (잘못) 격상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궁궐 중에서는 광복 이후 복원 정비가 가장 빈번하게 이뤄진 경복궁이 18건으로 전체 원형 훼손 건수의 60%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왕비가 거주한 침전인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일대의 오류가 특히 심했다. 경복궁 교태전은 광화문과 흥례문, 근정문을 차례로 통과한 뒤 왕이 정무를 보던 근정전, 사정전을 거쳐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지나야 닿을 수 있다. 왕비의 침전답게 궁궐 깊숙한 곳에 후원인 아미산과 여러 전각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구중궁궐(九重宮闕)’이다. 7일 찾은 교태전에는 외국인 관광객 한 무리가 아미산 굴뚝과 화계(花階)의 꽃내음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날 관광객들이 열심히 둘러본 교태전은 원형을 잃은 궁궐 현판들로 둘러싸인 사실이 조사 결과 드러났다. 우선 강녕전에서 교태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문인 양의문 현판부터 글씨 색과 바탕색이 서로 뒤바뀐 상황이다. 이 현판은 일제강점기 촬영 사진에서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였으나, 현재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돼 있다. 이뿐이 아니다. 교태전을 양옆에서 떠받치듯 좌우로 자리 잡은 전각인 원길헌(元吉軒)과 함홍각 현판도 양의문처럼 글씨 색과 바탕색이 서로 바뀌었다. 교태전 바로 뒤쪽에 있는 건순각 현판도 마찬가지다. 교태전을 상, 하, 좌, 우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전각과 문의 현판들이 모두 원형을 상실한 셈이다. 이들은 모두 1995년 침전 영역 복원공사 당시 건물과 함께 새로 제작됐다. 복원 당시 현판에 대한 원형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문화재청은 김대현 문화재활용국장이 주재한 지난해 11월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에서 문제가 된 현판을 즉각 교체하기보다 향후 노후에 따른 수리 시 원형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현존 유일의 조선시대 측우기가 10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국립공주박물관은 개관 70주년 기념 기획특별전 ‘충청감영’에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보물 제561호·사진)’를 선보인다고 5일 밝혔다. 충청감영은 충청도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관청으로 1603년 설치됐다. 충청도 54개 고을을 관할한 충청감영은 본래 충주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공주로 옮겼다. 금영측우기에서 금영은 조선시대 당시 금강과 가까운 곳에 있던 충청감영의 별칭이다. 금영측우기는 1837년(헌종 3년)에 제작됐다. 높이 31.5cm, 지름 15.3cm로 대나무처럼 원통에 마디가 있다. 측우기 가운데에는 6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본으로 반출된 뒤 1971년 환수돼 현재 서울기상청이 소장하고 있다. 측우기에는 빗물의 깊이를 재는 자인 주척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상태다. 금영측우기는 14일까지만 공개된다. 공주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에서 실학박물관의 ‘김육 초상’과 충청감영의 선화당(宣化堂) 현판 등 유물 100여 점을 전시한다. 다음 달 29일까지. 041-850-6363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때 어디서나 세계화가 회자되던 시절이 있었다. 방송 뉴스도, 신문도, 심지어 드라마도 세계화를 찬양했다. 1997년 이른바 ‘세계화 구상’을 발표한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 전도사로 불렸다. 세계화를 거부하는 것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됐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의 주역으로 섣부른 세계화가 지목됐다. 세계화가 남긴 여운은 씁쓸했지만 사람들은 금세 더 고상한(?) 단어를 찾아냈다. ‘글로벌’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부터 글로벌 자본주의까지 ‘글로벌’의 위상은 문민정부 때 세계화에 버금간다. 자, 글로벌은 우리에게, 그리고 인류에게 정답인가. 이 책은 ‘아니요’라고 단언한다. 마치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종말론적 묵시록 같다. 저자는 “글로벌 자유주의 경제가 급진적으로 개혁되지 않으면 세계는 정치 격동과 경제 붕괴, 무역전쟁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속성상 아시아 금융위기 등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균열이 중심부까지 뒤흔들어 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IMF와 같은 초국가기구를 통해 미국식 신자유주의(혹은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세계 각국에 이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예컨대 미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해법으로 강조하는 ‘노동시장 유연성’은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일본에 독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아시아 자본주의는 고유의 역사와 사회구조, 가족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초국가 규제기구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전 세계적 금융위기와 디플레이션에 대한 해법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글로벌화는 비극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후기에서 “전 지구적 자유방임 시장이 깨지면서 국제적 아나키 상태가 심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립박물관에서 상업전시의 적절성은 여러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31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가진 이영훈 신임 관장(사진)의 말이다. 이 관장은 전임 김영나 관장이 청와대의 프랑스장식미술전 개최 요청을 거절해 경질됐다는 주장에 대해 “정무직 인사에 대해 인사 대상인 제가 답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프랑스장식미술전은 청와대의 압력에 따른 게 아니고 이미 2014년 2월부터 프랑스 측과 협의해 추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기자회견장은 최근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 사자상 논란까지 불거진 탓인지 전임 박물관장들의 간담회 때보다 많은 취재진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6·25전쟁 때 파괴된 지광국사탑은 1957년 복원 과정에서 사자상을 박물관 수장고에 따로 보관했지만 2010년까지 까맣게 잊혀졌다. 박물관은 2010년 우연히 사자상을 발견했으나 이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즉각 알리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 연구소 관계자가 박물관을 방문해 사자상 조사 자료를 요청했지만, 담당 학예연구사가 “연구논문을 다 쓸 때까지 기다리라”고 답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관장은 “그동안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인식을 불식하겠다”며 “전시실처럼 수장고도 열어젖히겠다는 각오”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재청과 정보 공유를 하지 않은 데 대해서도 “저희 잘못이다. 그런 일이 없도록, 불협화음이 없도록 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대학교수나 연구원을 객원연구원으로 초빙해 특정 전시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시켜 수장고 내 유물정보를 공유하는 계획도 나왔다. 이 관장은 “앞으로 열린 자세로 관련 기관, 학계와 협력을 강화하겠다. 객원연구원 제도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화재위원회가 논란이 됐던 강원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의 청동기시대 고인돌(지석묘·支石墓)을 방형(方形·사각형) 환호 (環濠·마을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외곽을 둘러싼 도랑) 옆으로 이전하고, 수장급(지배자) 주거지를 환호 위에 재현하기로 했다.사업 용지 북쪽에 도로를 내도록 허가해 달라는 강원도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고고학계 의견을 반영해 방형 환호와 고인돌, 수장급 주거지를 한데 묶어 문화재보존구역에 새로 편입시키기로 한 것이다.이에 따라 총 5000억 원이 투입되는 레고랜드 건설과 관련해 문화재 보존 논란은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문화재위 매장문화재분과위원회(위원장 이현혜)는 18일 열린 회의에서 기존 문화재보존구역인 A1 지구에 도로 건설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문화재보존구역을 다시 설정하기로 했다고 30일 밝혔다. 그동안 논란이 된 고인돌 48기의 이전 위치는 2014년 당시 결정한 중도 남쪽의 테마파크 확장 터에서 북쪽의 방형 환호 옆으로 바뀐다. 앞서 시민단체들이 고인돌 이전에 반발해 지난해 감사원이 감사에 나서기도 했다. 또 문화재위는 2014년 발견돼 복토를 마친 방형 환호 위에 청동기시대 수장급 주거지를 재현하고 근처에 유물 전시관을 세우기로 했다. 실제 방형 환호 안에서 발굴된 수장급 주거지의 규모와 구조를 토대로 원형을 복원한 뒤 지상에 재현하겠다는 것. 2014년 문화재위의 조건부 승인 때는 방형 환호가 문화재보존구역에서 제외된 데다 복토 이후 활용 계획이 확정되지 않아 사업자인 영국 회사 멀린이 윈저 성 모형을 환호 위에 세우는 계획을 마련했다. 이에 문화재위원들이 “복토된 한국 문화재 위에 윈저 성 모형을 세우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해 왔다. 이번 결정으로 향후 레고랜드 사업 용지의 위치와 관람객 동선도 바뀌게 된다. 고인돌과 재현된 수장급 주거지가 사업 용지 위쪽에 자리 잡게 돼 레고랜드 시설은 현재 설계된 위치에서 남쪽으로 150m가량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또 레고랜드 관람객은 북쪽 주차장에서 내려 정문으로 걸어가는 중간에 유적과 전시관을 거치게 된다. 문화재위의 이번 결정은 한반도 유일의 방형 환호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감안한 조치로 풀이된다. 둘레 403.7m의 방형 환호는 구릉지대에 있는 둥근 모양의 일반적 청동기시대 환호와 달리 사각형이고 평지에 설치됐다는 점에서 전례가 없다. 평지 방형 환호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발견됐지만 지금껏 한반도에서는 나오지 않아 학계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방형 환호가 특히 중요한 것은 내부에 일대 주민을 다스린 수장의 주거지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환호 안에서만 총 186기의 주거지가 나왔다. 고고학계는 중도 유적을 통해 방형 환호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한다. 문화재위는 강원도와의 협의를 거쳐 다음 달 1일 임시회에서 최종 방침을 확정한다. 강원도는 문화재위 승인이 나는 대로 6월부터 기반 공사에 착수해 내년 상반기 테마파크 개장에 이어 2018년 레고랜드 전체를 완공할 계획이다. 강원도는 문화재위원회의 이번 결정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학계와 지역사회의 관심사인 출토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는 데다 공사에도 큰 영향이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연규복 레고랜드추진단장은 “문화재보존구역 재설정이 최종 확정되지 않았지만 강원도 입장에서는 도로 신설 등으로 사업 추진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상운 sukim@donga.com·춘천=이인모 기자 }

경북 경주시 월성 발굴 현장에서 통일신라시대 관청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발견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하나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통일신라 후기 건물 터 14기가 확인됐다”고 30일 밝혔다. 이날 현장 기자설명회에서 연구소는 건물터 등에서 출토된 벼루 조각을 함께 공개했다. 이번 발굴에서만 총 50여 개의 벼루 조각이 발견됐는데 이는 동궁과 월지, 분황사에서 출토된 벼루 조각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이다. 연구소 측은 고대사회에서 문서 작업의 핵심 도구인 벼루가 발견된 만큼 이 건물 터가 궁궐 내 관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건물터는 유물 양식과 유구(遺構·옛 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엿볼 수 있는 흔적) 양상을 고려할 때 7세기 초반∼8세기 중반까지 약 150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 사각형 건물터 몇 곳이 만들어진 뒤 길이가 36m에 이르는 대형 건물(정면 16칸, 측면 2칸)과 부속 건물, 담이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업무 공간을 넓히기 위해 동쪽 서쪽 담을 허물고 건물 8개를 증축하면서 총 14개의 건물을 지은 것으로 분석됐다. 가장 나중에 지어진 건물 터와 담에서는 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인화문(도장 무늬) 토기와 국화형 연화문 수막새 등이 출토됐다. 학계의 관심사인 월성 내 건물터의 첫 축조 시기는 서기 4세기로 분석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월성은 파사왕 22년(101년)에 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2∼3세기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과 관련해 연구소 관계자는 “발굴 초기 단계여서 별도의 판단을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월성에서는 글자가 적힌 토기와 기와도 나왔다. 새로 발견된 명문은 ‘정도(井桃)’와 ‘전인(典人)’, ‘본(本)’, ‘동궁(東宮)’이다. 이 중 전인은 궁궐 부속 관청인 와기전(기와나 그릇을 생산하는 곳)에 소속된 실무자, 본은 신라 정치 체제인 6부 중 하나(본피부),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궁궐을 각각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에는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 ‘습부(習部)’, ‘한지(漢只)’, ‘한(漢)’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토기가 출토됐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발굴에 들어간 월성 서쪽 성벽(A지구)도 공개됐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성벽의 마지막 보수 시점은 8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서쪽 문지 근처에서 월성 내부를 출입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만든 폭 3m의 통행 시설이 확인됐다. 특히 서쪽 성벽 안쪽에서 지금껏 출토된 적이 없는 특수한 형태의 기와가 나왔다. 이 기와는 신라에 기와가 처음 도입된 6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할배, 여기 옛날 이름이 뭡니까?” “예전부터 ‘애꾸지’ 아이가.” 1989년 7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온통 밭이던 야트막한 구릉 일대를 조사한 신경철 당시 경성대 교수(65·현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가 동네 토박이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애꾸지가 혹 ‘애기 구지봉’을 줄여 사투리로 부른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구지봉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탄생지. ‘그렇다면 애기 구지봉은 그의 후손인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이곳은 반경 500m 안에 김해 패총과 고인돌, 대형 옹관묘가 자리 잡고 있어 신경철이 금관가야 왕릉 후보지 중 하나로 올려놓고 있었다. 앞선 실패로 한동안 실의에 빠진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표조사에 들어갔다. 스무 번 넘게 대성동 주변을 드나들면서 토기편들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신경철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대학 당국에 찾아가 “사재라도 털겠다”며 발굴 지원을 요청한 것. 앞서 그가 이끈 경성대 박물관 발굴팀은 1987∼1988년 3차에 걸쳐 김해 칠산동 고분을 발굴했지만 부산 복천동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유물들만 건졌다. 가야연맹의 맹주국이던 금관가야의 왕릉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첫 발굴 고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시 사립대의 열악한 재정 여건상 또 헛물을 켠다면 발굴은 곧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신경철은 1990년 6월 대성동 구릉에서 가장 높고 입지가 좋은 동남쪽 능선 정상부에 삽을 꽂았다. 지표로부터 채 1m도 파지 않은 곳에서 토기편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도굴 갱이 발견돼 잠시 절망했지만, 곧 3m 깊이의 흙구덩이 밑에서 통형동기(筒形銅器·창자루 끝에 꽂는 의례용 청동기)가 나왔다. 일본 고훈시대 수장급 고분에서만 1, 2점씩 들어 있는 통형동기가 8점이나 나온 데다 함께 출토된 금동 마구, 철제 무기, 그릇받침(器臺·기대)의 제작 수준이 매우 높다는 사실에 신경철은 전율했다. 게다가 목곽의 규모는 길이 6m, 폭 2.3m에 달했다. 그는 이곳이 근 20년을 찾아 헤맨 금관가야 왕릉임을 직감했다. 이달 21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 앞에서 만난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1호분 자리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부산대 사학과 재학 시절부터 방학마다 금관가야 왕릉을 찾으려고 답사를 떠났어요.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금관가야 본거지인 김해에서 왕릉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내 손으로 금관가야 왕릉을 꼭 찾아보고 싶었어요.” 고고학계에서는 흔히 발굴 운(運)이 좋으면 연구 실력이 안 따르고, 연구 실력이 좋으면 반대로 발굴 운이 안 따른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신경철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고고학자로 통한다. 그는 발굴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금관가야 지배층이 부여에서 건너왔다는 파격 주장을 1992년 논문에서 처음 발표했다. 1호분 발굴 이후 4개월 만에 찾아낸 29호분(서기 3세기 말 조성)에서 중국 네이멍구 고원지역의 이름을 딴 ‘오르도스형 청동솥(銅복·동복)’과 도질토기(陶質土器·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회청색 토기), 순장 등 북방계 유목민족의 문화적 속성이 잇달아 발견된 것. “오르도스형 동복은 중국 동북지방부터 중앙아시아, 이란까지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29호분 동복을 세부적으로 관찰하면 귀의 단면이 볼록한데 이것은 주로 중국 지린(吉林) 성 북부나 헤이룽장(黑龍江) 성 남부에서 발견되는 유형이죠. 바로 부여의 근거지입니다.” 당시 학계 반응은 차가웠다. 북방계 기마민족이 남하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도달했다는 에가미 나미오 도쿄대 교수의 ‘기마민족설’ 아류가 아니냐는 시각이었다. 이에 대해 신경철은 “에가미 교수와 나의 학설은 이동 루트부터 완전히 다르다”고 반박한다. 현재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동복을 부여계로 단정할 수 없고 △대성동에서 나온 고식 도질토기, 목곽묘와 비슷한 양식이 경주에서도 발견된다는 점 등을 들어 ‘부여 이동설’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서기 4세기대 문헌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금관가야 왕릉인 대성동 고분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는 게 일치된 견해다.김해=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8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수장고(收藏庫·유물을 보관하는 곳). 박물관 지하로 내려가 300m에 이르는 긴 터널을 통과하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안쪽 수장고를 가려면 25cm 두께의 철문을 다시 한 번 열어야 한다. 지상으로부터 11m 아래인 이곳은 천장이 이중 콘크리트로 설계되는 등 거대한 군사요새를 방불케 했다. 실제 이곳은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의 전시용 비상벙커로 만들어졌다가 1986년 옛 중앙청으로 이전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수장고로 개조됐다. “여긴 일반인에게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2004년부터 수장고 관리를 맡고 있는 서준 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철문 위에는 태양광 패널과 비슷한 모양의 직사각형 패널 두 개가 나란히 달려 있다. ‘전자태그(RFID) 리더’다. 모든 유물에 달려 있는 RFID를 읽어내 수장고 내 유물 반출, 반입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장치다. 특정 유물을 수장고 밖으로 빼내면 보안팀 모니터에 해당 유물의 이름과 관리번호가 표시된다. 서 연구사는 “만약 사전에 반출 허가를 받지 않은 유물이 수장고 밖으로 나가면 경고음이 울리게 돼 있다”고 말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수장고는 총 16개(본관 수장고 2개 제외)로 면적은 3734m²에 달한다. 총 소장유물은 4만4760점인데 이 중 지하 수장고에만 3만1000여 점이 보관돼 있다. 박물관은 30일부터 연말까지 40명의 관람객에 한해 본관 수장고 한 곳(제2수장고)만 공개할 예정이다. 국립박물관이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수장고 일부를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다. 유물 보호를 위해 이날 기자가 직접 둘러본 지하 수장고는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다. 모든 수장고에 보물이 넘쳤지만 압권은 어보(御寶·왕과 왕비, 세자, 세자빈의 인장)와 어책(御冊·왕위 책봉 등에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을 모아놓은 제10수장고였다. 황금빛의 묵직한 어보와 옥으로 만든 어책이 오동나무 진열장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보 옆에는 이를 보관하는 상자인 보통(寶筒)과 보록(寶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황동으로 만든 보통을 감싸는 보록은 나무상자에 상어 껍질을 씌운 뒤 주칠(朱漆·빨간색으로 옻칠을 한 것)까지 마친 고도의 공예품이다. 보록 위에 금색으로 그린 매화, 호랑이, 대나무 등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곳에만 어보 320점, 어책 257점, 교명(敎命) 32점 등 총 1000여 점의 조선왕실 유물이 보관돼 있다. 박물관 측은 현재 조선 어보, 어책에 대해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 신청을 준비 중이다. 수장고 내부 진열장과 천장은 모두 오동나무로 제작돼 있고 바닥은 너도밤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벌레가 번식하는 것을 막고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다. 박물관의 심장에 해당하는 수장고는 보안 못지않게 항온, 항습이 핵심. 나무나 금속, 종이 등 유물의 재질에 따라 수장고를 분류하는 것도 각기 다른 온도와 습도를 맞춰줘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도자기를 주로 보관하는 제8수장고는 습도 53.6%, 온도 20.2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최종덕 국립고궁박물관장은 “비록 제한된 인원이지만 관람객들이 최첨단의 보안과 항온, 항습시설이 구비된 수장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30일을 시작으로 8, 9, 12월에 각 1회씩 총 4회에 걸쳐 회당 10명씩만 선착순으로 관람할 수 있다. 02-3701-7683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9일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교체를 계기로 청와대발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인사 난맥상을 지적하는 비판이 일고 있다. 25일 박물관과 문체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청와대 측은 지난해 말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한 ‘프랑스 장식미술전’ 개최를 김 전 관장에게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 전 관장은 “전시품 중 루이뷔통 등 명품업체들의 상품이 포함된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계속된 문체부 고위 관계자의 요청에 김 전 관장은 명품업체 전시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하지만 중앙박물관과 명품업체 사이의 실랑이로 준비가 늦어지면서 5월 개최 일정이 잡혀 있던 미술전이 무산됐다는 게 중앙박물관 관계자들의 말이다. 중앙박물관 주변에선 김 전 관장이 물러난 이유 중 하나가 전시 무산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에 앞서 박민권 문체부 1차관이 지난달 29일 전격 교체된 것도 전시 추진 감독 책임자였던 박 차관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체부 내에서는 이 같은 ‘경질성’ 인사들과 관련해 2014년 7월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의 면직 처리를 비롯해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가 계속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유 전 장관이 면직된 뒤 문체부에서는 1급 공무원 6명 중 다섯 자리가 교체됐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문체부 공무원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유 전 장관과 가까웠던 주요 간부들에게 사표를 내도록 외압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박 전 차관이 교체되면서 문체부 장차관 세 자리가 모두 외부 인사로 채워졌다. 문체부 내부에서는 내부 승진이 관행인 1차관마저 외부 인사로 바뀌는 것에 대해 불만이 적지 않다. 문체부의 한 관계자는 “유 전 장관 때문에 문체부가 청와대에 미운털 박힌 것은 알겠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장차관을 모두 ‘외부 완장’으로 채우는 게 어디 있느냐. 직원들 사기가 바닥인데 문화 융성이 제대로 되겠느냐”고 했다. 교문수석실과 문체부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과 부처 사이를 조율할 교문수석실이 제 기능을 거의 못 하다 보니 청와대와 부처 간의 갈등이나 혼선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한편 이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프랑스 장식미술전과 관련해 청와대가 김 전 관장에게 외압을 행사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일일이 답변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김 전 관장과 김상률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만난 것은 1월 20일 한 차례뿐이고 전시회는 2014년부터 논의된 것으로, 박 대통령의 관심사도 아니어서 압력을 넣을 이유가 없다”며 “김 전 관장이 5년 넘게 재임해 교체 시점이 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 전 차관 교체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행정고시 33회로 차관급에서는 기수가 낮은 편인데도 발탁됐는데, 그동안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김상운 sukim@donga.com·김윤종·장택동 기자}

“베이팡런(北方人), 난팡런(南方人).” 지난해 중국 출장에서 자주 들었던 단어 중 하나다. 동북지방에서 만난 중국인에게 음식 맛을 칭찬하자, 그는 남방 요리와 자세히 비교하며 북방 요리의 자부심을 드러냈다. 뒤이어 “북방 사람들은 남방과 달리 남자답고 시원시원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사실 황허(黃河) 중심의 북방과 양쯔(揚子) 강 중심의 남방은 사람들의 외모부터 성향, 생활풍습까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 중국에서 남방과 북방의 색다른 문화적 배경이 이른바 위진남북조 시대와 깊게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중국사 전공 교수인 저자는 아예 책 제목에서 위진을 떼버리고 ‘남북조(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라고 했다. 후한이 멸망하고 수·당이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400년을 남북조로 통칭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왕조가 점멸한 분열기인 이 시대를 저자가 남북의 틀로 해석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 기간 이민족의 침략으로 한족 상당수가 북방에서 남방으로 이주하면서 다양한 사회문화적 스펙트럼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한족들은 남방의 산간오지를 농토로 개척하면서 중국의 경제 기반을 확충했다. 이것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찬란한 귀족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남방의 풍부한 곡물을 북방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수나라 양제가 만든 대수로는 중국 대륙 통일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특히 저자는 남북조 시대에서 북방 유목민들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예컨대 한족이 세운 수·당 왕조는 서기 5, 6세기 이민족들이 북방에 세운 북위, 북주, 북제의 제도와 관행을 대거 흡수했다는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대한민국임시정부’ 현판 아래 정복을 차려 입은 초병이 늠름한 자태를 뽐낸다. 1940년 9월 중국 충칭으로 청사를 옮긴 임시정부 정문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로부터 21년 전인 1919년. 시장 한복판의 초라한 상가건물을 빌려 변변한 간판도 없이 출범한 상하이 임시정부 때와는 천양지차다. 임정의 활발한 항일투쟁을 눈여겨본 장제스가 지원을 늘린 데 따른 변화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세종문화회관 내 세종미술관 2관에서 임정 수립 97주년을 기념해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사진전을 24일 개최했다. 임정 주요 인사들과 행적을 담은 다양한 사진 150여 점이 출품됐다. 특히 이번 사진전에는 보기 드문 김원봉 문창범 등 임정 내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사진을 새로 입수해 전시했다. 이 행사는 3년 뒤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내에 임정 기념관을 세우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다. 상하이와 항저우, 충칭 등 중국 각지에 임정 기념관이 들어서 있지만 정작 국내에는 기념관이 없기 때문이다. 건립추진위원회장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임시정부는 좌우를 뛰어넘어 민족의 하나 됨을 추구했다”며 “민족통일을 이뤄야 하는 우리 후손들은 임정을 기념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개막식에는 대사급으로는 유일하게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가 참석해 축사를 했다. 추 대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한 양국이 서로 돕고 우호 관계를 맺어온 상징”이라며 “중국 각지에 지금까지 보존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는 양국 국민이 외세의 침략에 함께 대항한 역사를 잘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4일까지. 02-3210-0422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조선시대 관복을 입은 대신(大臣)을 그린 ‘전(傳) 정곤수 초상’.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된 정곤수를 16세기 말 그린 것으로 한때 알려졌다. 하지만 2008년 X선 투과조사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밑그림 속에 청나라 복식이 발견된 것. 결국 초상화는 청나라가 건립된 1616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 문화재에 대한 진위 감정과 제작 배경 규명에서 보존과학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최근 증도가자 논란에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3차원(3D) 금속 컴퓨터단층촬영(CT)을 통해 결정적인 위조 증거를 발견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존과학부 창설 40주년을 맞아 ‘보존과학, 우리 문화재를 지키다’ 특별전을 열고 있다. 박물관의 보존처리를 거친 국보 제91호 기마인물형토기(하인상) 등 57점을 선보인다. 프롤로그에서는 감은사지 석탑 사리외함(보물 제366호) 등 국가지정 문화재의 복원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어 1부 ‘우리 문화재의 재료와 기술을 보다’에서는 X선, 적외선, 자외선 등 문화재 분석 장비의 활용사례를 전시한다. 2부 ‘병든 문화재를 치료하다’에서는 신라 금관총 출토 ‘이사지왕 대도’ 등 박물관의 대표적인 보존 처리 성과를 망라했다. 특히 전시실 안에 보존처리실을 재현해 보존과학부 직원들이 작업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에필로그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의 보존처리 기록을 모아 놓은 아카이브를 살펴볼 수 있다. 5월 8일까지. 02-2077-9428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화재청이 무형문화재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고 이수자를 직접 심사한다. 문화재청은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무형문화재법)이 28일 시행됨에 따라 무형문화재 심사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한다”고 22일 밝혔다. 현재 문화재위원회 산하 무형문화재분과위원회에는 위원 11명이 소속돼 있다. 새로 구성될 무형문화재위는 최대 30명의 위원을 둘 예정이다. 이와 함께 문화재청은 산하 국립무형유산원에 무형문화재 이수자 심사와 이수증 발급 업무를 맡길 예정이다. 그동안 이수자 심사는 각 종목 보유자 혹은 보유단체가 주관했다. 그러나 최근 무형문화재 지정을 둘러싸고 잡음이 불거지자 심사 과정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무형유산원이 이수자 심사를 직접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보유자, 보유단체를 대상으로 한 수요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수자 심사 대상 종목을 연초 확정할 방침이다. 무형문화재에 대한 다양한 지원사업도 벌인다. 전승공예품 인증제, 은행제와 더불어 전국 규모의 무형문화재대전을 개최해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생산하는 공예품에 대한 수요를 진작시킬 계획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98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제주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 있다. 1만 년 전 신석기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고산리 유적에서는 9만9000점의 석기와 1000여 점의 토기 조각이 발견됐다. 선사 고고학계는 고산리 유적을 동북아시아의 초기 신석기문화를 규명해줄 열쇠로 보고 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최근 ‘제주 고산리, 신석기시대를 열다’ 특별전을 통해 빗살무늬토기보다 2000년 앞서는 ‘고산리식 토기’ 등 유물 600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우선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주거지 유구를 보여주고, 일본의 초기 신석기 유물과 나란히 비교했다. 또 간석기(마제석기)와 배의 존재를 증명하는 배 모양 토기 및 삿대, 각종 낚시 도구, 화살촉이 박힌 고래 뼈 등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식생활의 혁신을 반영한 토기와 이 시기의 다양한 무덤도 보여준다. 6월 5일까지. 064-720-8104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