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계획대로 되질 않았을까[동아 시론/유진홍]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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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사태 뒤 방역체계 만들었지만, 실제 상황 닥치자 인력-물자는 부족
中 입국통제도 미적… 초반작전 실패
뼈아픈 시행착오로 얻은 방역 노하우
이제 한국은 최고의 매뉴얼 구축 중

유진홍 가톨릭대 의대 감염내과 교수·대한감염학회장
유진홍 가톨릭대 의대 감염내과 교수·대한감염학회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힘들고 무섭다. 보호복을 입으면 땀으로 전신 목욕을 하고, N95 마스크를 착용한 탓에 안면에 깊은 고랑이 파이고 콧등에 뾰루지가 나고 귓바퀴 위쪽이 헌다. 전염의 공포는 덤이다. 의사도 인간이다. 두렵지 않을까. 지켜야 할 성벽 위에 올라서서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속에 적들이 몰려올 전선(戰線)을 바라보다 보면 불과 두어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을 반추하고, 앞으로 밀려올 시련을 근심하게 된다.

우리는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를 통해 충분한 경험을 축적했고 학습도 잘돼 있었다. 시청, 보건소와 협업하에 위원회도 구성하고 정기회의를 해왔고 역병이나 생물테러 가상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대비 훈련도 꾸준히 했다. 아마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의료기관들도 그렇게 대비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실제 상황에서 인력 및 물자 부족에 시달리며 시스템이 삐걱거릴까.

방역을 전쟁에 비유해 따져 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전(開戰) 초기 우리는 어느 영화에 나온 명대사처럼 ‘계획이 다 있었지만’ 기세를 잡는 데 적극적이지 못했다. 전쟁에 있어서도 실전은 기세다. 이를 잡지 못하면 시작부터 맥박이 엉킨다.

역사적으로 봐도 인수공통 전염병이 많이 돌았던 중국에서 이번 코로나19가 발생했다. 인간의 면역 체계가 전혀 준비 안 된 상황에서 호흡기로 전염되는 바이러스 질환이라 ‘대규모 유행’도 거의 확실했다. 이런 추정이 들면 처음부터 ‘심각’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경계’ 수준에서 대처하기 시작했어야 했다.

논란이 많았던 중국발(發) 입국 통제도 마찬가지다. 감염원이 있고 거기서 계속 병원체들이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온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다. 막아야 했다. 끝. 단순해 보이는가? 물론 깨끗이 도려낼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양국 간의 다면적 관계를 감안할 때 입국을 막는다는 결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의료인들은 감염원을 막아야 한다는 원칙 이외의 다른 문제들은 상관할 이유가 없다. 그 문제들은 과학자인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불행하게도 입국 통제가 맞는지 아닌지 논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성문은 열렸고 바이러스는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직전의 당나라군처럼 물밀듯이 밀려온다. 기세에 밀리니 문을 닫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수성전은 끝났고 이제부터는 백병전이다.

그런데 그 백병전이 물자와 병상 부족에 시달리는 형세다. 이 또한 충분한 물자 비축과 더불어 과감하게 전국 국립병원 병상들을 비워 놓고 준비하는 시스템을 준비했어야 했다. 최악의 경우 각 지자체의 공공시설, 체육관, 경기장 등을 확보해서 컨테이너라도 깔면서 환자들을 수용하는 큰 그림도 그렸어야 했다.

이 모든 게 평시(平時)에는 과잉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어떤가? ‘가성비’를 의식해 처음부터 온건하고 신중하게 시작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바이러스는 우리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자비 없이 빠른 속도로 온 나라에 퍼진다. 다시 강조하지만 핵심은 기세다. 나중에 일이 커져서 더 큰 욕을 먹느니 처음부터 핀잔 들을 각오를 하고 시작해야 결국 모두가 행복해진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언젠가는 사그라지겠지만, 신천지에 이어 세 번째 밀물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새 돌연변이의 출현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모임이나 해외로부터의 유입 통제를 통해 만반의 대비를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뼈저린 시행착오의 교훈을 얻었다. 크게는 보다 세련된 방역 체계부터 사소하게는 ‘안경에 김 안 서리게 마스크 쓰는 요령’에 이르기까지 값지고 두툼한 경험치를 얻은 것이다. 그 어떤 국가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매뉴얼을 우리는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전염병이 지나가면 나오게 될 우리의 피땀이 서린 ‘코로나 백서’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이는 전 세계 방역 체계를 선도할 수 있는 우리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먼저 겪은 자기들에게 배우라고 훈계하는 ‘일부 저쪽 나라’ 인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배워야 할 쪽은 우리가 아니고 바로 그대들이다. 자신 있게 권한다. 코로나 역병은 그대들이 시작했지만, 배우는 건 한국에 배워야 한다.
 
유진홍 가톨릭대 의대 감염내과 교수·대한감염학회장
#코로나19#방역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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