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파 스님 “요즘 사람들 너무 많이 알아서 문제…일희일비 말아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1일 15시 22분


코멘트

“능히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는 게 실천”

깊은 밤 선잠을 깨우던 비는 더 매서워졌다.

19일 오전 6시 경남 양산시 통도사. 아직 도시는 일과를 시작하기 전이건만. 경내는 진즉부터 분주하다. 아침 공양을 끝낸 스님들은 오전 일과를 찾아 총총. 객은 멋쩍게 널찍한 방을 차지하고 앉았다.

풍경 소리도 감추는 서늘한 빗줄기. 산안개를 머금은 앞뜰을 노스님과 하염없이 바라봤다. “빗속 운치도 꽤 그럴싸하죠?” 모락모락 차 한 잔이 이만하면 훈기를 되살렸을까. 그제야 성파 스님(80)은 지긋이 말문을 열었다.

스님이 통도사 방장(方丈·선원 율원 강원 등을 갖춘 대형사찰의 가장 큰 어른)에 추대된 건 지난해 봄.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해 해인사 송광사와 삼보(三寶) 사찰로 꼽히는 통도사. 그곳 방장의 1년은 분명 달랐을 터. 한데 스님은 “평생 여기서 기거했는데 바뀔 게 무어냐. 내 할 일 할 뿐, 다들 알아서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방장에 오른 뒤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까.

“아예 없진 않소. 사부대중(四部大衆) 눈치는 좀 보게 됩디다, 껄껄. 나름 역할이란 게 있으니…. 하지만 기존에 떠오르는 모양대로 살고 싶진 않아요. 타의 모범이 돼야 한다느니, 그런 것도 없고. 난 방장을 꿈꾼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물 흐르듯 오다보니 어느 날 자연스레 온 거죠. 이 자리에서도 뭘 어떻게 하기보단, 꾸밈없이 억지 없이 하는 겁니다.”

-승좌식(방장 취임식)을 안 한 이유도 그래서입니까. 그 비용으로 불우이웃을 도우셨죠.

“뭐 대단한 일 했다고…. 방장이 어디 식을 치러야만 방장입니까. 형식에 얽매이면 집착 밖에 얻을 게 없어요. 다만 능히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는 게 자제고 실천이니. 구애받지 말자고 했습니다. 특별한 게 아닙니다.”

이 대목은 짚을 필요가 있다. 승좌식은 결코 작은 행사가 아니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방장은 8대 총림만 있는 자리다. 영축총림 통도사는 그 중에도 큰 사찰로 꼽힌다. 게다가 이런 결단은 가풍으로 이어질 조짐이다. 5월 통도사 주지로 임명된 현문 스님도 고불식(告佛式)을 거절했다. “어른께서 물리치셨는데, 예의가 아니다”며 역시 전액 기부했다.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이 장경각에서 16만장의 도자대장경을 둘러보고 있다.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이 장경각에서 16만장의 도자대장경을 둘러보고 있다.
-원래도 조예가 깊던 옻칠, 서화, 도예 등 예술 활동이 꾸준하시다 들었습니다.

“그게 내 재주고, 전하는 가르침이오. 하던 걸 그대로 하는 거지. 근데 거창하게 예술이라 부를 거 없습니다. 그저 일상이고 생활이에요. 괜히 고급스럽게 포장하면 서민과 괴리감만 생겨요. (손수 옻칠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리며) 벽에 걸고 감상하는 것만 작품이 아닙니다. 깔고 앉아 살아가는, 이게 다 문화의 향유인 거예요. 짙은 바탕에 사금파리처럼 무늬가 영롱하죠? 난 이걸 우주라 여깁니다. 광대한 우주를 올려다볼 것만 아니라, 등을 대고 누워보는 거죠.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세상도 예술도 달리 보입니다.”

-요즘 속세는 꽤나 시끄럽습니다. 한일이나 남북 관계도 예사롭지 않고요.

“산중에서도 간간히 뉴스를 듣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주위도 잘 살피지 못하는데 어찌 먼 곳을 논하겠습니까. 세상에 이래라 저래라 훈수 둘 처지는 아닙니다. 다만 전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격변을 몸으로 겪었던 세대지요. 현 상황에 너무 과잉반응하면 안 됩니다. 잘 살피되 일회일비는 피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이 알아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더군요.”

-괜한 걱정을 사서 한단 말씀인가요.

“당연히 삶은 최선을 다해야죠. 목표를 갖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과정은 보지 않고 성취에만 욕심을 냅니다. 틈이 없고 여유가 없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똑똑하고 지식도 풍부해요. 그래서인지, 먼저 계산부터 합디다. 이게 성공할지 여부부터 따지는 거예요. 불가에는 ‘문수의 지혜, 보현의 실천’이란 말이 있습니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이고, 보현보살은 실천의 상징이죠. 하지만 둘은 서로 대척점에 있지 않습니다. 이사무애(理事無碍). 이치와 행위는 둘이 아닌 거죠. 머리로만 움직이면 균형을 잃습니다.”

-공즉시색(空卽是色) 같은 건가요. 알 듯 모를 듯, 더 어지럽습니다.

“요즘 부모는 아이의 장래를 미리 계획하고 맞춤 학습을 시킨다더군요. 제 딴엔 영리한 줄 알겠으나, 되레 망칠 수 있습니다. 어른이라고 자기 취향을 금방 찾겠습니까. 굴러 가는대로 부딪히고 모색해봐야죠. 이것저것 다 시키란 뜻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는데 한 길만 있으면 누구나 부처가 되게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칠도 하고, 글도 쓰고, 수행도 닦고, 자연스레 맞는 옷을 걸쳐가는 거죠. 내장에 탈이 났는데 다리를 치료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길 바랍니다.”

-그 어리석음을 피할 마음가짐은 뭘까요.

“굳이 보탤 건 없겠지만…. 수직과 수평, 기준을 잡아야 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나만 잘났다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이고 우주예요. 남 탓만 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보세요. 동서남북은 어딜 가도 동서남북이지만, 자리가 바뀐 건 바로 자신입니다.”

그새 빗줄기는 더 거세져갔다. 무겁던 엉덩이를 떼고 스님 ‘작업실’이 있는 서운암(瑞雲庵)에 오르기로 했다. 앞서 방을 나서던 스님. 성큼성큼 뒤뜰 소형 SUV로 가선 턱 하니 운전석에 앉는다. 통도사 방장 어른이 기사도 없이 직접 핸들을 잡다니…. “저보다 더 에너지 넘치고, 시대를 앞서가는 분”이라던 현문 스님의 말이 무르팍을 탁 친다. 굵은 빗방울에서 소탈한 흙냄새가 물씬했다.


▼ ‘십육만 도자대장경’ 불심이 이룬 걸작 ▼

“우리 후손에겐 이 서운암의 도자대장경(陶瓷大藏經)도 장경각(藏經閣)도 나라와 불교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을 겁니다.”

서운암에 오른 성파 스님은 순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린아이처럼 뿌듯한 맘을 감추지 못한다고나 할까. 경전 등을 보관하는 건물인 장경각 서까래를 올려다볼 때나, 도자로 만든 경전을 쓰다듬을 때도. 그늘진 실내건만 눈빛이 형형했다.

훗날이 아닌 지금 봐도, 도자대장경은 대단한 걸작이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 있는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을 일일이 새겨 도자기 판으로 구워냈다. 양면에 경전을 담은 팔만대장경을 도자기 1면씩만 넣다보니 ‘십육만 대장경’이 됐다.

한 판 크기는 가로세로 약 52X26㎝, 무게는 대략 4㎏. 성파 스님이 1991년 이 불사를 일으켜 일일이 확인하며 2000년 마무리했으니 무려 10년이 걸린 역사였다. 도자기 전문가인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도 여러 번 이곳을 찾아 “이 많은 도자를 이리 네모반듯하게 완성한 건 굉장한 기술이다. 불심으로 이룬 위대한 업적”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대장경을 봉안한 장경각을 완공한 건 그 뒤로 또 한참 뒤인 2013년. 모두 합치면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2년이 더 흘렀다. 장경각 역시 허투루 짓지 않았다. 옻칠 전문가인 스님이 건물에 쓰인 모든 목재와 단청까지 옻칠을 했다. 기와 역시 손수 구운 도자 기와다. 웬만해선 엄두도 못 낼 이 큰일을 성파 스님과 통도사는 왜 한 걸까.

“우리 불교는 전통적으로 호국불교입니다. 나라를 위해 피땀을 아끼지 않았죠. 팔만대장경은 불심으로 대동단결해 몽골을 물리치자는 의도였지 않습니까. 도자대장경은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만들었습니다. 그 마음이 부처에 닿는 날이 멀지 않았겠지요?”

양산=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