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을 사랑한 폐지 압축공… 그를 살게했던 ‘시끄러운 고독’

  • 동아일보

효율적인 현대식 압축기 등장에
35년차 압축공이 겪는 혼란 다뤄
내달 3일 개막… “책에 바치는 헌사”

체코 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주인공 한탸 역을 맡은 배우 정동환. 총체극단 여집합 제공
체코 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주인공 한탸 역을 맡은 배우 정동환. 총체극단 여집합 제공
체코 프라하에 있는 어느 지하 작업장.

35년 동안 폐지를 압축하며, 그 속에 담긴 인류의 지성과 철학을 흡수한 압축공 ‘한탸’가 있다. 겉보기엔 거칠고 외로운 노동자지만, 수십 년간 독서를 하며 책과 정신적 교감을 한 그의 내면은 풍요롭고 시끄럽다. 어느 날 효율성과 기계화를 앞세운 현대식 압축기가 등장하며 한탸는 치명적인 위기를 마주하는데….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원작인 연극이 다음 달 3일 서울 종로구 SH아트홀에서 개막한다. 종이책을 사랑한 압축공, 한탸 역으론 배우 정동환(77)이 출연한다. 작품을 기획한 임야비 연출은 “실제로도 정 배우는 엄청난 다독가”라며 “7시간짜리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2017년)에서 주인공 포함 1인 5역을 맡았을 때도 도스토옙스키 원작을 완독한 건 물론 대심문관의 35분짜리 독백 장면을 완벽하게 구현해 화제가 됐다”고 했다.

정 배우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톨스토이의 ‘참회록’,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햄릿’ 등 고전 문학을 원작으로 한 연극 작품에 다수 출연해 왔다. 자신이 맡은 작품의 대본뿐 아니라 원작까지 꼭 찾아 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 연출 역시 아버지가 출판사에 다녔고 어머니가 서점을 운영하는 등 책과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다. 한 연극 뒤풀이 자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가까워졌다고. “벽돌책이나 장시간을 요하는 공연 말고, 산뜻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정 배우의 말에 임 연출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제안했고, 결국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게 됐다.

연극은 관객이 책을 읽듯 대사를 인지하는 ‘독극(讀劇)’ 형태로 진행된다. 배우가 말로 대사를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수어를 사용하거나 글씨를 쓰고, 미리 녹음된 음성을 트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이 극장에 와서 좋은 책 한 권을 완독하고 나가는 체험을 선사한다”는 의도가 담겼다.

또 극장 입구부터 로비까지 옛 신문 폐지와 헌책으로 바닥을 가득 채워 한탸의 지하실처럼 연출한다. 공연장에 입장하면 폐지가 관객석 위까지 차 있어서 완전히 다른 공간에 와 있는 듯한 체험을 하도록 만들 예정이다.

정 배우는 이 연극을 두고 “연극이 책에 바치는 헌사”라고 했다. 책과 종이에 대한 관심이 예전 같지 않은 세상에서, 책을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책이 된 한 남자를 만나볼 수 있다. 다음 달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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