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유럽은 안보는 미국, 에너지는 러시아, 성장하는 수출 시장으로는 중국에 의존해 왔다. 이제 이 세 가지 모두 미국에 의존하게 됐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유럽의 처지를 이렇게 논평했다. 올 1월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병합을 위협하고, 그린란드에 군사 훈련을 실시한 유럽 8개국에 최대 25% 보복 관세 카드까지 꺼내들면서 80년 넘게 이어진 ‘대서양 동맹’은 크게 뒤흔들렸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에 대한 전통적인 의존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현명하지 않다는 점을 유럽이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이에 유럽 각국에서 ‘탈(脫)미국’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안보·에너지·기술·금융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미국 의존 구조에서 완전한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은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안보에서 에너지, 기술·금융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현실과 탈미국 움직임을 분야별로 짚어본다.
●유럽의 무역·안보·에너지 모두 틀어쥔 미국
[다보스(스위스)=AP/뉴시스]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서 20일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그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EU 회원국에 더 이상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2026.01.20.
미국은 유럽의 최대 무역 파트너다. 2024년 기준 유럽연합(EU)의 대미 상품 수출액은 약 5320억 유로(약 912조 원)로 전체 수출의 20.6%에 달했다. 2위인 영국(13.2%)과 3위 중국(8.3%)에 대한 수출 규모를 합친 것과 맞먹는 수준이다. 수입 규모에서도 1위인 중국(21.3%)에 이은 최대 파트너가 미국(13.7%)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이 유럽에 치명적인 이유다.
유럽의 미국 의존이 가장 뿌리 깊은 분야는 안보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20∼2024년 유럽 나토 회원국의 무기 수입 중 미국산 비중은 64%로, 5년 전(52%)보다 크게 높아졌다. 전투기·미사일·방공망·소프트웨어 기반 시스템 등 핵심 군사 역량에서 유럽은 사실상 독자적인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다. 독일 최대의 미군 기지에 주둔한 미군 병력이 독일 최대 기지의 독일군 병력보다 많은 것이 현실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미국 없이 유럽을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계속 꿈이나 꾸라”고 말한 바 있다.
에너지 분야에서 유럽의 처지는 ‘뜨거운 불에서 프라이팬으로’ 뛰어든 격이다. 러시아 침공 이전인 2019년 러시아산 가스는 EU 가스 수입의 절반을 넘었다. 러시아산이 사실상 끊긴 자리를 미국산 LNG가 채웠다. 2019년 EU 가스 수입의 5%에 불과했던 미국산 비중은 2025년 25%를 넘어섰고, 계약된 물량을 모두 소화할 경우 2030년에는 미국이 EU LNG 수입의 75∼80%를 공급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유럽과의 무역 협상에서 LNG 추가 구매를 요구했다. 에너지를 외교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유럽 주권 위협하는 미국의 기술 패권
2025년 8월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오벌오피스(미 대통령 집무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긱구(NATO, 나토) 사무총장이 회담하고 있다. (백악관 공식 사진, 다니엘 토록 촬영, 재판매 및 DB금지) ⓒ News1미국이 지배하는 금융 네트워크도 예외가 아니다. NYT에 따르면 지난해 유로존(유로화 사용 21개국) 내 금융 결제 거래의 3분의 2 이상은 미국 기업인 비자와 마스터카드 결제망을 통해 이뤄졌다. 오스트리아·스페인·아일랜드 등 최소 13개국은 온라인 결제는 물론, 매장 내 결제에서도 비자와 마스터카드를 대체할 자체적인 결제 수단을 갖추지 못한 상태다.
클라우드·인공지능(AI) 인프라 역시 미국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2024년 아마존·구글·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의 5대 클라우드 기업이 유럽 기업들에게서 거둬들인 수입은 약 250억 달러(약 36조 원)에 달한다. 전체 시장의 83%를 미국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WSJ은 “유럽은 과거 노키아, 에릭슨 같은 기업을 필두로 모바일 혁명을 주도했지만, 인터넷 시대에 접어든 뒤 미국·중국에 뒤처져 거대 기술 기업(빅테크)를 배출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의존 구조는 경제 문제를 넘어 국가 안보 문제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내 전쟁범죄 여부를 조사한 국제형사재판소(ICC) 판·검사들에 제재를 가했다. 당시 미국이 제재 대상자들의 디지털 금융서비스 접속을 전면 차단하면서 이들은 신용카드 결제가 막히고 구글 이메일 계정까지 폐쇄되는 등 일상이 완전히 마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이 사례를 두고 “우리가 우리의 안마당에서조차 실질적 주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덴마크 싱크탱크 유로파의 크리스티네 니센 수석 분석관은 미국 역시 유럽을 긴밀한 파트너로 여기지만 의존의 성격이 다르다고 알자지라방송에 설명했다. 니센은 “미국에게 유럽은 주요 무역·산업 파트너다. 반면 유럽에게 미국 의존은 군사 작전 수행 능력, 기술 인프라, 안보까지 관통하는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런 비대칭성이 미국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는지와 무관하게 미국이 유럽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 구조를 만든다는 분석이다.
●디커플링 아닌 디리스킹… ‘탈미국’의 현실적 한계
13일(현지 시간) 독일 뮌헨 바이어리셔호프 호텔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연례 국제 안보 포럼 뮌헨안보회의(MSC)에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왼쪽)꽈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뮌헨=AP뉴시스이에 이전까지 상상할 수 없던 ‘미국 없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움직임이 각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안보에서는 지난해 확정된 1500억 유로 규모의 EU 공동 방위 투자 프로그램이 속도를 높이고 있다. 구매 물자의 최대 35%까지만 EU 및 파트너국 외부에서 조달할 수 있도록 제한한 ‘바이 유러피언’ 원칙도 방위 조달에 처음 적용했다.
에너지에서는 2027년까지 러시아산 가스를 전면 금지하는 것을 목표로 캐나다·카타르·알제리 등으로 공급처 다각화를 서두르고 있다. 기술·금융 분야에서는 프랑스의 공무원 미국산 화상회의 플랫폼 사용 금지와 ECB의 ‘디지털 유로’ 도입 추진이 추진되고 있다. 무역 다각화 차원에서도 EU는 인도·인도네시아·남미공동시장(MERCOSUR·메르코수르)과 잇달아 무역협정을 체결하며 협력망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EU 관계자들 자신도 이것이 완전한 ‘디커플링(탈동조화)’가 아닌 ‘디리스킹(de-risking·위험 경감)’ 수준임을 인정한다. 폴리티코는 EU 관계자들을 인용해 “디커플링 추진은 아직 초기 단계”라며 “미국과 경제적·전략적 유대를 완전히 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짚었다. WSJ은 “안보·수출·기술 분야에서 미국에 대한 유럽의 의존도는 동맹국과의 분리가 선택지가 아님을 의미한다”고 못 박았다.
13일(현지 시간) 뮌헨 안보 회의에서도 유럽 지도자들의 발언은 ‘탈미국’보다는 ‘관계 재정립’에 가까웠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대국 간 경쟁의 시대에 미국조차도 혼자서 해낼 만큼 강하지 않다”며 “대서양 횡단 신뢰를 함께 회복하고 되살리자”고 촉구했다. 그러나 전직 나토 주재 미국 대사 이보 달더는 NYT에 “미국과 유럽 관계의 본질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유럽은 미국과의 의존을 끊을 수도, 의존에 그대로 기댈 수도 없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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