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심정섭 씨가 17일 『조선의 종교』를 펼쳐 일제의 유사종교 규정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일제는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해 민족운동을 탄압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독립운동가 백강 조경한 선생(1900~1993)의 외손자 심정섭 씨(82·광주 북구)는 제86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조선총독부가 3·1운동 2년 뒤 발행한 ‘조선의 종교’ 책자를 분석한 결과 천도교를 유사종교로 왜곡해 민족운동을 제약했다고 17일 밝혔다.
순국선열의 날은 1939년 지청천·조경한 등 임시정부 요인 6명이 제안해 제정된 기념일로,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21년 9월 25일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의 종교’의 전체 모습. 책은 총 440쪽 분량이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조선의 종교’는 1921년 9월 25일 조선총독부 학무국 종교과 소속 요시카와 분타로(吉川文太郞)가 저술해 조선인쇄주식회사에서 발행했다. 책 6~7장에는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를 유사종교로 분류하며 그 성격을 왜곡한 내용이 실려 있다. 조선총독부가 규정한 ‘유사종교’는 종교와 비슷한 외형을 가졌으나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 범주로, 사실상 각종 보호 장치를 배제하기 위한 분류였다.
천도교는 1860년 조선 말기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뒤 의암 손병희 선생이 이를 계승해 종교화한 민족종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인이 15명으로 가장 많았고,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 참여했다.
‘조선의 종교’ 6장(305쪽)에 수록된 천도교·대종교 등을 ‘유사종교’로 분류한 조선총독부의 주장 부분.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책은 “천도교 등이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소요사건(3·1운동)을 일으켰으나 강화 조치로 많이 교화됐다”, “3·1운동은 기독교·천도교 등의 망동으로 발생했으며 외국 선교사들도 문제였다”는 등의 왜곡된 주장을 담고 있다.
또 “천도교는 신통력·기적을 믿으며 혹세무민한다”, “손병희는 소요사태를 일으킨 주동자”라고 적고, 교도 수가 300만 명이라는 식의 과장된 기술도 있다. 대종교에 대해서도 “단군신화는 가치가 없으며 신화적 내용일 뿐”이라고 폄훼했다.
조선총독부가 1921년 발행한 『조선의 종교』 말미에 수록된 경성불교자혜원과 천도교 성천 전교실 전경 사진.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일제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정치·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종교·교육의 자유만 제한적으로 허용했다”며 “그러나 민족종교가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자 이를 억제하기 위해 ‘종교가 아니다’라고 규정하는 허위 수법을 썼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1915년 포교규칙에서 천도교·대종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했고, 3·1운동 이후에는 학무국에 종교과를 신설해 민족종교를 체계적으로 감시·탄압했다.
조선총독부가 1921년 발행한 『조선의 종교』 말미에 실린 천주교 순교자 13명의 그림과 평양 모란대의 대원군 천주교 박해비 사진.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반면 책 앞부분에는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는 이회광,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뮈텔 주교의 사진 등 친일 성향 종교인의 이미지를 비중 있게 실었다. 천도교 소속이었다가 친일 행위로 제명된 이용구의 사진도 포함됐다. 또 평양 모란대의 대원군 천주교 박해기념비, 천주교 순교자 13명의 사진도 수록됐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은 갓을 쓴 외국 선교사여서 눈길을 끈다.
심 씨는 “책 첫머리에 이회광 등 친일 종교인을 배치한 것은 조선총독부가 이들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음을 보여준다”며 “천도교·대종교 등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한 것은 결국 민족운동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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