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훔쳤던 소년, 검거 경찰 찾아와 ‘큰절’ 올린 사연 [따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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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8월 17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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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봉사하는 삶
전직 강력계 형사 문영호 씨



지난 6월 중순 대구 모처에서 열린 20대 회사원의 결혼식. 이 젊은이의 결혼을 누구보다 기뻐하는 반백의 신사가 있었다. 전직 강력계 형사 문영호 씨(64)다.

문 씨와 신랑의 인연은 약 10년 전 시작됐다. 6학년 초등학생이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혔는데, 알고보니 보육원 출신이었다. 사건을 맡은 ‘문 형사’는 물건 값을 모두 사비로 물어주고 선처받도록 해줬다.

그뒤로는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만나 보살피기 시작했다. 아이는 건실한 청년으로 자라 취직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게 됐다. 문 씨의 관심 속에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고 바르게 성장한 결손가정 아이는 한두 명이 아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면 안돼”
1980년대 무도공채(태권도, 복싱)로 경찰 공무원이 된 문 씨는 1997년부터 지금까지 20여 년간 ‘112아동청소년사랑회’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 이끌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 ‘좀도둑’부터 살인범까지 수많은 범죄자들을 만난 문 씨의 모토는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게 하지 말자”였다. 주로 결손가정 아이들이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첫 범죄가 시작되는데, 이때의 관리 여부가 남은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보육원 떠나는 소년에 사비 들여 월세방

1997년 1월 문 씨가 서울 청량리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10살 아이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빵과 우유를 훔치다 주인에게 붙잡혔는데, 이 아이는 문 씨가 맡았던 변사사건 40대 고인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숨진 후 몸이 불편한 할머니와 단둘이 지하 단칸방에 살던 꼬마는 배고픔을 견디다가 음식을 훔치기에 이르렀다.

당시 아이는 할머니가 돌볼 처지가 아니었고, 결국 보육원의 보살핌을 받게 됐다. 문 씨는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도록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줬고, 아이가 18세가 돼 보육원을 떠나야 할 때는 사비 100만 원을 들여 월세방을 구해줬다. 그리고 요리에 관심 많던 아이에게 일식자격증을 취득하도록 했다. 마침내 일식 요리사가 된 청년(현재 36세)는 일터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본인이 구속영장 청구하고 변호사 선임

문 씨 본인이 구속 영장을 청구하고선 구속되지 않도록 변호사를 선임하는 일도 있었다. 18세 청소년이 오토바이를 훔친 사건이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졌고, 어머니는 과일 노점상을 하며 어렵게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소년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 나도 타보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문 씨는 형사업무에도 충실해야 했기에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아는 변호사에게 수임료 300만 원을 주고 구속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장은 검찰 단계에서 기각됐고, 소년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사건을 까맣게 잊었을 무렵 웬 젊은 부부가 문 씨의 아파트를 찾아왔다. 청년은 큰절을 하며 자신이 그때 그 ‘오토바이 절도범’이라고 소개했다. 청년도 문 씨도 손을 맞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출소하면 아저씨에게 꼭 연락해”

문 씨의 인연들 중에는 범죄의 대가를 치르고 나온 이도 있다. 보육원에서 자립 준비가 안된 채 세상에 나온 한 청소년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남의집 담을 넘었다. 집주인 폭행까지 한 이 소년은 범죄의 정도가 중해 결국 구속됐다. 문 씨는 감옥에 들어가는 소년을 향해 “형기를 마치고 나오면 나에게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3년 후 문 씨가 근무하는 경찰서에 “형사님 저 OO입니다. 기억하세요”라며 20대 남성이 찾아왔다. 문씨는 사비를 털어 월세방을 얻어주고 자신이 아는 중화요리집 주방에 취직도 시켜줬다. 이 청년역시 현재 중화요리사가 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발품 팔아 ‘복지 사각지대’ 수소문
2020년 경찰에서 정년퇴직한 문 씨는 현재까지도 112아동청소년사랑회 회장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 모임 참여자는 한때 전국적으로 100여 명에 이르렀으나 코로나 시국 등으로 모임이 어려워지며 현재는 경북, 전북, 강원 등지에서 약 30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와 함께 ‘경로효친 기행’이라는 노인 지원 봉사모임도 하고 있다.

문 씨가 복시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찾아내는 방법은 ‘발품’이다. 지역마다 하나쯤 있는 오래된 이발소나 구멍가게 등에 들어가 이발을 하고 물건을 사며 주인과 자연스럽게 수다떠는 것이다. 이런 가게들은 남의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개가 몇 마리 인지 속속들이 꿰고 있다는 것에 힌트를 얻었다.


“내 사소한 도움, 남의 인생 바꿀 수 있어”

문 씨는 현실적 지원을 해준다. 지방의 한 지역에서는 진통제와 파스 살 돈조차 없어 괴로워하는 노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녀가 있으나 연락이 안되고 노인 명의로 시골땅이 있어 정부 지원도 못 받는 사례였다. 그는 노인에게 당장 필요한 의약품 부터 사다줬다.

보육원 중학생들을 만났을 땐 이들이 학교와 또래에서 유행하는 브랜드 운동화가 없어 위축돼 있는 것을 알게됐다. 문 씨는 가장 인기있는 브랜드 운동화를 각각 사주고 아이들이 먹고싶어하는 패스트푸드를 사줬다.

문 씨는 “남에게 베푼 나의 사소한 도움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1982년 7월 여름은 그가 이런 삶을 살게 한 시발점이었다. 문 씨는 “군대에서 휴가를 받아 부산 외할머니댁으로 가다가 돈이 완전히 바닥났다. 버스비 25원이 없어 망연자실해 하고 있는데 한 버스안내양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게 내 평생의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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