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가진 자유인… 활극 뒤 ‘공성불거’ 외치며 퇴장한 양정철[황형준의 법정모독]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5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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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021년 6월 6일 본보 인터뷰 당시 양정철 전 원장. 동아일보DB
2021년 6월 6일 본보 인터뷰 당시 양정철 전 원장. 동아일보DB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앞으로다. 통합의 정치로 가야 한다. 답은 연정밖에 없다. 한 10년, 아니 단 5년만이라도 정치적 휴전을 하고 여야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 기치하에 협력과 통합의 정치로 가지 않으면 G7 도약은 힘들다. 여야가 연정을 해야 한다. 일시적 협치 실험이라도 좋다. 안에서 화합하고 바깥 경쟁에서 이기려면 그 길밖에 없다.”
-취재 메모 중-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이하 양정철)이 2~3년 전부터 줄곧 강조하는 이야기다. 그의 이 같은 통합론과 연정론을 처음 들었을 때 의외였다. 솔직히 그가 가진 이미지는 강성 이미지였고 논쟁적인 이슈의 선봉에 서서 ‘홍위병’으로 불렸으니까.

그 역시 50대에 들어 30, 40대 때와 생각이 조금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 일본과 뉴질랜드, 미국 등 세계를 돌아보며 시야가 바뀐 측면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나도 골수 운동권이었는데 청와대 5년 있으면서 국가 전체를 보는 쪽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있었고 또 하나가 지난 3년간 유랑을 다니면서 모든 사고와 시각이 바뀌었어. 지금 내 관심은 다음 대통령이 우리 당이냐, 저 당이냐, 누가 되냐 관심이 없다. 이젠 대통령 당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취재 메모 중-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했던 운동권 출신이라 과거엔 피아 편 가르기를 하고 기득권에 분노하는 마이너적이면서 인권 감수성이 높은 가슴이 뜨거웠던 청년이었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그는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곁에서 줄곧 ‘악역’을 도맡아 왔다. 그 탓에 호불호가 엇갈리고 ‘논쟁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상의 오해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미움받을 용기’를 지닌 것이다.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 중-

결국 그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도와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일등공신이 됐다. 하지만 잊혀질 권리와 공성불거(功成不居·공을 세웠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 원칙, 내 자유도 소중하다며 문재인 정부 내내 공직을 맡지 않았다.

● 등단 꿈꾸던 문학소년에서 운동권 핵심으로



양정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구로구에 위치한 우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글이 좋고 책이 좋았던 문학소년은 고교 시절에도 문예서클에서 활동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직장에서 밀려난 선친은 어렵게 가족 부양하느라 이사를 자주 했다. 자연히 전학이 잦았다. 친구 사귈 기회가 적었고 외로움을 책으로 달랬다. 나중엔 친구보다 책이 좋았고 또래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좋았다.”
-양정철, ‘세상을 바꾸는 언어’ 중에서 -

가난은 그의 시선을 사회로 향하게 만들었다. 특히 서클 지도교사였던 동화작가 김진경 선생님으로부터 사상교육을 받았다. 이에 고교생 양정철도 운동권 대학생들이 보는 이른바 ‘불온(?) 서적’들을 그 시절 이미 섭렵했고 사회에 눈을 떴다. (후에 김 선생님은 이를 이유로 해직됐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교육문화비서관이 됐고 그와 함께 비서관으로 일하는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됐다.)

등단 작가를 꿈꿨던 그는 국문과에 진학하려 했다. 하지만 형편이 어려웠던 가족의 반대로 한국외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는 전공에 관심이 없었고 학보사에 들어가 기자로 활동하는 데 몰입했다. 3학년 때 편집장을 지냈고 동시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전대기련) 회장도 맡았다.

그는 점점 운동권 핵심에 속하게 됐다. 1986년 전대기련에서 발행한 기관지가 문제가 돼 지명 수배를 받게 됐고 아예 한국외대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조국통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이와 함께 전국단위 대학 투쟁조직인 ‘학생투쟁연합’ 서울지역 부의장을 맡아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대학가의 반정부 민주화운동 연합시위를 주도했다. 1년 넘게 장기 도피 중에 검거돼 그는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과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실형을 살았지만 1988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대규모 사면·복권을 단행하면서 수형 4개월 만에 석방됐다.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고 싶었다. 언론사 기자를 해볼 생각도 있었지만 전과도 있는 데다 언론민주화 운동에 대한 믿음이 있어 전국언론노조연맹에서 언론노보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중앙 일간지에서 이직 제안도 받았지만 ‘언론노조를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에 6년간 일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면서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실적 이유였다. 나산, 한보, 신원그룹과 스카이라이프 등 4곳을 거쳐 차장에서 임원으로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마음은 헛헛했다.

“젊은 나이에 ‘운동’하다가 갑자기 기업-기업주 대변하는 일은 마음고생이 컸다. 언론계에 있는 선배들에게 부끄럽기도 했다.”
-양정철, ‘세상을 바꾸는 언어’ 중에서-

결국 2002년 노무현 후보 대선캠프에 합류했고 인수위를 거쳐 5년 내내 노 전 대통령을 모셨다.

● 30대 최연소 청와대 비서관으로 정치 무대 등장
2004년 청와대 비서관 시절의 양정철 전 원장. 동아일보DB
2004년 청와대 비서관 시절의 양정철 전 원장. 동아일보DB

언론인에서 대기업 임직원으로, 청와대 비서관으로 변신한 양정철은 정치 무대의 전면에 섰다. 39세로 최연소 비서관으로 고속 승진했다. 국내언론비서관과 홍보기획비서관을 맡아 정부의 신문방송 정책을 총괄했다.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혈기가 왕성했고 언론계에선 언론노보 기자 출신인 그를 쉽사리 인정해주지도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었다. “기자실에 몇몇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보도 자료를 가공하고 담합한다”며 추진한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은 그 정점이었다.

언론에 민감했던 노 전 대통령이었던 탓에 양정철에겐 악역이 맡겨졌다. 홍보기획비서관 시절 동아일보 등 언론의 신행정수도 이전 관련 보도에 대해 “저주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막말을 했다. 2005년 8월에는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거부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박 대표의 반응은 책임감, 결단, 역사의식, 깊은 성찰, 일관성 등 5가지가 없는 5무(無)”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해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2007년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수립해 기자실 통폐합을 실행해 전 언론으로부터 ‘언론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실 그는 선진화 방안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를 추진하려면 임기 초에 추진했어야 하고 언론계 내부의 공감과 설득 없이는 실효성도 없을 것이라는 취지로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얘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뜻을 굽히지 않자 주무 비서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섰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 盧 지키지 못한 회한에… 文 앞세운 정권 교체에 주력
양정철의 ‘세상을 바꾸는 언어’ 저서.
양정철의 ‘세상을 바꾸는 언어’ 저서.
노무현 정부 말기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쓸쓸한 퇴장이었다. 양정철도 참모로서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 아닌가 싶은 죄책감이 들었고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이 외로워 보였을 것이다.

퇴임 후 어느 날 노 전 대통령이 양정철을 불렀다. 정치에 나서보겠다고 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뜻밖에도 이를 말리셨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민주주의적 진보를 이루려면 국민들 생각과 의식을 바꾸고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정치를 하지 말고 좋은 책을 내자고 제안하셨다.

양정철은 두말없이 짐을 싸서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후 검찰 수사를 받던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부엉이바위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분이 모진 결심을 놓고 번뇌하던 오랜 시간, 그의 고독을 가늠조차 못 했다는 죄책감에 양정철은 괴로웠다. 그 죄책감을 이겨내고 노 전 대통령을 재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권교체였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
-2002년 11월 노무현 당시 대선 후보가 부산에서 문 전 대통령을 소개하며-
노 전 대통령이 이같이 평가했던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 문재인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다는 게 그의 과업이 됐다.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문 전 대통령을 설득했고 2011년 ‘문재인의 운명’ 출간을 도왔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문 전 대통령은 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됐지만 양정철은 서울 중랑을에 출사표를 던졌다가 경선에서 박홍근 의원에게 밀려 탈락했다. 문 전 대통령은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됐지만 그해 12월 치러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 문재인 정부의 일등공신이었지만 대선 뒤 홀연히 떠나

2011년 전국 북콘서트 투어 시절의 양 전 원장과 문 전 대통령.
2011년 전국 북콘서트 투어 시절의 양 전 원장과 문 전 대통령.

대선 이후 문 전 대통령을 비롯한 친문(친문재인) 진영은 대선 패배 책임론에 시달렸다. 양정철도 그 대상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호철 전 민정수석비서관과 전해철 의원 등과 함께 ‘3철’로 불리면서 ‘비선’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문 전 대통령이 2015년 2·8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됐지만 야당은 내홍을 겪으며 혼란이 빚어졌다. 김한길 안철수 전 공동대표 등 비문 진영에선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로 몰아세웠고 끊임없이 당을 흔들어댔다는 게 친문 진영의 시각이었다.

그해 4·29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대표 책임론은 더욱 심해졌다. 당시 한 최고위원이 전했던 이야기다.

“재·보선 참패 이후 어느 날 비공개 최고위원회에서 ‘양정철이 도대체 어떤 ××냐.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뒤에서 다 결정한다고 하냐. 차라리 비서실장이든 부실장이든 공식적인 직위를 주든지 해라’라고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문 대표는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취재 메모 중-

거듭된 쇄신 요구에 양정철도 2015년 12월 이호철 전 민정수석, 윤건영 민형배 김영배 현 의원 등과 함께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거듭된 희생 요구이자 문 전 대통령이 평소 강조해온 육참골단(肉斬骨斷·자신의 살을 베어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다는 뜻)이었다.

2016년 결국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당을 창당하면서 문 전 대통령은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민주당은 김종인 전 대표를 내세워 총선을 치렀다. 그해 6월 문 전 대통령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을 때 양정철은 탁현민 전 대통령의전비서관과 함께 동행했다.

문 전 대표의 대선 예비캠프 성격인 ‘광흥창팀’을 주도하며 대선 준비는 물론이고 정권 교체 이후 밑그림도 그렸다. 2020년 4월 그가 했던 이야기다.

“정치 경력이 짧았던 문 대통령에게 핵심 측근이랄 수 있는 사람은 나랑 이호철 전 수석 등 단 네 명이었고 그 네 명이 목숨 걸고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했다. 심지어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임기 첫날부터 일정도 미리 준비해 둘 정도로 다양한 준비를 했다.”
-취재 메모 중-
양정철은 대선 승리 직후인 2017년 5월 “저의 퇴장을 끝으로, ‘패권’이니 ‘친문’ ‘친노’ 프레임이니 ‘삼철’이니 하는 낡은 언어도 거둬 주시기 바란다”며 “멀리서 그분을 응원하는 여러 시민 중 한 사람으로 그저 조용히 지낼 것”이라며 “잊혀질 권리를 허락해달라”고 밝혔다. 그 뒤 뉴질랜드로 출국해 일본, 미국 등 유랑에 나섰다.

● 당 외곽에서 ‘장막 뒤 조언자’ 역할 이어가

2016년 히말라야 트레킹 당시 양 전 원장과 문 전 대통령의 모습.
2016년 히말라야 트레킹 당시 양 전 원장과 문 전 대통령의 모습.

그는 7개월 뒤 ‘세상을 바꾸는 언어’ 책을 내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를 중용한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진 마음의 빚은 정권교체로 일부 갚게 된 것이다.

“그분이 서거 며칠 전 내게 건넨 마지막 말은 ‘양비는 먹고살 방도는 있는가?’였다. 죽음을 결심한 분이 일체 내색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참모들 걱정을 한 것이다. 이 책은 ‘깨어 있는 시민으로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려 발버둥치고 있다’는, 그분을 향한 나의 안부 인사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이 부디 그곳에서 편하셨으면 좋겠다.”
-양정철, ‘세상을 바꾸는 언어’ 중에서-
주진우 전 기자는 이 책 추천사에서 “양정철은 자기를 낮춘다. 주위를 비춘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짠하다. 그리고 찡하다”고 썼다.

그러다 2019년 5월 이해찬 당시 대표의 강력한 부탁을 받고 민주연구원장으로 전격 복귀했다. 그는 “민주연구원이 총선 승리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첫 일성을 냈고, 백원우 전 의원과 함께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공천에서 물갈이 의지를 드러냈다. 인재 영입을 맡았고 위성정당 논란이 일자 총선 승리를 위해 비례연합정당 참여가 불가피하다며 연합정당 참여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민주당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180석 압승을 거뒀다. 물론 그 이후 열린우리당의 악몽처럼 입법 독주 등을 거듭하다가 2년 뒤 정권을 다시 빼앗기게 됐지만 당시로선 전례없는 성과를 낸 것이었다. 총선 직후 그는 관용과 통합을 외치며 연구원장직을 던지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 등으로도 거론됐지만 그는 결국 약속대로 공직을 맡지 않았다. 2021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객원 선임연구원을 지내는 등 자유인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민주당과 청와대 인사들과 접촉하며 조언과 쓴소리를 했다. 2021년 6월 6일 필자가 했던 인터뷰다.

양정철 “與 절박함 없어…정권 재창출 비관적 요소 더 많아”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607/107315901/1

대선을 앞두고 있던 2021년 11월에는 당내 초선 의원 특강에서 이같이 조언했다.

“스타일리스트형 정치인은 제발 안 되셨으면 하는 간곡한 부탁을 드린다. 하찮은 패션 따위로, 튀는 표현이나 말장난, 돌출 행동 등으로, 그저 뜰 수만 있다면 SNS 통해 뭐든 하려는 분들을 많이 본다. 여야의 그런 모습이 정치를 희화화시키고 냉소와 조롱을 유발한다. 각자가 정치적 정책적 신념은 확고히 가져 주시되 행동에서는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원칙을 지켜 주셨으면 좋겠다. (중략) 저는 ‘스러짐의 미학’을 아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즉, 국민과 공공을 위한 헌신과 희생 후 어느 때 스스로 소멸되어 가는 것이 아름다운지 정확히 아는 것이 좋은 정치라 생각한다.”
-취재 메모 중-


● 소문의 남자… “엇갈리는 평가는 자업자득” 지적도
야권 일각에선 그가 결과적으로 윤석열 정부의 공신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양정철은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 영입을 위해 처음 만나면서 윤 대통령과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다. 서울중앙지검장 발탁이나 검찰총장 임명,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당시 여권에 윤 대통령을 감싸는 등 엄호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정부의 킹 메이커였지만 그도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예상하진 못했던 것이다.

소문이 무성하고 논쟁적인 인물, 양정철에 대한 한 정치권 인사의 평가다.

“양정철은 실제로 킹 메이커 역할을 하고 대통령을 만든 사람이다. 그만큼 실제 기획력도 인정한다. 다만 그 과정이 투명한 게 아니라 대부분 음모적이어서 항상 장막 뒤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음흉한 이미지가 생긴 거다. 그리고 본인이 또 그걸 즐긴 것 아니냐? 뒤에서 자기가 조종하고 자기의 힘을 은근히 과시하고 다닌 거다. 그러니까 엇갈리는 평가는 자업자득이지 뭐….”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면 어느 자리라도 맡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은 사실상 무보수 명예직인 싱크탱크 수장만 맡았고 끝까지 원칙을 지켰습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여러 차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자리는 한사코 고사하고 은둔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공개석상이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게 양 전 원장 지인들의 전언입니다. 얼마 전 사석에서 공직은 아니더라도 교수로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다른 적합한 일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양비는 먹고살 방도는 있는가?’라는 노 전 대통령의 말처럼 생계는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 대기업 다니며 모은 돈 등으로 생활하면 족하다고 했습니다.

“배 째드리지요.” 그가 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에 대해서도 다시 확인해봤습니다. 2006년 8월 유진룡 당시 문화관광부 차관이 인사 청탁을 들어주지 않자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이었던 그가 청와대 행정관을 통해 이 같은 말을 했다고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양 전 원장은 줄곧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해왔지만 그의 해명은 저조차도 알지 못한 채 그의 강성 이미지만 덧씌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노무현 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들에 따르면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양정철이 그런 말을 했다더라고 누가 들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가 전부인 ‘카더라’였다”며 “당시 소송을 해서라도 진위를 가렸어야 했는데 당시 민정수석실 만류로 적극 대응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억울해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가 2018년 펴낸 ‘세상을 바꾸는 언어’ 책에는 평등, 공존, 배려 등의 개념으로 우리 의식을 좌우하는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말과 글의 힘을 아는 그이기에 오해는 오해였나 보다 생각이 듭니다. 필요에 따라 거친 언어를 쓰며 악역을 맡았지만 알고 보면 부드럽고 문재(文才)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장막 뒤에서라도 통합과 협치를 위한 정치권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해주길 바랍니다.

다음 법정모독 [23화]는 여당의 ‘일타강사’ 장관님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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