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신화 써온 ‘눈물 많은 센 언니’ 박영선[황형준의 법정모독]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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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2014년 5월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에 선출된 박영선 전 장관. 동아일보DB
2014년 5월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에 선출된 박영선 전 장관. 동아일보DB
‘부드러운 직선’은 시인인 도종환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그의 시를 따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63)에게 붙여 준 별명이라고 한다. 부드러움과 곧음, 철과 여인. 모두 정반대의 성질을 띠고 있어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박 전 장관은 부드러우면서도 올곧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엘레강스’한 공주과인 듯하면서도 억척스러운 무수리과다. 외강내강이면서도 외유내강인 듯하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군주의 자질로 언급한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용맹함이 있다. 둘 다 가지기 어려운, 양립불가능한 품성이 동시에 내재된 듯한 미묘하고 복합적인 ‘멋’과 ‘맛’이 있다.

마침 이같이 모순적인 표현을 취재 메모에서 발견했다. 같은 당 중진 A 의원이 2014년 1월에 했던 이야기다.

“박영선이 성질은 ○○워도 외국인투자촉진법안을 소신껏 저지하는 모습은 아름답잖아. 나는 다행히 박영선한테 아직 안 찍혔어.”
- 취재 메모 중 -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었던 박 전 장관은 2013년 12월 31일 여야 지도부가 처리하기로 합의한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을 ‘재벌 특혜법’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며 심야까지 버텼다. 이에 따라 ‘2014년 예산안’은 해를 넘겨 처리가 지연됐고 당시 여당으로부터 “몽니를 부렸다”는 지적도 받았다. 하지만 직언직설하고 소신이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자신의 강성 이미지를 의식한 듯 박 전 장관은 그해 5월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선거 당일 정견발표에서 이같이 호소했다.

“제가 그렇게 센 여자가 아닙니다. 저도 눈물 많은 여자입니다. 저도 어머니의 마음으로 의원님들께 그렇게 다가가겠습니다.”

그는 결국 국회사상 최초로 첫 여성 원내대표에 선출됐다. 두 달 뒤 당시 한 재선 의원은 또 이렇게 평가했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된 것은 참 잘됐어. 일단 당이 참 조용해. 다른 사람이 원내대표가 됐으면 당이 난리 났을 것이다. 이미 탄핵당했었을 것이다. 지금은 의총 때도 발언 신청자가 없다(웃음).”
- 취재 메모 중 -
의원들을 휘어잡은 박 전 장관의 카리스마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박영선을 읽는 첫 번째 코드는 ‘여성’… 남성 주류 사회에 ‘도장깨기’
1983년 3월 동아일보에 실린 23세의 박영선 전 장관. 동아일보DB
1983년 3월 동아일보에 실린 23세의 박영선 전 장관. 동아일보DB


“여자의 뉴스 진행 솜씨가 남자를 따를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있어요. 그러나 최선을 다해 여성도 단독 앵커를 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일 겁니다. 한국의 바버라 월터스가 되겠습니다.”

- 1983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 -


40년 전인 1983년 3월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하는 23세 박 전 장관의 인터뷰 기사다. 당시 그는 밤 11시 50분에 방영되는 MBC TV 마감뉴스의 단독 앵커를 맡아 화제가 됐다. 대학을 졸업한 뒤 아나운서로 1981년 KBS 춘천지국에 입사한 뒤 1982년 MBC에 입사한 그 직후 기자 직군으로 옮겨 입사 5개월 만에 ‘수습 여기자’ 신분으로 단독 앵커를 맡았다.

이처럼 한국의 대표적 여성 앵커를 꿈꿨던, 청초했던 20대 청년(靑年)은 MBC의 첫 여성 특파원, 여성 첫 경제부장 등의 꿈을 이룬 뒤 여성 첫 대변인, 첫 정책위의장, 첫 법제사법위원장, 첫 원내대표 등을 지내며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도장깨기’(유명한 무술 도장을 찾아가 그곳의 유명한 강자들을 꺾는다는 의미)한 결과다.

박 전 장관이 2012년 낸 저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라>에 따르면 그는 MBC LA특파원이던 시절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가 됐던 페라로 여사를 인터뷰했을 당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남보다 두 배 더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성이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여성이라는 것이 왜 콤플렉스가 돼야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극복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남성도 콤플렉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화려한 수식어가 붙었지만 박 전 장관은 백조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면서도 물길질을 끊임없이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여자이기 때문에…’라는 편견 섞인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업무에 빈틈없이 하려고 보다 노력했다. 소신을 지키면서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기회를 만들었다.

박 전 장관은 어린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데 안타까워하는 ‘워킹맘’이기도 했다. 엄마로서의 미안함과 반성 차원에서 똑같은 교재를 두 권 사서 보며 전화로 하루 30분씩 통화하며 아이에게 수학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수학 책을 들고 다녀 놀림도 받았다고 한다.

● 스타 여성앵커 1세대… 겉은 ‘백조’ 속은 ‘악바리’


2012년 낸 저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라>.
2012년 낸 저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라>.


박 전 장관은 어린 시절부터 위인전과 고전, 시 등을 읽는 ‘독서광’이었다. 한 아나운서를 보고 방송의 꿈을 키웠다. 고교 2학년 때 방송반에 들어갔고 방과 후에 방송실에 남아 음악을 듣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몰입하다 보니 성적이 계속 떨어져 1, 2학년 때 갈 수 있던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대학에서 그는 남들이 잘 하지 않던 토플시험을 준비했다. 1학년 때부터 4년간 꾸준히 영어공부를 하면서 향후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는 데 기반이 됐다. 유학을 다녀온 뒤 대학교수가 되라는 부모님의 희망과 방송국을 놓고 진로를 고민했지만 결국 방송국을 선택해 스타 앵커로 성장했다.

박 전 장관은 MBC에서 이름을 떨친 여성 스타 앵커 1세대다. 169cm의 큰 키와 수려한 외모, 또박또박한 발음과 고유의 음색. 박 전 장관이 이후 백지연 김은혜 김주하 등 후배들이 전성기를 이어갔다.

MBC 마감뉴스 앵커 시절부터 ‘악바리’였다. 그는 욕심이 많다는 평가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군사정권인 전두환 정부 시절 9시 메인뉴스 ‘뉴스데스크’에는 기사 삭제 등 문화공보부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 당시 동료였던 인사의 전언이다.

“마감뉴스가 뉴스데스크보다 시끌벅적했어. 뉴스데스크에 못 나간 리포트를 방영하고 장관들 출연시키고 인터뷰도 하고. 감시의 눈이 덜하니까. 자기가 맡은 프로그램을 빛나게 해야 된다는 일념과 욕심…지금도 비슷한 거 같은데? 그런 열정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야.”


당시 11시 50분에 시작하는 마감뉴스 ‘뉴스데이트’는 15분짜리 방송이었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이 여러 정치적 이유로 ‘킬’된 여러 리포트를 편성하면서 방송시간이 15분을 훌쩍 넘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문공부에서 “빨리 방송을 끝내라”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박 전 장관은 조명에도 민감하다. 방송에선 조명의 성능과 위치 등에 따라 화면에 얼굴이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다. 한번은 미국 방송국 관계자까지 불러 2000만 원 안팎의 예산을 들여 조명기기를 손봤다고 한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당시 박 전 장관이 주재하는 원내대책회의 등 회의실에도 조명기기가 설치됐다)

이런 열정으로 박 전 장관은 기자 시절 발로 뛰며 많은 유명인사를 직접 인터뷰했다. 베니그노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등 해외 인사는 물론 김영삼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주영 정몽준 부자와 아티스트 백남준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 “깨끗한 정치로 나라를 바꾸겠다”는 정동영 설득에 정치 입문
2007년 6월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박영선 전 장관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BBK 주가조작 의혹을 제기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7년 6월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박영선 전 장관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BBK 주가조작 의혹을 제기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MBC 기자 시절 박 전 장관은 한 번도 정치인을 꿈꾸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권에 많이 진출했던 정치부 기자는 한 번도 하지 않고 경제부와 문화부, 국제부 등에서 근무했다. 정치부 청와대 출입을 하면서 영부인 관련 보도를 담당하라는 요구도 있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경제부 기자 출신으로 오히려 한 우물을 판 게 국회의원으로서 도움이 됐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국회 재경위(현 기재위)에서 재벌개혁을 외치며 ‘재벌 저격수’, ‘삼성 저격수’라는 별명도 얻었다.

MBC 선배인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당 대표격)의 적극적인 권유로 그는 2004년 당 대변인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정 전 의장은 지인인 이원조 국제변호사를 박 전 장관에게 소개시켜 줬던 사이다. (두 사람은 1997년 3월 LA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당시 박 전 장관의 나이는 37세였고 이 변호사의 나이는 43세로 여섯 살 차이다)

박 전 장관이 2015년 발간한 저서 <누가 지도자인가>에는 박 전 장관이 정 전 의장의 제안을 수락한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2004년 1월 11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가 열리던 날 오후 4시경 정 전 의장이 전화를 걸어 저녁에 남편과 함께 보자고 했다.

“중요한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보자고 했소. 깨끗한 정치를 국민께 전달하려면 그 이미지에 걸맞은 당 대변인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꼭 맡아주시오. 당선 축하 모임에도 가지 못하고 여기로 왔습니다. 당 의장이 돼서 처음하는 간절한 부탁이니 맡아주시오.”
예상하지 못한 제의였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정치하는 것은 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며, 정 의장을 당 공식 축하모임에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누가 지도자인가> 중에서 -
사실 그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은 것은 사실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쪽으로 제안이 들어왔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외로 남편은 “대한민국 사회는 좀 더 깨끗해질 필요가 있고, 정 의장이 그런 정치를 하겠다고 하니 가서 한번 도와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라고 찬성했다. 이틀 뒤 아침 정 의장은 깨끗한 정치로 나라를 바꿔 보겠다고 거듭 설득했고 “남편을 중매해 줬으니 그 빚을 갚으라”는 말까지 하자 박 전 장관은 그날로 MBC에 사표를 내고 당 대변인직을 수락했다.

● 3번의 서울시장 낙마… 축적과 변신의 기회로


정치인으로 변신해 2004년부터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박 전 장관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치권 입문을 이끌었던 정 전 의장은 17대 대선에서 후보로 나섰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 등으로 2007년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이명박 대선 후보의 BBK 주가조작 의혹 제기에 앞장섰지만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됐다. 가족과 주변인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된 게 그에겐 큰 상처였다.

2008년 3월 검찰로부터 출석요구서가 날아와 검사와 직접 통화를 했는데 그 검사는 “혹시 이번 선거에 출마 안 하십니까. 출마하시면 소환을 조금 뒤로 미룰 수 있을 것 같아서…”라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고 한다.

그 말을 계기로 재선 출마 결심을 굳힌 박 전 장관은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출마해 당선된다. 박 전 장관은 그해 5월 말 검찰 조사를 받았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 한국에서 근무하기 힘들어진 남편은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가족이 흩어진 건 평생 회한이 됐고 울화가 쌓인 계기가 됐다.

비례대표에 이어 서울 구로을 지역구 선거에서 3번 당선됐지만 서울시장 선거에선 경선을 포함해 3번이나 실패했다. 3번 중 2번은 모두 당의 뜻에 따라 떠밀려 나간 선거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줄 알았다. 재선 의원이 되면서 그는 상임위를 법무검찰을 담당하는 법사위로 바꾸며 ‘검찰 개혁’의 선봉에 섰고 3선 의원 때는 법사위원장을 맡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박 전 장관은 점점 강인해지고 ‘철의 여인’이 되고 있었다.


<8화> 커튼콜에서 박영선 전 장관에 대해 ‘부드러운 직선’과 ‘철의 여인’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댓글을 단 독자 중에 정확히 맞히는 분도 계셨지만 지인 중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을 언급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지만 박 전 장관은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섬세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 선구자적인 면모가 있다는 게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언젠가 박 전 장관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어렴풋이 앵커 시절 박 전 장관을 TV 브라운관에서 본 것 같지만 제 기억 속엔 정치인의 모습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뒤늦게 그가 20대 방송기자 시절부터 ‘스타’였음을 실감했습니다. 이 같은 대중성은 다른 여성 정치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그의 자산입니다.

박 전 장관은 올해 초부터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낙마한 뒤 9월부터 3개월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수석고문으로 활동하며 미국 내 기업, 연구소, 대학 등 최첨단 산업기지를 둘러본 데 이어 두 번째 미국행입니다. 박 전 장관은 자신의 SNS에 저명한 교수들의 수업 내용을 공유하며 국제정치와 미국 지도자들의 전략 등을 배우며 한국의 외교안보전략을 고민 중입니다. 그 내용을 엮어 책으로 출간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두 차례 유학의 주제가 ‘서울시장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는 언론, 경제, 법조, 산업, 외교안보 등 전문분야들을 하나하나씩 ‘도장깨기’하며 폭넓게 고민하고 천착해 왔습니다.

이번 글에선 박 전 장관 인생의 전반전을 주로 다뤘습니다. SNS와 유튜브를 즐겨 보는 세대에게 좀 더 그의 과거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이 글에 담겼습니다. 다음 주 9일 공개되는 <10화>에선 인생 후반전에 해당하는 ‘정치인 박영선’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그가 지금 목소리를 내고 있는 디지털정당과 공천개혁, 그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향후 행보에 대해 분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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