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맥스서 멈췄는데 사과문이 전부?…뮤지컬업계, 배상 ‘나몰라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4일 10시 59분


코멘트
지난달 27일 출연 배우의 사정으로 20분간 공연지연됐던 뮤지컬 ‘베토벤’. 제작사측은 사과문을 통해 입장을 밝혔지만 소비자분쟁해결기준상 별도의 관객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EMK 제공
지난달 27일 출연 배우의 사정으로 20분간 공연지연됐던 뮤지컬 ‘베토벤’. 제작사측은 사과문을 통해 입장을 밝혔지만 소비자분쟁해결기준상 별도의 관객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EMK 제공

지난달 27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 뮤지컬 ‘베토벤’은 배우 사정으로 공연이 예정보다 20분간 지연됐다. 이로 인해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은 좌석에서 멍하니 20분간 대기해야만 했다. 심지어 제작사측의 공연 지연 안내는 예정됐던 본 공연을 고작 10여분 앞두고 이뤄졌다. 지방에서 온 일부 관객은 돌아갈 차편 시간 등의 이유로 커튼콜을 못 본 채 뛰어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보상은 없었다. 제작사측의 사과문이 전부였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상 ‘30분 이상 지연 시 보상’이란 이유에서다. EMK 관계자는 “초과 주차비는 현금으로 지급했다”고 했다.

최근 국내 뮤지컬 제작사들이 공연 지연, 캐스팅 당일 변경 등 사고가 벌어져도 관객에게 제대로 된 배상 없이 ‘나 몰라라’ 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VIP석 장당 20만 원에 육박하는 고가의 티켓 값을 감수하면서도 공연을 관람하는 팬덤 수요 덕분에 팬데믹 이후 회복된 시장의 호황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실한 대책 탓에 불만이 커지고 있다.
●공연 클라이맥스서 멈췄는데 사과문만 덩그러니
공연이 지연되거나 중단되는 사고는 부지기수다. 지난해 성탄절에는 뮤지컬 ‘물랑루즈’가 기계 결함으로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 2막 공연 중반부쯤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은 크리스티안과 사틴이 넘버 ‘크레이지롤링’을 부르던 중 갑자기 노래가 끊기고 공연장 불이 켜진 것. 결국 공연은 중단됐고 “기계 결함으로 잠시 공연을 중단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뒤 3분간의 기기 정비 끝에 공연이 재개됐다.제작사인 CJ ENM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불편을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사과문만 올렸을 뿐 이날 이후 보상은 없었다. 관련 게시물엔 항의성 댓글 80여 개가 달렸다.

주연 배우가 갑작스럽게 교체됐을 때도 취소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수준에 그친다. 뮤지컬 ‘스위니토드’는 이달 9일과 지난달 17일 각각 러빗부인 역과 토비아스 역 배우가 건강상의 이유로 공연 당일 변경됐다. 보상은 예매 환불·취소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오디컴퍼니는 “별도 보상이 없는 데 대한 공식 입장은 없다”고 했다.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배경에는 소비자분쟁해결기준상 제작사의 보상 기준이 ‘자율’에 맡겨져 있다는 점이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공연이 30분 이상 지연·중단되면 티켓 값 110%를 배상해야 하지만 30분이 지나지 않았다면 제작사가 자율적으로 보상안을 결정한다. 주요 출연자가 바뀔 때도 자율적으로 110%를 돌려주게 돼있다. 지난달 13일 음향기기 오류로 공연 시작이 30분 지연된 쇼노트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경우 인터미션까지 환불을 요청한 관객에게 티켓 값의 110%를 돌려줬다.
●해외에선 ‘프리뷰 공연’으로 관객과 합의
제작사들은 사고마다 일일이 관객에게 배상할 경우 손실이 클 뿐 아니라 실시간 공연 특성상 사고의 유형과 규모가 천차만별이라 범주를 나누기도 힘들단 입장이다. 쇼노트 관계자는 “특히 초연일 경우 회당 들어가는 제작비가 막대하다”며 “해당 회차 티켓을 전부 팔아도 남는 게 많지 않아 환불까지 해주면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또 다른 뮤지컬 제작사 관계자는 “무대장치 결함, 배우 컨디션 등은 예측이 어렵고 사고의 경중을 계량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며 “이는 해외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다만 국내 공연계의 수익 창출의 큰 축이 스타캐스팅을 토대로 한 두터운 팬덤이란 측면에서 철저한 관객 보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스타캐스팅, 해외 라이선스 등에 지불하는 막대한 비용을 값비싼 티켓으로 충당한다. 2000여 석 안팎 규모 대극장에서 열리는 뮤지컬의 VIP석 가격은 15~19만 원까지 치솟았다.

해외 역시 환불이 수월하진 않지만 ‘프리뷰 제도’를 운영해 사고에 대비한다. 본공연 전에 미리 문제점을 파악하고 보완하기 위한 시범공연으로 관객은 대신 저렴한 가격에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파이더맨’은 2010년 초연 당시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자 프리뷰만 7개월을 했다. 원종원 순천향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프리뷰를 통해 모든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공연은 실시간 예술’이라는 암묵적 합의를 이끌어낸다”며 “수익성 높은 단기공연 위주라 초장부터 티켓을 팔아야 하는 국내 공연계는 프리뷰에 관심이 없고 ‘피켓팅’에 지친 팬들은 이해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